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 of col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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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7, 2021

글 고성연| 사진 제공 루이 비통 코리아,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이름만 들어도 귀가 쫑긋할 만큼 드높은 명성을 지닌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그동안 국내에서는 ‘전시’ 형식으로 접하기 쉽지 않았던 독일 출신의 거장 리히터가 빚어내는 ‘색의 연금술’이 서울 하늘을 수놓고 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오는 7월 18일까지 열리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가지 색채>전. 지친 영혼에 즐거운 쉼표를 선사하는 이 전시는 ‘작지만 큰’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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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고가 높아 시원한 느낌이 드는 전시장에 들어서면 새하얀 벽면을 감싸는 알록달록한 그림 넉 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기만 다를 뿐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채로운 색상의 정사각형 색종이, 혹은 장난감 블록을 이어 붙인 듯한 이 추상 작업들은 ‘4900 FARBEN(4900가지 색채)’이라고 불리는 한 세트의 작품이다. 별다른 정보 없이 방문했다면 ‘설마 이게 다야?’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골똘히 들여다보면 매직 아이처럼 뭔가 더 보이려나?’라는 호기심이 솟을지도. 동시대 최고의 현대미술가로 작품 한 점에 수백억원씩 한다는 ‘비싼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아닌가. 자본주의가 낳은 럭셔리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현대미술을 둘러싼 작품가 논쟁은 접어두고, 리히터의 작업은 어째서 그리도 독보적이라 여겨지는 걸까? 단순미 넘치는 이번 전시에서 그 답이 살짝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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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약’을 추구하는 카멜레온 같은 끝없는 실험

1932년 옛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리히터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고향의 처참한 광경을 목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회주의 체제 아래 선전용 벽화 작업을 주로 하면서 제한된 자료와 예술적 영감의 한계를 느끼던 그는 1961년 서독으로 향했는데, 불과 몇 달 뒤 베를린장벽이 세워졌다. 당시 쟁쟁한 대가와 인재가 모여 있던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엥포르멜, 플럭서스, 팝아트 등 새 흐름을 접하면서 그 역시 다양한 시도를 한다. 하지만 정치든 예술이든 이데올로기를 혐오했던 만큼 특정 사조나 경향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잡지나 가족의 사진 이미지를 차용해 윤곽을 흐리는 기법으로 마치 초점이 어그러진 사진처럼 보이지만 외려 회화적인 느낌을 주는 ‘포토 페인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채색과 단색의 ‘경계’를 넘나들며 끝없이 새로운 언어를 선보였다. 그리고 방대하고 독창적인 작업 세계로 평단과 컬렉터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LVMH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애정을 쏟아부은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도 그의 커리어 50여 년을 아우르는 작품 32점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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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 없는 색들의 무작위 조합이 선사하는 기쁨
그중 올봄 서울로 나들이 온 ‘4900가지 색채’(2007)는 모두 11가지 버전이 있다. 알루디본드 소재에 에나멜 스프레이로 채색한 작은 사각형(9.7X9.7cm)을 가로세로 5개씩 붙인 25개가 기본 단위의 ‘패널’인데, 총 1백96개 패널이 있기에 4900(196X25)개 컬러 스퀘어로 구성된 작품이다(색상은 중복된다). 바로 이 패널들이 ‘판(plate)’을 이루는 조합 방식에 따라 버전이 달라진다(모든 패널이 따로 떨어져 1백96개 판이 되는 ‘버전 I’부터 모든 패널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판을 이루는 ‘버전 XI’까지). 서울 전시의 ‘픽’은 4개의 판으로 된 아홉 번째 버전이다. 가장 넓은 벽면에 크기가 같은 판 2개가 나란히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중간 크기의 판, 그리고 외부의 빛이 들어오는 테라스와 맞닿은 벽면에는 제일 작은 판이 자리한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모든 색은 독자적이며 대체 불가능하다고 한다. 리히터도 위계 없이 평등한 색의 개별성에 주목했다. 4900의 색 배열도 작가의 개입 없이 컴퓨터를 통해 임의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원류를 따져보면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인트 가게에서 산업용 페인트 색상표를 보고 ‘이미 완전하다’고 감탄한 리히터는 이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겼고, 이처럼 주관성을 탈피하며 색을 실험하는 ‘컬러 차트’ 작업을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한다. 그리고 수십 년 뒤,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이기도 한 쾰른의 상징인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의뢰받고는 다시금 이 차트를 떠올린다. 남쪽 측랑의 훼손된 창문을 재디자인하는 작업이었는데, 성당은 고심 끝에 현대적인 패턴을 입히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중세의 창문에 실제로 쓰인 72가지 색상을 뽑아내 1만1천5백 장의 수공예 유리로 만들되 컴퓨터로 임의 조합한 ‘돔펜스터(Domfenster)’(2007) 작업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에 영감받아 리히터는 ‘4900가지 색채’도 동시에 제작했고, 이 시리즈는 세계 곳곳에서 저마다의 전시 공간에 어울리는 버전으로 선보이고 있다.
사실 배경지식은 잊어도 된다. 단, 10초라도 평정심을 갖고 가만히 응시하는 감상법을 추천한다. 무한 확장하는 색의 스펙트럼이 선사하는 밝고 역동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필자에게는 어느 순간 색들이 춤을 추더니 드레스덴에서 본 리히터의 경이로운 추상 회화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다름 아닌, 색의 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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