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SPECIAL] 일관성도 충성심도 없는, 위대한 그 이름 ‘리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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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6, 2021

글 심은록(미술 기획·비평가) | Edited by 고성연

미술 시장 통계업체 아트 프라이스의 ‘2019년 미술 시장 보고서’에 의하면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생존 작가 중 ‘몸값 1위’ 다. 일반적으로 ‘비싼 작가 톱 10’에 드나드는 경우, ‘키치의 제왕’ 제프 쿤스, ‘미술계의 악동’ 데이미언 허스트, ‘스캔들 제조자’ 마우리치오 카텔란 등과 같이 악명이나 스캔들을 동반하는 예가 많다. 리히터는 이러한 종류의 스캔들이 없는 작가다.
미디어나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는다. 그만큼 예술성과 독창성을 인정받고 있다. 사실 ‘비싼 작가’라는 자본주의적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다는 것이 송구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고, 현대미술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저 ‘리히터’라는 이름 하나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닌다.

“나는 어떤 목표도, 체계도, 경향도 추구하지 않으며, 어떤 강령도, 스타일도,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으며 수동적이다. 무규정적, 무제약적인 것을 그리고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_게르하르트 리히터의 ‘Notes, 196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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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기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그림 스타일이 바뀔 때마다 미술 관계자들은 흔히 신표현주의자, 후기 낭만주의자, 사진-회화 작가(photo-paintings artist) 등과 같은 수식어를 들이대면서 그의 작업을 특정 경향으로 규정하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을 특정 프레임에 가두지 말아달라고 단호히 당부한다. 실제로 다양하고 때로는 상반된 작업의 변화에 비하면 ‘일관성도 충성심도 없다’는 그의 주장은 꾸준히 일관성을 보여주면서 작품에 반영된다. 그 이유를 알면 어렵다는 그의 작품도 좀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32년 옛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때, 히틀러 군대가 폴란드를 침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곧이어 아버지 호르스트 리히터(Horst Richter)는 히틀러 군대에 징집되는데, 연합군에게 생포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로 잡혀 있게 된다. 이후 리히터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삼촌 루디(Oncle Rudi [CR: 85])와 숙모 마리안(Tante Marianne [CR: 87])도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다. 1942년에는 그 역시 ‘히틀러 청소년’ 단체에 소환된다. 어린 리히터는 전쟁이 무엇인지, 특히 전체주의가 어떤 것인지 머리로 인식하기도 전에 몸으로 체험하고 지울 수 없는 흉터와 트라우마를 안게 된다. 본능적인 치유 방안이었는지 리히터가 미술에 관심을 가진 시기가 이때였다. 소극적이지만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인지, 토마스 만과 같이 나치의 박해를 받는 작가나 저항 문학가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듯(얀 토른 프리커르(Jan Thorn-Prikker)와의 인터뷰에서, 2004) ‘사회적 리얼리즘이 교육 목적인’ 드레스덴 아트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고 졸업한다. 그리고 1961년, 그는 동독에서 탈영 행위에 견줄 만큼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으로 와 ‘피란민’이 된다.

동독보다는 많은 자유가 허용됐지만, 그는 또 다른 형태의 서구적 전체주의를 느꼈다. 바로 자본주의였다. 1963년, 그는 지그마어 폴케, 콘라트 뤽 등과 함께 사회적 리얼리즘과 비교해 ‘팝아트, 정크 컬처(Junk Culture)에 근거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운동을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리얼리즘 앞에 ‘사회주의적’, ‘자본주의적’ 등이 붙는 것은 이미 리얼리즘이 아니다. 이는 사실 그대로를 보는 리얼리즘에 ‘사회주의적’ 혹은 ‘자본주의적’이라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관점을 제외하고 다른 나머지 관점에 대해서는 배타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나 삼촌처럼 가해자의 옷을 입었지만 피해자일 수도,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해자일 수도 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리얼리즘’의 실재(혹은 ‘실재계’)를 찾는다는 것은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구조 안에 있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으로 일찍부터 깨닫는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관점과 스타일이 포함된 아카이브 작업인 ‘아틀라스’를 시작한다. 사진, 인쇄물, 스케치 등으로 구성된 거대한 이 작업은 꾸준히 추가·삭제·수정되면서 오늘날도 지속되고 있는 독립된 작업이자, 근작인 ‘케이지 페인팅(Cage Paintings)’을 포함한 모든 작업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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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는 도달할 수 없는 실재를 시각화하려는 듯, 자신의 작업에 ‘흐림 기법’을 사용한다. 그는 “흐린 이미지는 묘사가 만드는 정의에 반대”하며, “불확실성은 그 일부이자 작업의 전제”라고 언급하곤 한다. 사진과 인쇄물의 복제품 등 팝아트적 요소를 도입하나, 주제를 흐릿하게 하면서 객관적 사실의 불가능성을 암시한다(나치 제복을 입은 ‘루디 삼촌(Uncle Rudi)’(1965), ‘촛불’, ‘베티’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흐리고, 때로는 사진 위에 물감을 덧칠하거나 흩뿌려 복사본과 원본의 경계를 애매하게 하고, 사진의 구상적인 대상과 추상적인 물감을 대치시키면서, ‘조화’와 ‘익숙함’보다는 ‘이질감’과 ‘낯섦’을 선사한다. 리히터의 추상회화에서 이러한 ‘흐림 효과(blurring effect)’는 더욱더 적극적이 된다.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 효과처럼 유성물감이 마르기 전에 스퀴지(squeegee)를 사용해 이미지, 형태 혹은 색면의 경계를 고의적으로 흐리고 섞는다. 운동과 에너지를 재현하려는 게 아니라, 주제에 모호하고 애매하며 우유부단한 면을 추가하며 완성을 지연시킨다. 이 같이 그는 회화에 ‘우연성’을 개입시킨다.

이러한 그가 ‘우연성 음악의 개척자’ 존 케이지(John Cage)와 만난 건 필연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그의 이름을 딴 작업이 2006년부터 선보인 ‘케이지 페인팅’ 연작이다. 작품 선상에서뿐만 아니라, 리히터는 1960년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던 시절, 공연차 방문한 케이지를 실제로 만났다. 그리고 ‘케이지 페인팅’ 작업을 하면서도 그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존 케이지는 펜에 마이크를 부착해 글을 쓸 때 종이에 펜이 긁히는 소리를 연주했는데, 캔버스 위를 긁는 ‘스퀴지’가 연상된다. 리히터는 이러한 시각적 우연성에 청각적 우연성을 추가한다. 스퀴지 사용은 이전 작업을 해체하는 동시에 우연성에 의한 새로운 작업을 발생시킨다. 스퀴지는 상위에 있는 레이어를 제거하고 깊이 묻혀 있던 하위의 레이어를 드러내기도 하며, 혹은 이 모두를 섞어 질서정연했던 각 레이어의 시공간을 해체한다. 오늘날 수많은 미술 애호가가 리히터의 작업에 매료되는 이유는, 모든 가능한 잠재적 전체주의, 이데올로기 등을 경계하며, 우연성을 통한 바깥의 사유로 안내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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