[ART + CULTURE] 심문섭, 時光之景(시간의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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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4, 2023

글 심은록(SimEunlog MetaLab 연구원·미술 비평가)

통영의 바다와 홍콩의 바다가 만났다. 거센 바람을 안은 통영의 파도가 지나간 뒤, 잔잔한 빛을 담은 홍콩의 파도가 밀려온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페로탕 홍콩 전시장의 벽창을 통해 바다가 보인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통영의 바다가 출렁거린다. 바다를 통해 각각 다른 두 나라가 대화하고, 실제와 이미지가 어우러진다. 섬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 의해 이어진다’는 심문섭의 시구(詩句)가 떠오른다. 심문섭(b.1943)이 갤러리 페로탕과 함께한 첫 개인전 <時光之景(시간의 풍경)>의 전시 뷰다. 오른쪽 벽창을 통해 홍콩 바다와 마천루 건물이 보인다. 왼쪽 벽면에 자리한 그의 작업은
물과 빛이 만나 유희한다.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규칙적으로, 때로는 카오스처럼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건져 올린’ 것과 ‘부서져 내리는’ 것, ‘푸른색’과 ‘하얀색’, ‘깊음’과 ‘높음’의 미학적 소통이다.


‘깊은 바다로부터 건져 올린 근원적 푸른색
하늘로부터 부서져 내리는 욕망이 부서지는 하얀색’ _심문섭


심문섭의 작업은 물의 풍경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풍경이기도 하다. 낮뿐 아니라 밤의 풍경도, 아침의 노을도, 저녁의 석양도 화면 위에 차경(借景)된다. 그러면서 ‘물의 길’이 만들어지고, ‘빛의 길’이 드리운다. 그의 회화 작업은 확장성이 있어, 파도가 화면을 넘어 이어지는 것 같다. 파도가 넘실넘실 캔버스를 벗어나 벽으로, 공간으로 확장된다. 마티에르의 시간성에 대해 늘 생각하는 심문섭의 작업은 그래서인지 MZ 감각과도 잘 어울린다. 어느 전시에서 그의 그림을 넋 놓고 바라보던 어떤 청년이 “멍 때리기 좋다!”며, 한참 더 그림 앞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불멍(아무 생각없이 오래 장작불을 응시한다는 뜻의 캠핑족 신조어)’이 아니라, ‘물멍’과 그 위로 드리우는 ‘빛멍’이다.
페로탕 홍콩 전시 제목 <시간時間의 풍경>, 좀 더 정확히는 <시광時光의 풍경>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한자가 우리에게 익숙한 ‘時間(광둥어, 时间 만다린어)’이 아니라, 낯선 ‘時光(광둥어, 时光 만다린어)’이다. ‘시간’은 몇 시, 몇 분과 같이 하루를 24시로 나누고, 1시간을 60분으로 나누는 인위적인 규칙이다. 반면 ‘시광’은 해, 달, 별 등과 같이 빛(光)으로 시(時)를 가늠한다. ‘시간’은 인간의 규칙이고, ‘시광’은 자연의 움직임이다. 이는 근대 서양화(자아의 관점으로 보는 원근법)와 동양화(자연의 관점으로 보는 이동 시점)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다. 반면 심문섭의 회화는 리듬이 출렁이는 이동 시점으로 보이는 서양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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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으로’
프랑스인들은 심문섭의 팔레 루아얄 공원 전시(2006)를 보며 많은 감동을 받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PVC로 된 투명한 배가 하늘 위로 떠다니고(양쪽 나무에 걸쳐 있음), 그 배에는 바람을 타고 낙엽들이 무임승차하고 있다. 분수에는 미니멀화된 직사각형의 나무 배가 돌을 얹고 떠다닌다. 잔디밭 위에는 마치 땅의 ‘호흡(숨)’을 보여주려는 듯 원기둥형 PVC 작업이 반복해서 부풀어 올랐다가 사그라지곤 한다. 배경으로 도리안 스타일의 콜론이 오버랩되는 것이 흥망성쇠를 비유하는 것도 같다. 유서 깊은 프랑스식 ‘정원’이 몇 점의 작품 덕분에 ‘섬’이 되었다.
이 프랑스식 정원은 오랜 유산과 시간이 중첩되어 있고, 루브르 미술관이 지척이며,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 문화부 등이 입주해 있다. 주변 풍경이 화려하고 강해 전시를 잘해내기가 쉽지 않다. 이 공원의 다른 편에 있는 다니엘 뷔랑의 ‘두 개의 플랫폼’, 폴 부리의 분수, 좀 더 멀리 장-미셸 오토니엘의 ‘야행자들의 키오스크’ 등처럼 장소적 특성을 파괴하거나, 화려하게 튀어야 작품이 눈에 보인다. 그런데 심문섭의 전시는 놀랍게도 허(虛)를 찔렀다. 약함으로 강함을, 자연적 요소의 도움으로 인위성을 극복했다. 웅장하고 장구한 장소에 감성이 젖어든 은은한 서정시처럼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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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조각의 연장으로서 회화
‘반(反)조각’ 작가인 심문섭은 5백70개의 섬이 있는 경남 통영에서 출생해 한국을 비롯해 프랑스, 일본, 중국 등에서 30회가 넘는 개인전을 개최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는 1960년대 말 새로운 조각을 추구하는 ‘제3조형회’와 1970년대 AG(아방가르드) 운동 등을 통해 사유와 고민을 하며 ‘반조각’을 주창했다. 이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전 세계에서 발생한 아르테 포베라, 모노하 등 중요한 미술 운동의 골자와 맞물린다. 그는 1968년, 1969년, 1970년 세 차례 국전에서 수상하고, 1971년부터 파리 비엔날레에 3회 연속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상파울루 비엔날레(1975), 시드니 비엔날레(1976), 베니스 비엔날레(1995, 2001) 등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알렸다. 또 1981년 일본에서 개최된 제2회 헨리 무어 대상전에서 우수상을, 2007년 프랑스 문화 예술 공로 훈장 슈발리에를 받는 등 해외 각국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과천관)에서 유례없는 큰 개인전을 가지기도 했다. 심문섭의 회화는 ‘반조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이미 1973년과 1975년 파리 비엔날레에서 종이, 캔버스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평면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그의 작업은 아무 생각 없이 ‘물멍’을 하게도 하지만, 반대로 ‘반조각’이라는 그의 끊임없는 저항, 단색화의 입체적 확장, 마티에르의 시간성 등을 사유하게 한다. 쥘 앙리 푸앵카레는 “어떤 규칙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규칙이 마치 절대적이며 바꿀 수 없는 진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심문섭의 작업은 데카르트를 패러디한 ‘나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떠올리게 한다. 규칙이 진리가 아님을 꾸준히 상기시키는 것 역시 예술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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