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Search of Henri Matisse’s Tr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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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 2017

글 고성연

순수하고 강렬한 색채, 단순한 선만으로 누구보다도 더 눈부신 ‘빛’을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듣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원색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는 스무 살이 넘어 미술에 입문했지만 50여 년 세월에 걸쳐 하루에 평균 12시간씩 작업을 할 정도로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시대를 넘나드는 영혼의 울림을 남긴 이 위대한 예술가의 자취를 그가 태어난 르 카토-캉브레시(Le Cateau-Cambre´sis)와 생의 후반기를 수놓은 코트다쥐르(Co^te d’Azur)에서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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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기차(TGV)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북서부 중심지 릴(Lille). 사실 벨기에와 더 가까운 플랑드르(Flandres)의 역사적인 중심지이던 이 도시에서 다시 1시간 남짓 차로 이동하면 르 카토-캉브레시(Le Cateau-Cambre´sis)라는 작고 한적한 마을에 닿을 수 있다. 20세기가 낳은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태어난 곳이자 마티스 미술관(Matisse Museum in Le Cateau-Cambre´sis)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많은 이들이 마티스 하면 그가 인생 후반기의 대부분을 보낸 남프랑스를 떠올리지만, 이 미술관은 마티스 본인이 기증할 작품을 직접 골라 어떻게 공간에 배치할지까지 관여하면서 꽤나 공들인,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소’다.

‘잿빛 하늘’에서도 자라난 풍부한 감성
1869년 12월 마지막 날, 르 카토-캉브레시에 있는 외가에서 마티스가 태어난 직후 그의 가족은 보엥 앙 베르망두아(Bohain en Vermandois)라는 인근 마을로 이사한다. 마티스의 부친은 가부장의 권위를 중시하는 종묘상이었는데, 아들이 자신의 뜻을 받들어 성실한 법관이 되리라 믿었다. 실제로 마티스는 어릴 때는 가업을 도우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열여덟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는 생캉탱에서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가가 될 운명이었을까? 1890년,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은 뒤 병상에 누워 있던 마티스에게 그의 어머니는 시간이나 때우라고 물감통을 건넨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애초에 그림을 향해 뻗어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였다. 예술의 희열을 알게 된 마티스는 물감통을 들고 나가 마을 어귀의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사실 마티스의 어머니는 찻잔에 손 그림을 그려 넣는 부업을 하기도 했던지라 그에게 ‘그리기’라는 게 전혀 낯설지는 않았을 터다. 당시 프랑스 북부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로 ‘잿빛 하늘’과 탁한 공기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격변기에도 그에게는 탁월한 영감의 원천이 있었다. 바로 ‘직물’이다. 당시 보엥은 유럽 전역에서 장인 정신이 깃든 질 높은 섬유·방직 기술로 유명한 곳이었다. 샤넬 같은 오트 쿠튀르 브랜드들의 직물 공급처 역할을 하던 보엥에서 쉽게 접할 수 있던 아름다운 옷감은 그에게 풍부한 시각적 자료가 됐다. 실제로 보엥에 위치한 마티스의 집을 방문하면 재봉틀과 색색의 천 조각, 마네킹 같은 ‘섬유가 흐르는 DNA’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마티스는 평생에 걸쳐 색색의 천과 문양에서 영향을 얻어 작품을 창조해냈다.
“마티스는 20세기 후반 팝 아티스트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고, 그 사물에서 장식적인 요소를 찾아냈다.” <디스 이즈 마티스(This is Matisse)>라는 책을 펴낸 캐서린 잉그램(Catherine Ingram)은 당시 장식적인 것은 천박한 예술로 여겨졌지만, 마티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서 보엥의 장인과 상인이 수놓은 거리 문화가 그에게 창조적 영감을 줬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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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숙명을 안고 파리로 향하다
그림에 눈을 뜬 마티스는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마침내 파리로 향한다. 그는 파리 장식미술학교에 적을 둔 채 명성 높은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 들어가기 위해 수험 준비를 했는데, 그러던 중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어 제자로 들어간다.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에 합격하기는 했지만 우연히 접한 인상주의에 매료되었다. 당시 화단에서는 데생, 즉 선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신봉됐지만, 마티스는 색채를 중시하면서 자신만의 탐색을 펼쳐나갔다. 스승 모로는 상징주의자인 자신과 어긋나가는 마티스의 성향을 알면서도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1897년, 사물을 자신만의 색채로 표현해낸 ‘만찬 식탁(Dinner Table)’을 국립 살롱전에 출품해 온갖 비방이 쏟아졌을 때도 제자를 제일 먼저 옹호한 인물이 모로였다.
결국 마티스는 에콜 데 보자르를 중퇴했고, 프랑스 남동부 툴루즈 출신의 여성 아멜리 파레이르(Ame´lie Parayre)와 결혼도 했다. 마티스는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난 런던에서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의 그림을 접하면서 환상적인 빛의 표현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또 다른 여행지인 코르시카 섬으로 떠나서는 아예 봄과 여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마티스는 지중해의 빛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었음을 확실히 깨닫는다. 하지만 화가로서 크게 인정받지도 못했던 데다 강박적이라 할 만큼 수집가 기질을 보이는 바람에 나름의 생활고에 시달린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그가 특히 매료된 폴 세잔(Paul Ce´zanne)에 반한 나머지 부인 아멜리가 에메랄드 반지를 전당포에 맡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마침내 마티스가 어떤 식으로든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05년 국립 살롱전에서 선보인 아멜리의 초상 ‘Portrait of Mme Matisse: The Green Line’이었다. 연청색이 감도는 녹색 선이 코를 가로지르는 평평한 얼굴, 연보라색이 도는 틀어 올린 머리…. 무표정인데도 시선을 압도하는 묘한 기개가 느껴지는 이 작품은 당시 마티스가 수집하던 아프리카 조작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표현 방식으로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아멜리 본인조차 ‘불타 무너져 내리는 집을 보고 경악하는 모습’이라고 표현할 만큼 사물의 본색과 다른, ‘마음의 눈’으로 담은 강렬한 색채를 잔혹할 만큼 거침없이 내지른 덕분에 그는 ‘야수파’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다.

빛의 천국 코트다쥐르에서 찾은 안식, 그리고 영감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벌이던 마티스는 1908년 그의 명작 중 하나인 ‘붉은 방(Red Room)’을 선보인다. 붉은 식탁과 여인, 정물이 놓여 있지만 강렬하고 붉은 식탁보가 그림을 지배하는 대담한 작품이다. 꽃병에 담긴 꽃줄기가 마치 벽으로 솟은 아라베스크의 나뭇가지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당시 피상적인 세상의 물질을 거부하면서 보이지 않는 역동적인 힘에 초점을 맞춘 저명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과 상통했고, 마티스는 점차 ‘긍적적인’ 주목을 받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러시아 부호이자 세기의 아트 컬렉터 세르게이 시추킨 등 그의 후원자도 나타났다.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씨앗을 뿌린, 20세기 회화에 획을 그은 그의 작품 ‘댄스’도 시추킨을 위해 그린 것이었다(훗날 시추킨이 대부분의 컬렉션을 남겨두고 파리로 망명하는 바람에 마티스의 명작 중 상당수는 러시아에 있다). 덕분에 마티스는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았고, 수년간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니면서 작업을 발전시켜나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는 참전하길 원했지만, 45세라는 나이 때문에 거부당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어지러운 정세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아내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티스는 1917년부터 니스에서 혼자 지내다시피 했다. 쪽빛에 가까운 ‘푸른 해안’이라는 뜻을 지닌 코트다쥐르(Cote d’Azur)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프랑스 남부 지역의 중심 도시 니스. 사실 마티스가 니스에 둥지를 튼 것은 기관지염 때문이었다.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의사의 권유로 니스를 방문했다가 눌러앉았다. 전쟁통의 우울함을 피할 수 있었던 데다 늘 빛을 갈구한 마티스에게 코트다쥐르는 영혼의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과감한 실험을 시도하던 마티스는 니스에서 원하던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일벌레의 본능을 잃지는 않았다. 풍경도 그리고 조각 작업도 했지만 유기적인 곡선과 자유로운 필치가 돋보이는 오달리스크(odalisque, 터키의 궁녀) 그림 같은, 동양에 대한 환상을 담은 작품도 많이 남겼다. 관능미 넘치는 이런 작품은 당시 비평가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잊으려고 발버둥치는 과장된 몸부림이라는 논조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스스로도 ‘걸작’이라고 말한 작품은 코트다쥐르에서 탄생했다. 바로 니스에서 멀지 않은 방스(Vence)에 있는 로제르 예배당(Chapelle du Rosaire)이다.


진지하고도 경쾌한 삶의 마무리
마티스는 이때 이미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그나마 십이지장암 수술과 두 차례의 폐색전증을 겪고도 목숨을 이어나간 것 자체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생이 끝나갈 무렵 신앙심이 절로 돋은 사례는 아니었다. 마티스는 “신을 믿느냐고? 작업할 때는 믿는다”라고 할 정도로 신앙심을 강조한 적 없는 인물이었지만, 니스에 있을 때 간호해준 모니크 부주아 수녀와의 인연 때문에 예배당 프로젝트를 결심했다. 그녀는 마티스가 커리어 후반기의 창조적 희열을 느낀 ‘종이 오리기’를 통해 탄생한 또 다른 명작 ‘재즈(Jazz)’ 작업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1946년 수녀가 되면서 방스에 있는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을 부탁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단지 스테인드글라스만이 아니라 예배당의 모든 요소에 관여하면서 4년이라는 시간을 쏟았다. 단순하지만 균형 잡히면서 명랑한 느낌이 뜨는 이 예배당은 그의 예술관이 집대성돼 있는 ‘작품’이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는 모든 이들이 마음이 정화되고 삶의 짐에서 벗어나는 안식을 느끼기를 바란다고 했던 마티스. 그는 1952년 고향 르 카토-캉브레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생긴 지 2년 뒤인 1954년 삶을 마감하고, 그토록 사랑해마지않던 니스 시미에 묘지에 묻혔다. 마티스는 “일이 모든 걸 치유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MISCELLAN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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