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madic Lux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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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 2019

글 고성연(밀라노·홍콩 현지 취재) | 사진 제공 루이 비통(Louis Vuitton)

루이 비통 ‘오브제 노마드ʼ 프로젝트

오늘날 디자인 환경은 ‘컴퓨터’ 덕에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해졌을지 모르지만, 스크린에 끌려다닌 나머지 외려 ‘메이킹’ 경험을 쌓고 제대로 미학을 터득한 신예를 찾기 힘들다는 비판이 있다. 최고의 기술, 장인 정신에 입각한 섬세함과 예술성을 갖추고 재료나 구상에 제약을 별로 받지 않는 플랫폼에 디자이너들은 환호할 수밖에 없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인 ‘여행 예술’이라는 맥락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자유로이, 하지만 수준 높은 창조적 협업을 펼쳐온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오브제 노마드(Objets Nomades)’ 프로젝트가 좋은 예다. 게다가 이 프로젝트가 빚어낸 아름다운 가구와 소품 컬렉션을 한국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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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라는 화두가 사회 전반에 떠오르고 있는 오늘날,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내는 로봇의 발달에도 미래에 살아남을 유망 직업군 목록을 보면 문화 예술 계통이 압도적으로 많다. 화가, 조각가, 포토그래퍼, 작가, 디자이너, 분장사, 영화감독, 뮤지션 등. 추상적인 개념을 정리하거나 창출하는 지식, 그리고 개인의 ‘감성’이라는 요소는 대체 불가능한 힘과 가치를 품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은 물건 특유의 감성을 지닌 ‘공예’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디자인 평론가 최범은 ‘오래되었지만 미래 문명의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공예를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스테디셀러명이기도 하다)’라고 칭하기도 했다. 인간의 삶과 자연, 사물의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주는 소중한 가치를 공예에서 발견하고 일상에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지구촌의 과제인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가성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에서 공예의 존재감은 점점 더 ‘틈새’ 영역에서만 빛을 발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조만간 가격대가 합리적인 가정용 3D 프린터로 누구나 원하는 디자인 제품을 뚝딱 찍어낼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오리라 예측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장인의 손맛과 기술이 세심히 깃들어 예술성과 완성도를 품은 현대적인 가구나 오브제는 더 높은 희소성을 띨 수밖에 없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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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상상력과 공예 노하우의 만남으로 빚어낸 노마드의 미학, 서울에서 만난다

이 같은 배경에서 볼 때, 글로벌 디자인계에서 내로라하는 다국적 크리에이터들의 창조력을 수준 높은 공예 노하우로 풀어낼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루이 비통이 지난 2012년 이래 꾸려온 ‘오브제 노마드(Objets Nomades)’ 프로젝트는 바로 그 즐거운 상상이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 플랫폼이다. 빼어난 창조성을 갖춘 디자이너들이 풍부한 경험과 기술을 거느린 브랜드의 장인들과 협업해 한정판 ‘오브제 노마드’ 가구 컬렉션과 정교한 공예 기술이 투영된 홈 데코 컬렉션인 ‘레 쁘띠 노마드(Les Petits Nomades)’를 빚어낸다. ‘노마드’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이동’과 ‘이주’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21세기의 유목 문화를 일관된 큰 주제로 삼는다. 독특한 예술 감성으로 유명한, 브라질이 낳은 거장 캄파냐 형제(Campana Brothers), 디자인계 여왕으로 불리는 스페인 출신의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Patricia Urquiola), 재치와 실험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스위스 3인조 그룹 아틀리에 오이(Atelier O), 섬세한 화려함이 매력적인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마르셀 반더르스(Marcel Wanders), 톡톡 튀는 재치가 사랑스러운 로 에지스(Raw Edges), 환상적인 색채 감각을 지닌 프랑스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인디아 마다비(India Mahdavi) 등 디자인 생태계에서는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크리에이터들이 일회성이 아닌 꾸준한 협업을 펼쳐왔다. 올해는 이탈리아의 ‘신성’ 듀오인 자넬라토/보르토토(Zanellato/Bortotto)가 처음으로 합류해 생기를 더하기도 했다.
오브제 노마드의 매혹적인 결실은 세계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문화 예술 행사에서 아름다운 전시를 통해 공개되곤 하는데, 올해는 홍콩 아트 바젤,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iSaloni)의 장외 전시 등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서울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오는 10월 말 그랜드 오픈을 앞둔 루이 비통 메종 서울(Louis Vuitton Maison Seoul)에서 오감을 채워줄 만한 다채로운 오브제 노마드 작품을 선보이면서 한국 소비자에게도 전격 판매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매력이 출중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올해 직접 만나본 디자이너들을 소개한다.

독보적인 예술성으로 사랑받는 캄파냐 형제

브라질 태생으로 ‘남미의 별’이라는 칭송을 듣는 캄파냐 형제는 남미를 여행한다면 꼭 상파울루에 있는 그들의 스튜디오에 찾아가고 싶은 ‘사랑스러운’ 듀오다. 캄파냐표 디자인에는 늘 자유롭고 강렬한 에너지가 흐르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의 영감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까, 여전히 기분 좋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지난해 털털하고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매력을 지닌 동생 페르난도(Fernando) 캄파냐와 대화할 기회를 가졌는데, 올해는 운 좋게 형인 움베르토(Umberto) 캄파냐를 밀라노에서 만났다. ‘사진상의 외모’로만 보면 동생과 달리 냉철하고 이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터라 살짝 긴장했는데 웬걸, 그 역시 따뜻하고 소탈한 면모의 소유자였다. 캄파냐 형제는 루이 비통의 오브제 노마드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함께했는데, 그네 의자 ‘코쿤(Cocoon)’을 비롯해 푹신한 탈착쿠션의 조합이 인상적인 모듈식 소파 ‘봄보카(Bomboca)’ 등 오브제 노마드를 대표하는 인기작을 내놓았다. 올해는 열대 꽃을 연상시키는 신작 ‘벌보(Bulbo)’ 라운지 체어를 선보였는데, 마치 다정한 포옹을 하듯 감싸 안기는 느낌을 준다. 방문한 지 벌써 10년 정도 됐지만 “서울이라는 도시를 좋아한다”면서 애정을 드러낸 움베르토는 “우리 스튜디오에는 한국 디자이너도 있는데, 이 작품 디자인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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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대한 융합적인 시각이 매력적인 로 에지스

런던에서 활약하는 로 에지스는 형제가 아니라 ‘커플’인 야엘 메르(Yael Mer), 샤이 알칼라이(Shay Alkalay)의 디자인 스튜디오 이름이다. 이스라엘 출신인 이들은 영국 왕립예술학교(RCA) 동창생으로 졸업 전시회에서 디자인 잡지 <월페이퍼*> 공동 창립자이자 영국 가구 브랜드 이스태블리시드 앤드 선스의 설립자 앨러스데어 윌리스에게 발탁되면서 재능을 인정받은 뒤 꾸준히 자신들의 존재감을 키워왔다. 필자도 당시 런던에서 그들의 데뷔를 지켜봤던 터라 밀라노에서 만난 인연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그들이 오브제 노마드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콘서티나 컬렉션(Concertina Collection)’은 꽃잎을 겹쳐 만든 듯한 디자인의 앉는 부분이 접히는 의자와 접이식 조명 등으로 이어져온 연작으로, 한눈에 봐도 세련된 단순미와 감각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같은 디자인을 처음 구현하는 데 무려 4년이나 걸렸단다. “(보기와는 달리) 복잡하기 그지없었다”는 게 그들의 설명. 로 에지스는 올해 홍콩 아트 바젤의 오브제 노마드 전시를 필두로 깜찍한 신작을 선보여 눈길을 사로잡았다. 가죽과 천, 다채로운 색상의 여러 조합이 저마다 다른 개성을 자아내는 귀여운 ‘돌스(Dolls)’ 체어 시리즈가 그 주인공. 아프리카, 북극 지방, 스코틀랜드 등 여러 곳에서 가족과 다른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끌렸다고. “가죽은 어디에서나 항상 사용됐더라고요. 돌, 나무 등도 마찬가지고요. 여러 재료를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어떻게 사용하고, 결합하는지 눈여겨봤죠.” 이 밖에 종이접기 새나 배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돌스(Dolls)’ 선반도 공간의 미학을 살려주는 소품이다.

디자인계의 여왕,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

스페인 태생이지만 학창 시절 이래 밀라노에서 줄곧 활동해온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는 인테리어와 디자인업계의 ‘여왕’으로 대접받고 있는 슈퍼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다. 호텔, 가구, 제품 디자인 등 다방면에서 놀라울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고, 2015년부터는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가구 브랜드 카시나(Cassina)의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기도 하다. “디자이너는 아이디어와 스케치를 현실로 이뤄주는 장인의 노하우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바쁜 행보 속에서도 오브제 노마드 프로젝트와 함께하면서 디테일의 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핸드백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금속 손잡이와 메시(mesh) 등의 요소가 현대적 감성과 유목적 감성의 조화를 이뤄내는 ‘스윙 체어(Swing Chair)’, 그리고 정교한 가죽의 짜임새가 은은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팔라버 체어(Palaver Chair)’, 그리고 가죽 시트 단 4장만을 조립해 만든 세 가지 크기의 바구니 시리즈인 ‘오버레이 볼(Overlay Bowl)’ 등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다운 폭넓은 스펙트럼과 완성도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가구와 소품이 그 소산이다. 오브제 노마드 프로젝트에 초기부터 참여해 “애정이 많다”고 강조한 그녀는 올해는 별도의 신제품을 선보이지 않았지만, 오는 10월 파리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설의 디자이너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회고전을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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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디자인 신성, 자넬라토/보르토토

올해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마주한 또 하나의 행운은 반짝이는 생기와 우아함을 겸비한 디자이너 듀오 자넬라토/보르토토. 이탈리아 출신으로 베니스 근교 트레비소를 근거지로 맹렬히 활약하고 있는 이들은 커플이 아니라 동창이자 친구 사이로, 남다른 시너지를 발휘하는 짝꿍이다. 올해 처음으로 오브제 노마드 진영에 합류했는데, 공간 활용도와 미적 감수성을 높이면서도 실용적인 파티션 기능을 하는 ‘만달라(Mandala)’ 스크린이 데뷔작이다. 지난봄 밀라노에서 오브제 노마드 전시장으로 쓰였던 팔라초 세르벨로니(Palazzo Serbelloni)의 멋진 공간에 첫선을 보인 이 스크린은 캄파냐 형제의 크림색 봄보카 소파와도 환상의 궁합을 자아냈다. “잘 어울려서 기뻤다”고 말하는 이들은 “루이 비통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제안받은 것 자체가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면서 ‘뉴키즈’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간씩 겹쳐지는 3개의 커다란 금속 원형 틀을 감싸는 가죽 스크랩으로 만든 ‘만달라’ 스크린은 이름 그대로 힌두와 불교에서 명상에 쓰이는 수행법이자 문양이기도 한 ‘만다라’를 모티브로 삼았다. 그리고 루이 비통 모노그램의 꽃 모양을 ‘폭발’하는 느낌으로 집어넣었다고. “이 스크린은 내부를 나누고 분위기를 바꾸는 ‘룸 디바이더’ 역할도 하지만 접을 수 있어 (다른 장소로) 옮기기도 쉬운데, 몽골의 유르트(Yurt)라는 텐트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답니다.” 오브제 노마드의 정체성과 잘 맞아떨어지는 자유롭고 유연한 감성을 지닌 이 듀오의 차후 행보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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