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try of S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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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 2015

에디터 고성연 | photographed by park gun zoo

“향이 하나의 단어라면, 향수는 하나의 문학이다.” 자신을 가리켜 ‘향기를 쓰는 작가’라고 말하는 조향사가 있다. 근사하지만 언뜻 알맹이 없는 클리셰처럼 들릴 수도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에르메스의 전속 조향사 장-끌로드 엘레나(Jean-Claude Ellena)가 만든 향수를 ‘음미’해보면, 그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인물임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향수를 설명할 때 그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들어맞으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과연 조향사들이 경외한다는 조향 장인답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들어선 국내 최초의 에르메스 퍼퓸 부티크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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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단편소설, 시, 그리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쓰인 짧은 단어로 이뤄진 몽상…. 조향계의 예술가로 통하는 장-끌로드 엘레나가 향을 분류하는 방식이다. “저는 향수가 문학과 같다고 생각해요. 각각의 향을 이루는 단어를 모아 향수라는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거죠.” 그는 2004년 에르메스에 합류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실천으로 옮겨 문학 장르를 따르는 자신만의 독특한 향수 분류법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그가 지난 10여 년에 걸쳐 에르메스와 함께한 창조적 여정 속에서 세상에 선보여온 향수 컬렉션은 ‘서재’라고도 불린다. 하나의 주제(theme)를 지닌 간결함을 담은 건 시,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인물이나 사건이 많지는 않은 느낌이라면 단편소설, 플롯이 제법 복잡하고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으면 장편소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남성적인 느낌이 짙고 복잡미묘한 향을 담은 에르메스의 베스트셀러 ‘떼르 데르메스(Terre D’Hermes)’ 같은 제품은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분류된다.
완벽한 창작의 자유 속에서 무르익은 조향의 혼
장-끌로드 엘레나와 에르메스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에르메스처럼 장인 정신 충만한 브랜드도 드물고, 향수의 고장인 프랑스 남부 그라스에서 태어나고 조향사 집안에서 자란 그 역시 장인의 면모를 가득 품고 있다. 실제로 에르메스에 전속되는 ‘인하우스 조향사’라는 그의 직함은 향수를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장인 정신으로 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전속 조향사를 두는 브랜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어요. 이미 1970년대부터 향수 선택권이 조향사가 아니라 ‘시장의 수요’를 분석하는 기업 마케팅 팀으로 대부분 넘어가버린 지 오래였으니까요. 그런데 에르메스의 장-루이 뒤마 회장은 제게 손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죠. 숫자나 마케팅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창작을 해달라고요. 굳이 남녀 향수를 구분하는 것도 사실 의미 없는 마케팅이거든요.” ‘원하는 걸 만들어낼 수 있는 온전한 창작의 자유’. 그 어떤 크리에이터가 이런 제안을 뿌리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1951년부터 향수 사업을 해온 에르메스의 첫 번째 작품을 만든 혁신적인 조향사 에드몽 루드니츠카의 열렬한 숭배자이기도 했다. 장-끌로드 엘레나는 기꺼이 에르메스와의 동행을 택했고, 나중에는 전속 조향사를 둔 향수 브랜드가 하나둘 생겨났다. 그가 처음 만든 에르메스 향수는 지중해의 정원에서 영감을 얻은 ‘자르뎅 메디떼라네(Un Jardin en Me`diterrane`e)’. 무화과와 삼나무, 베르가모트 향이 나는 이 향수를 그는 ‘중편의 여행담’ 정도로 여기는데, 실제로 지중해 정원을 돌아보고는 3일 만에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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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를 사랑하는 크리에이터
그렇다고 해서 속전속결형은 결코 아니다. 그는 어떤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형상화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있는 장소와 선택한 소재에서 출발해 향수를 만든다고 강조하는데, 이 과정에서 때로는 ‘그분’이 빨리 오기도 하고, 때로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나는 고민에 익숙하다”라고 늘 말하는 그는 한 향수를 만드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한 적도 있다. 바로 그가 ‘개인적인 향수’라고 표현할 만큼 애정을 쏟아 만든 ‘에르메상스(Herme`ssence)’ 컬렉션 작품이다. “한 사람이라도 좋아하면 만족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이 배어나는 이 향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에르메상스 컬렉션을 일본의 전통 시인 하이쿠처럼 간결하고도 강렬한 감성으로 풀어냈다고 설명하면서 그는 동양 문화와 자신의 향수 철학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다고도 말했다. “1970~80년대에 일본과 중국 등을 방문하면서 우연히 미술 등 동양 문화를 접했는데, 여백을 중시하는 저의 성향과 맞닿는 걸 느꼈어요. 저는 여백도 말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향의 여백이야말로 문학처럼 해석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는 논리다. 향 역시 그걸 즐기는 자의 것이니까. 그는 이번에 중국의 정원을 거닐다가 영감을 받아 만든 향수를 내놓기도 했다. 정원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자르뎅 무슈 리(Le Jardin de Monsieur Li)’다. 그린 노트 향이 상큼하면서도 은은한 이 작품은 그의 분류법에 따르면 ‘단편소설’이다. 이쯤 되자 궁금해졌다. 문학 애호가이기도 한 이 나이 지긋한 조향사가 혹시 자신의 글을 쓰지는 않는지? 별로 놀랍지 않게도, 그는 이미 네 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그중 자신의 일상적인 조향 작업 중 떠오른 단상과 철학을 담은 책 <어느 조향사의 일기(Journal d’un Parfumeur)>는 <나는 향수로 글을 쓴다>라는 번역서로 갓 나왔다. 글에서 풍기는 진솔함이 그의 향수를 닮았다.

문의 02-310-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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