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lle epoque & inspi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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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4, 2020

글 심우찬(<프랑스 여자처럼> 저자) | Edited by 고성연 |일러스트 하선경

‘아름다운 시대’의 가치를 돌아보다_ 1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의 벨 에포크(Belle E´poque).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프랑스, 특히 파리가 전 세계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부각하던 시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당시 파리는 문학가, 화가, 음악가를 비롯한 모든 문화 예술인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아이디어와 영감을 나누는 살롱(salon) 문화를 유행시키며 명실상부한 문화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이 시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벨 에포크’로 불리며 꾸준한 사랑을 받아왔다. 1백 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그 인기는 ‘현재진행중’이다.
게다가 단순한 레트로가 아니라 ‘복고’를 전혀 접해보지 못한 10, 20대가 과거를 현재의 감성으로 즐기는 ‘뉴트로’ 열풍과 맞물려 벨 에포크 시대의 콘텐츠가 새롭게 주목받기도 했다. 최근 한국과 일본, 미국 등에서 벨 에포크를 주제로 한 전시가 잇따라 열리고 있는데, 패션 칼럼니스트 심우찬이 그 시절의 찬란한 배경과 더불어 작금의 흥미로운 풍경을 소개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보면 미국에서 온 작가 길(Gil)은 파리의 거리에서 길을 잃고 클래식 푸조 자동차를 얻어 탄다. 그리고 1920년대로 황홀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이후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든 흥미진진한 만남이 잇따라 펼쳐진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피츠제럴드 부부와 파리 밤거리를 탐닉하기도 하고, 술에 취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마주치기도 한다. 우연히 들른 거트루드 스타인의 집에서는 파블로 피카소와 그에게 영감을 주는 것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살바도르 달리의 열정적인 예술론을 듣기도 한다. 그리고 과거 속에서 마차를 타고 조금 더 앞선 시대로 간다. 풍요와 낙관이 지배하며 파리를 중심으로 문화 예술적으로 찬란한 꽃을 피웠던 벨 에포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것. 폴 고갱, 툴루즈 로트레크, 에드가 드가 등이 등장하는 1890년대의 매혹적인 파리.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오직 예술만이 인생의 목표처럼 보인다. 감미로운 음악과 샴페인이 끊이지 않고,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 도시의 배경이 바로 ‘아름다운 시대(Belle E´poque)’다.
르네상스 시대와 더불어 서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시대로 여겨진다는 벨 에포크. 물론 당대 사람들은 스스로 이 시기를 벨 에포크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훗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란 불행을 겪고서야 사람들이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대였는지 비로소 깨닫고 부르게 된 명칭이다. 현실이 힘들고 각박해질수록 이 ‘좋은 시절’, 벨 에포크는 사람들에게 널리 회자됐고, 당시의 풍요와 낭만을 동경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우리가 ‘개화기’라 부르는 근대 초기,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였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도 이 시대는 나름 특별했던 시기인 듯하다. 복고 감성을 새롭게 해석하는 뉴트로가 강력한 키워드로 각인되고, 각종 인재(人災)가 지구촌을 근심으로 물들이고 있는 요즘, 아름다움의 가치에 오롯이 몰입할 수 있었던 벨 에포크의 정수가 더 그리워지는지도 모르겠다. 마침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시기에 6개의 굵직한 벨 에포크 관련 전시가 열리고 있는 풍경은 그 증거처럼 보인다. 19세기 유럽과의 교류로 벨 에포크를 반영한 콘텐츠가 꾸준히 인기를 누려온 일본에서는 최근 이 시대의 뮤즈를 조명한 소토 미술관의 <사라 베르나르의 세계>전을 비롯해 여러 전시가 열렸고, 현재 서울에서는 대표적인 벨 에포크 작가를 다룬 <알폰스 무하展>과 <툴루즈 로트레크展>이 각각 마이아트뮤지엄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세계를 향한 쇼윈도, 만국박람회의 위용

프랑스는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긴 터널에서 벗어난 1871년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려 40여 년간 풍요가 넘치고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를 맞는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도시의 산업화를 가져왔고, 화려한 예술과 문화가 꽃피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지만 문화의 발전은 사상의 진보를 불러왔다. 이처럼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뤄지는 가운데, 새로운 욕망이 강하게 대두됐다. 바로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동시에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한 ‘물질’에 대한 인간의 강한 소유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 수차례 열린 만국박람회는 자본주의적 요소의 집약체라고 할 만했다. 물건을 만들어 제일 먼저 소개하는 기회이자, 홍보하는 행사이기 때문. 국가 입장에서 이 행사는 각 산업이 단기간에 세계의 주목을 끌어 엄청난 발전과 홍보 효과를 얻는 동시에, 국가라는 공동체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열정적으로 더 크고 화려한 만국박람회를 개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89년, 프랑스혁명 발발 1백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파리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거센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에펠탑이 들어섰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서는 지금도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다리로 불리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와 샤넬의 컬렉션 쇼가 열리는 그랑 팔레를 세웠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지하철이 다니게 됐다. 이미 파리는 나폴레옹 3세를 등에 업은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의 거대한 도시계획에 의해 시내의 모든 건물과 관공서, 하수구, 마차와 화물을 수송할 수 있는 도로 시스템으로 재정비된 상태였다. 파리지앵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모든 첨단 기술과 산업은 만국박람회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 생활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 전기, 전화, 자동차, 사진, 영화, 항공, 신문 등은 그렇게 만국박람회를 통해 대중에게 소개되거나 활성화되는 계기를 얻었다.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시대의 번영을 맞이한 파리로 몰려들었다. 당시 파리는 사람들이 열망하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을 듯한 매혹의 도시였다. 거리는 우아함과 활기로 넘쳐났다. 많은 문화 예술인과 지성인이 찾던 ‘빛의 도시’ 파리는 동시에 해가 지고 나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밤의 도시’이기도 했다. 밤 문화를 상징하는 대형 카바레 물랭 루주를 위시한 유흥가에는 불빛이 꺼질 날이 없었다. ‘물랭 루주의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는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수많은 포스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말이다.


세기말 감성과 아르누보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대인 만큼, 19세기 말에는 이 변화의 의미를 좀 더 ‘멜랑콜릭하게’ 받아들이는 움직임도 불거졌다. 단순한 세기말적 현상이라고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이를 기계화로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에 대한 탄식이라고 여겼다. 사회를 둘러싼 급격한 변화는 동시에 커다란 불안감을 몰고 왔다.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산업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의 가치는 등한시되기 마련이다. 모든 가치가 생산과 이익을 창출하는 상업적 행위에 쏠리는 시기였지만, 인간에 대한 숭고한 가치관이 무너져가는 것에 대해 도덕적인 상실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도 존재했다.
바로 이 시기에 문학, 철학, 종교 등 다방면에서 다양한 형태의 세기말적 흐름이 나타난다. 시각예술 역시 큰 혼돈과 변화를 겪은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 기저에는 기계 사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현실의 참혹함에 대한 회의가 깔려 있었다. 동시에 이 예술은 매우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절망, 불안, 허무 같은 감정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면서도 그런 삶을 감내할 수 있게 해주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했다. 그 퇴폐적인 아름다움은 세기말을 무엇보다 잘 표현해주는 단어, 바로 데카당스(de´cadence)로 불린다. 데카당스란 기존의 확립된 규범에서 보면 일탈일 수도 있고 단지 퇴폐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 약속되지 않은 부조화에서 튀어나오는 묘한 아름다움이다. 이런 퇴폐적인 느낌은 세기말과 섞이면서 일종의 종말 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더 절실하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파리, 비엔나, 런던 등 각국의 예술 중심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아르누보 역시 세기가 바뀌는 전환기의 분위기를 반영한 예술 운동이었다. 파리 벨 에포크의 상징과도 같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인 알폰스 무하는 이 시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빼어난 예술가였다. 체코 출신의 가난한 화가 무하는 유려하고 정교한 곡선으로 자연과 여인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낸 포스터로 파리에서 큰 유명세를 타게 됐는데, 특히 당대의 스타 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그녀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주기도 했다. 그리고 무하와 동시대에 태어났지만 30대에 요절한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는 보다 현실적이고 음지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벨 에포크 시대를 수놓은 전혀 다른 개성의 두 천재를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시대를 넘나드는 창의력을 발휘한 르네 랄리크(Rene′ Lalique)

아르누보에서 아르데코로 이행하는 역사적인 과정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천재적인 보석 디자이너로 지금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가 존재하는 르네 랄리크(Rene´ Lalique)다. 그는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서 완성하는 장식성을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는데, 이는 곧 아르누보의 정신이기도 했다. 소재라든가 영감, 형태에서 랄리크가 하이 주얼리업계에 가져온 변화는 지금까지 그 영향이 남아 있다. 그의 성공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대중의 취향은 그로부터 5년여 만에 과장된 볼륨이라든가 장식적인 요소에 치중한 아르누보 스타일을 한물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다 심플한 실루엣에 대량생산을 염두에 둔 아르데코의 시대가 찾아왔고, 랄리크와 럭셔리 주얼리업계는 대위기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게 ‘한물간’ 디자이너가 되는 줄 알았던 랄리크는 화려하게 부활한다. 1908년, 당시 최고의 향수 메이커였던 코티(Coty)가 그에게 향수병과 라벨 제작을 의뢰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코티는 보다 많은 여심을 사로잡을 고급스러움과 특별한 느낌을 주문했다. 랄리크는 보석 디자인에서 방향을 바꾸어 자신의 나머지 반생을 유리 제품과 다양한 상업 디자인에 헌신하면서 ‘랄리크’라는 브랜드를 남긴다. 대량생산이 일반화된 시대에 어떻게 럭셔리 브랜드 정신을 지켜야 하는지, 또 어떻게 브랜드 유산을 마케팅에 활용해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하는지를 랄리크는 한 세기 앞서 이미 경험한 것이다. 그가 추구했던 방향성은 오늘날 럭셔리 산업의 기본적인 마케팅 전략에 녹아 있다. 랄리크의 창의적인 행보가 현재의 디올, 샤넬, 에르메스 같은 브랜드들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벨 에포크의 영감이 여전히 우리 시대에 여러 형태로 자주 ‘소환’되는 배경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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