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 of Reson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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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 2018

글 고성연

많은 이들이 와인을 말할 때 과학을 언급하고, 예술을 논하고, 철학을 끄집어낸다. 물론 그런 지식은 도움이 된다. 즐거운 대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종종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온갖 지식을 섭렵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걸 놓치면 무슨 소용일까? 그럴듯한 포장의 가면이 점점 두꺼워지면 정작 그 속에 담긴 아름답고 풍부한 것들을 포착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 원래는 충분히 친근하고 다정다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도도한 ‘스펙’을 내세우기보다는 ‘다 내려놓고 마음 편히 음미하라’는 메시지를 유난히 강조하는, 그리고 창의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한 샴페인 브랜드가 눈에 더 들어오는지도 모르겠다. 애정의 밀도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열렬한 전 세계 팬들을 다수 거느리고 있는 샴페인 명가 크루그(Krug)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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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70년 넘는 역사를 꾸려온 유서 깊은 샴페인 브랜드 크루그(Krug)는 사실 ‘스펙’을 논하자면 도도하기 그지없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출발부터 남달랐다. 1843년 창립자 조셉 크루그(Joseph Krug)는 샴페인의 본질이 ‘즐거움’ 그 자체에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지리, 기후, 포도 재배법 등을 아우르는 최고의 환경에서 나오는 최상급 샴페인을 뜻하는 프레스티지 퀴베(Prestige Cuve′e)급만 내놓되, 작황이 좋은 연도만 아니라 해마다 만들 수는 없을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됐다. 흔히 프레스티지 퀴베라고 하면 특정 연도산 포도로만 빚어낸 ‘빈티지(vintage) 샴페인’을 떠올리는데, 빼어난 빈티지 샴페인은 매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공급이 제한되기 마련이다. 조셉 크루그는 그러한 제약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도전을 택했다. 날씨의 변화에 상관없이 한결같이 품질이 뛰어난 비범한 샴페인을 해마다 ‘창조’해내기로 한 것이다. 매년 최상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권위 있는 와인 전문지에서 최고점을 받아온 ‘크루그 그랑 퀴베(Krug Grande Cuve′e)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치밀하고 섬세한 테이스팅 과정을 통해 최종 선택된 10여 가지 빈티지에서 나온 1백20여 가지 베이스 와인을 블렌딩한 다음에 적어도 6년 이상 숙성시키는 샴페인(그래서 크루그 그랑 퀴베는 ‘빈티지’가 아니라 ‘에디션(edition)’이라는 표현을 쓴다). 조셉 크루그는 이를 ‘넘버 1(n°1)’이라고 불렀다(물론 크루그에도 한 해의 특징적인 캐릭터를 담아내는 빈티지 샴페인이 있는데, 이는 ‘넘버2(n°2)’라 명명됐다). 그는 이 같은 원칙과 비전을 검붉은 체리빛 일기장에 손수 적어놓았다.

음악, 미식, 그리고 크루그_삼위일체의 묘미
비범한 탄생 스토리만큼이나 남다른 품질을 자랑하는 크루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중에는 20세기 오페라계의 진정한 디바로 통하는 불세출의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도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오나시스와의 연애로도 세간에 화제를 뿌렸는데, 이 둘이 요트를 타고 여행할 때면 늘 크루그 그랑 퀴베가 함께했다고 전해진다. 연인인 마리아가 워낙 크루그를 좋아하니 오나시스가 대량으로 사들여 구비해놓았다는 것. ‘오페라의 성녀’라 불렸던 마리아 칼라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샴페인이어서일까? 지금도 크루그는 음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궁합을 보여준다. 많은 음악인들이 사랑하는 샴페인이기도 하고, 음악과 잘 어울리는 샴페인으로 통한다. 음악이야말로 ‘순수한 음용의 즐거움’에 집중하는 크루그의 DNA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을 꿰뚫어 본 크루그 경영진은 묘수를 생각해냈다. 바로 크루그와 뮤지션들의 협업을 바탕으로 하는 ‘뮤직 페어링(music pairing)’ 프로젝트다. 2012년부터 ‘소리’를 활용한 체험을 모색하다가 2013년 홍콩 행사에서 유명 음악인을 초청해 당시 서빙했던 샴페인과 ‘매칭’할 만한 음악을 추천하도록 한 것이 계기가 되어 2014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음악을 크루그 팬들과 소통하고 샴페인을 더 잘 즐길 수 있도록 도모하는 하나의 중요한 도구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청각이 미각에 미치는 영향’은 옥스퍼드대 연구진을 위시해 학계에서도 관심을 쏟고 있는 주제다.
좋은 샴페인과 좋은 음악. 여기에 좋은 음식까지 곁들이면 ‘몰입의 즐거움’에 있어 금상첨화임은 당연한 진리일 것이다. 더구나 크루그 가문은 1970년대 5대손인 앙리 크루그와 레미 크루그 시절에 ‘샴페인 디너’라는 장르를 나름 개척했다고 자부하는 이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삼위일체’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크루그의 푸드 페어링(food pairing) 프로젝트는 이렇듯 자연스러운 배경과 논리에서 선을 보였다. 특히 크루그의 푸드 페어링은 단순히 술과 음식을 조화시키는 샴페인 디너가 아니라 크루그 그랑 퀴베와 잘 어울리는 한 가지 식재료를 주제로 전 세계에서 크루그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유명 셰프들과 협업한다. 첫해인 2015년 재료는 감자, 2016년에는 달걀, 2017년에는 버섯, 그리고 올해는 생선이다.


삼중주의 미학이 펼쳐진 크루그와의 조우 행사
올해의 재료인 생선과 크루그, 그리고 이 둘의 조화를 북돋는 음악. 크루그에서는 이 셋의 절묘한 앙상블을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크루그와의 조우(Krug Encounters)’라는 행사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지난여름 어느 날 밤, 서울에서는 하이엔드 오디오의 미학을 접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 오드 포트, 프렌치 레스토랑 라미띠에, 레스쁘아 뒤 이부, 이렇게 세 곳에 걸쳐 아주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자리를 이동하면서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귀와 눈, 혀를 각각 만족시키는 삼중주의 미학이 펼쳐진 것이다. 서울의 크루그와의 조우를 맡은 뮤직 큐레이터는 한국계 독일인 배우 유태오(Teo Yoo). 20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한국계 록 가수 빅토르 최의 삶을 다룬 영화 <레토(Leto)>에 출연한 그는 음악과 미식에 대한 내공이 상당함을 자신만의 선곡 리스트로 보여줬다. 먼저 오드 포트에서 하이엔드 오디오 사운드를 바탕으로 흘러나온 음악 중에는 최백호의 ‘방랑자’가 있었다. 애잔하면서도 흥겨운 멜로디 속에 ‘페어링된’ 이날의 주인공은 ‘크루그 그랑 퀴베 166 에디션’. 브랜드 탄생 1백74주년을 맞아 선보인 이 에디션은 가장 최근 연도로는 2010년, 오래된 연도로는 1996년에 생산된 와인 등 10가지 다른 빈티지 와인 1백40종을 블렌딩한 샴페인으로 풍부하면서도 우아한 맛을 품고 있다. 라미띠에로 자리를 옮겨 장명식 셰프의 감각이 돋보이는 아뮤즈 부셰를 벗 삼아 ‘크루그 그랑 퀴베 160 에디션’을 들이켰다. 이때 퍼지는 음악은 국내 탱고 트리오인 이보스(y vos)의 감성적인 라이브 연주. 마지막 목적지인 레스쁘아 뒤 이부에서는 ‘크루그 그랑 퀴베 166 에디션’과 더불어 이 브랜드에서 19번째로 재창조된 로제 샴페인으로 매끄러운 텍스처와 강렬한 풍부함을 뽐내는 ‘크루그 로제 19 에디션’으로 이어지는 페어링 만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익힌 한치 요리, 금태 부야베스, 페이스트리에 채운 푸아그라 부당 블랑과 오리 요리 등과 이루는 흥미로운 미각의 조화를 ‘음미’하는 가운데 재즈, 팝, 러시아 음악, 가요 등 다채로운 장르와 국적의 곡들이 한여름밤의 분위기를 한층 더 낭만적으로 이끌었다. 그야말로 오감의 향연!
이렇듯 그저 순수하게 감각이 이끄는 대로 집중하면 되는 자유로운 즐거움이야말로 바로 크루그가 샴페인을 바라보고 소통시키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가끔씩은 삶을 대해야 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이 매력적인 샴페인 브랜드의 철학은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가 남긴 주옥같은 경구(警句)를 떠올리게 한다.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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