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라는 이름은 이미 미술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고백은 외려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다. 리히터에 대해 잘 모를 때도 (지금도 다 알지 못하지만), 그저 좋아서 그의 고향 드레스덴에 간 적이 있다. 마침 그의 여든다섯 살 생일을 기념하는, 심지어 노장의 신작을 선보인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었기에 내심 ‘오호 쾌재라~’를 외쳤다. ‘엘베강의 진주’로 불리는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던, 쓰라린 상처가 있는 독일의 유서 깊은 소도시. 전쟁의 주범이자 패전국인 독일에서 태어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이들의 자괴감과 트라우마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아린 상흔을 자신만의 예술로 승화시킨 거장이 한 인간으로 느껴진 여행이었다. 그 한 많고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리히터의 유소년 시절과 처절한 기억을 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의 예술적 근원과 추동을 가늠해볼 수 있는 영화 <작가 미상>(2018)이 지난해 봄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다. 통일 전 동독 사회를 소재로 삼곤 하는 감독으로 영화 <타인의 삶>으로 오스카상을 받기도 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작품이다. 스스로 작품에 대해 세세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리히터 본인은 나중에 언짢아했다는 얘기도 들리지만, 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에도 빨려 들어갈 듯 매혹적이다. 회화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화가 리히터. 부단히 경계를 허물면서 심연의 스펙트럼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가 현대음악의 신화로 여겨지는 전위예술인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들으면서 즉흥적으로 완성했다는 ‘케이지 페인팅’ 연작, 그리고 신작(8점의 드로잉 작품)까지 더한 전시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가고시안(Gagosian)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이 전시는 오는 2월 말 뉴욕으로 ‘여행’한다). “마침내 ‘케이지’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전시된다니 매우 기쁘다”고 밝힌 그만큼 지면으로나마 전시를 감상하는 이들도 행복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전시 일정 2020년 12월 3일~2021년 1월 30일 전시 장소 미국 가고시안 갤러리(비벌리 힐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