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SPECIAL] 미래의 ‘드페오’가 될 법한 여성 작가들의 전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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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6, 2021

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 | Edited by 고성연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어도 산책은 영감을 준다. 때로는 타인은 잘 모르는 데서 숨겨진 진주라도 찾은 듯한 ‘발견’의 쾌감도 느껴진다.
요즘 서울을 산책하다 보면 젊은 여성 작가, 중견 여성 작가의 전시가 부쩍 눈에 띈다. 40대, 50대도 얼마든 ‘신진’에 속할 수 있는 미술계에서 ‘젊은’이라는 수식어는 꽤 다양한 연령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말이다. 도시 산책 속에서 우리 시대를 다채롭게 수놓고 있는 여성 작가들과의 ‘만남’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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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대단하고 오래가는 뭔가를 경험하기 위해 예술을 향유한다. 그런 맥락에서 실패의 위험을 무릅쓴 채 온몸을 던진 ‘작품’을 만나는 건 예술의 변치 않는 매력이다. 이런 예술가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창조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삶의 본보기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연한 걸작>이라는 책을 쓴 미술 평론가 마이클 키멜만은 놀랍도록 용기 있고 독립적이던 현대미술가의 한 예로 제이 드페오(Jay Defeo)라는 여성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 샌프란스시코에서 성장한 그녀는 1958년부터 대형 캔버스에 별로 닮은 점은 없지만 ‘장미’라 이름 붙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유기적인 형태를 실험하면서 여러 겹의 층을 쌓는 방식으로 무려 8년 동안이나 이 작업에 매달린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어느 회의실 벽에 갇혀버린 드페오의 ‘장미’를 꺼내기 위한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은 당시 25만 달러의 기금까지 조성했고, 결국 ‘장미’는 다시 살아났다. 인생을 건 드페오의 도전 정신이 담긴 이 무겁고 거대한 캔버스 작업은 무게만 1톤이 넘었고, 기술자 8명이 달라붙어 그림을 설치했다고.
요즘 서울을 산책하다 보면 곳곳에 ‘미래의 드페오’가 될 법한 여성 작가의 전시가 눈에 띈다. 양혜규, 구정아 등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소위 ‘스타 작가’의 전시뿐만 아니라 그 뒤를 잇는 ‘젊은’ 여성 작가들의 전시가 다양하게 펼쳐지는 모양새다.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듯하다. 미술계에서는 1980년대부터 작가 진출 양상이나 미술대학교 재학생 구성을 보더라도 여성 인재가 다수였던 데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그 비중이 더 커졌으니 말이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정희승 작가는 감수성이라는 측면에서 미술을 이야기할 때 또래 남자 작가들보다 ‘여성 작가들’이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환기미술관 학예연구원 출신으로 부산 복합 문화 공간 F1963의 기획자인 강재영 맹그로브아트웍스 대표는 최근 흐름에 대해 “올해 국내외에서 열린 다양한 여성 미술 기획전은 여성 문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크게 바뀐 세태를 반영한다”면서 “여성의 서사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강 대표는 이는 특정한 방향의 트렌드가 아니라 미술계의 시선이 그만큼 확장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비단 미술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친 현상이다. 여성 영화인들이 직접 제작하고 감독과 각본을 담당하는 사례나 그들의 역할이 두드러진 작품이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인종차별 반대와 성폭력 고발 운동의 영향으로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최근 <원더우먼>이나 <뮬란> 등 대작에서 볼 수 있듯 백인 남성 위주의 캐스팅에서 벗어나 여성 주연을 늘리는 흐름이 두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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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작가상 후보를 수놓은 여성 아티스트
국립현대미술관은 2020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김민애, 이슬기, 정희승 등 3명의 여성을 선정했다(후보군은 4명). 이슬기는 1990년대 초부터 프랑스에 거주하며 일상용품의 조형성에 주목해온 작가다. 전통 공예와 민속품 등을 동시대 맥락과 연결한 작품을 선보여왔는데, 언뜻 글로벌 무대에서 ‘보따리 작가’로 통하는 김수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역시 지난해 작가상 후보에 오른 설치 작가 김민애의 작업은 조각물과 주변 맥락의 신비로운 관계를 말해주는 듯하다. 국립현대미술관 2전시실의 독특한 건축 구조를 이용한 설치 작품은 공간 속에서 연쇄반응처럼 전개되는 조각과 구조물로 이뤄진다. 공간과 구조물, 작품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은 조각이 주어진 환경이나 맥락과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작가의 오랜 질문에서 시작한다. 김민애 작가는 전화 인터뷰로 소감을 전해왔다. “여성 작가들이 주목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일부러 여성 작가로 나눌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성을 드러내지 않는 작품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돌아보니 조각이 가지는 수직성에 반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이 지닌 성질과 그에 반하는 것, 주변 맥락을 드러내는 조각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작품도 거창한 질문을 하려는 게 아니라 수직적이고 기념비적으로 보이는데 사실 내용은 다 텅 비어 있는 형태다.”
신진 작가에게 주목하는 갤러리2의 전수연 기획자는 페미니즘 담론에서 벗어난 작가를 포함해 보다 종합적으로 미술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2020 올해의 작가상(전시는 2021년 4월 4일까지) 후보에 오른 정희승 작가의 작품은 그런 고민에 대한 답을 들려주는 것 같다. 예술과 삶의 연결 지점을 골똘히 고민하는 그녀는 예술가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고민을 놓고 동료들과 소통하는 과정 자체를 전시장에 펼쳐놓는다. ‘침몰하는 배에서 함께 추는 춤’과 ‘알코올 중독자와 천사들을 위한 시’는 2개의 파트이면서도 서로 연결되는 설치 작업인데, 예술가의 삶을 선택한 이들의 헌신과 두려움, 삶만큼이나 부조리하고 무상한 예술이라는 세계를 향한 위트 있는 그녀의 표현이다. “그동안은 틀어박혀 혼자 작업하는 성향이었다. 2017년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아트 신에서 활동하며 예술계 안팎으로 여러 사건을 겪었는데, 근본적으로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이 생겼다. 미술계가 삶과 멀리 떨어진 느낌을 받으며 예술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고민하던 때였다. 그러면서 다른 작가들과 그 고민을 함께 나눠보고 싶었다. 사실은 그런 추상적인 질문에 정답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작가들과 실제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대화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파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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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찾아온 ‘그녀들’
지난해 미술계만이 아니라 SNS상에서도 많이 회자됐던 여성 작가로는 가나아트, 파라다이스 아트스페이스 등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지하루 시오타를 꼽을 수 있다. 혈관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섬세한 실 작업은, 여성 작가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세밀하고도 큰 주제가 아니었을까. 한국인 남편을 두고 베를린에 주로 거주하는 지하루 시오타는 드로잉부터 조각, 설치와 퍼포먼스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데, 주제가 내면 일기 같아서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무덤에서 느낀 공포, 이웃집에서 일어난 화재의 기억, 두 번의 암 투병으로 겪은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트라우마는 한 편의 자서전 같기도 하고 긴 인생 이야기 같기도 하다. “작품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그 마음을 다루는 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와 같다고 생각한다. 실이 얽히고 휘감기고 끊기고 묶이고 꼬이는 다양한 관계를 말해준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장엄한 서사시를 읊는 듯한 지하루 시오타의 전시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페미니스트 아트에 대한 고정적인 시각을 흔드는 작가로 꼽히는 샹탈 조페의 첫 서울 나들이도 주목할 만하다(오는 1월 29일까지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진행된다). 미국에서 태어나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상탈 조페는 어머니나 친구 같은 여성의 일상을 주요 소재로 활용한 이전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한 작가다. 인물의 크기를 실제보다 더 키우는 방식을 즐겨 쓰는데, 그 결과 관계의 친밀함이 강조되고 솔직함이 부각된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10대들’. 캣워크 모델부터 포르노 여배우, 어머니와 아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문학 작품 속 주인공을 화폭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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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을 거느린 젊은 작가층
마치 아이돌 스타처럼 팬덤을 생성한 여성 작가도 있다. 컬렉터들의 지지뿐 아니라 동일한 세대의 젊은 층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SNS상에서 활발하게 공유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1987년생인 이은새 작가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나 가족의 의미 등을 회화를 통해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데, 꽤 열성적인 팬덤을 지니고 있다. 지난해 갤러리2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던 기존 작업에서 벗어나 회화라는 매체, 그리기 방식에 초점을 맞춘 전시 <As usual: 늘 마시던 걸로>를 열었고, 최근 수원시립미술관 5주년 개관전으로 개최하고 있는 <내 나니 여자라>에도 참여했다. 이 전시에 참여한 또 다른 여성 작가 이미래도 팬덤이 남다른 작가다. 이미래 작가는 양혜규 작가의 ‘관심 작가’에 들기도 한다. 자신을 ‘누구의 선배로도, 후배로도 생각하는 대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양혜규가 그저 작가로서 관심을 보내는 이미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원초적인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설치 작품 ‘히스테리, 엘레강스, 카타르시스: 섬들’을 선보였다. 이 전시를 두고 인스타그램에서는 ‘강렬했다. 세상에, 머리채 잡히는 전시회라니’라는 후기가 올라오는 등 피드백도 흥미로웠다고. 비슷한 나이대의 전현선도 꾸준한 팬층을 확보한 젊은 작가다. 지난해 열린 개인전 ‘열매와 모서리’에서 수채화 기법을 고수하되 추상과 구상이 조화를 이루는 색다른 작품을 선보였는데, ‘회화 작가’로서 다소 드물게 제20회 송은미술대상 후보에 선정됐다(아무래도 설치와 미디어가 더 대접받는 편인 요즘 ‘미술상’의 기류를 감안하면 그렇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동시대 미술을 둘러싼 생태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여성 작가들이 봇물처럼 등장하는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사실 인류의 반은 여성이므로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마냥 들떠 소신 없이 흐름에 편승하는 모양새는 달갑지 않기도 하다. 수원시립미술관 신은영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여성 작가라는 프레임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때인 것 같습니다 여성 작가라는 프레임 그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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