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진실을 모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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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밧줄, 양동이, 종이 상자, 나뭇가지…. 일상의 사물이나 풍경을 특유의 담백한 화법으로 ‘읊조리는’ 서정 시인. 이번 가을 상하이 아트 위크 시즌에 샹 아트 갤러리에서, 타이베이 아트 페어 시즌에는 타이베이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지금 중국에서 가장 뜨거운 차세대 선두 주자로 손꼽히는 장언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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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나뭇가지가 앙상하지만 초라하지만은 않다. 나무 기둥의 다양한 색, 그리는 순간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까슬까슬 도드라진 표면, 투명하게 비쳐 보이는 맑은 담채와 두껍고 건조하게 갈라지는 붓질이 조화를 이루는 구성, 화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풍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가을에 딱 맞는 나무 그림. 마치 첼로 소리가 나는 듯하다.
담담하되 따뜻함이 묻어나는 붓질, 세계를 사로잡다

상하이를 무대로 활동하는 1965년생 중국 작가 장언리(Zhang Enli, 張恩利)는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2006년 아트 바젤의 대스타로 부상하며 세계를 누비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오고 있으며, 2010년 광주 비엔날레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는 화가다. 2014년 홍콩 K11 파운데이션에서의 전시는 재단 이사 에이드리언 청이 직접 큐레이터로 나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이기 때문임을 공공연하게 피력한 바 있고, 2015년에는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계적인 갤러리 브랜드 하우저 & 워스(Hauser & Wirth)의 신관 서머셋 지점에서 미술관급 규모로 손꼽히는 공간을 ‘사계(Four Seasons)’ 시리즈로 채우는 전시를 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캐릭터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중국 현대미술의 스타일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차별된 매력이 있다. 전혀 ‘중국스럽지’ 않으면서도, 붓질이나 여백 등 동양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예술 세계에 ‘유니버설’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단지 다르기 때문에 끌린다고 할 수는 없다. 이성적이며 냉소적인 듯하면서도 살짝 온기를 품은 손길이 남아 있는 듯한 그의 그림들은 왠지 함축된 언어로 담담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시 같다.
정감이 어려 있으면서도 왠지 추운 계절의 온도가 이따금 느껴지는 점도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흥미로운 면모다. 알고 보니, 역시나 그의 고향은 추운 지린 성 지역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모든 미술 대학에 떨어졌고, 간신히 우시(Wuxi, 상하이 근처) 디자인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는데, 순수 회화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은 것이 오히려 제게는 더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자신의 작품처럼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를 지닌 그의 설명이다.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뽑는 이도 기교를 버리고 자유분방한 화풍을 펼친 청대(17~18C)의 진농(金農)이다. 현재의 스타일을 찾아내기까지 그에게도 많은 시행착오의 시간이 있었다. 1990년대의 강렬한 색채와 거친 필체로 구체적인 인물들 묘사하던 표현주의 스타일이 세계에 대한 그의 감정을 펼쳐내는 웅변 이었다면, 지금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사람들의 고개를 지긋이 돌려줄 뿐이다. 눈을 지긋이 감은 고수가 땀을 뻘뻘 흘리는 젊은이를 한 손가락으로 제압하듯, 힘을 빼고 쉽게 그린 듯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한 차원 높은 에너지와 지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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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감성을 포착하려는 갈구에서 시작된 작품 세계
그가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작품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관찰자 역할을 자처하는 그의 바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 물잔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을 치우면 자국이 남겠지요.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물 자국입니다.”  작가의 말처럼 그가 관찰하고 표현하는 것들은 평소 우리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사물이다. 사람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유용하지만, 그만큼 흔하고 값싸기 때문에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되는 밧줄, 양동이, 종이 상자. 그들은 모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우리네 일상 그 자체를 돌아보게 만든다. 마치 나무들이 화려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풍부할 수 있음을 보여주듯이, 묶이고, 풀리고, 구부러지고, 늘어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다양한 상태의 사물들 역시 저마다 제 개성을 드러내는 작은 보석과도 같은 존재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그는 소외된 이들의 감성을 포착하는 것으로 유명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장언리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감성이 묻어난다. 숨겨진 세계의 진실에 다가가는 것, 그 비밀의 문을 살짝 밀어 열어놓는 것. 우리는 그가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그의 세계를 다시 관찰하는 이중의 관찰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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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감정과 이미지를 벽화에 투사하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공간이 새롭게 변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설레는 일이다. 2010년 광주 비엔날레에 참여한 이후 시작된 그의 벽화 방식은 이탈리아의 크로체 빌라, 런던의 ICA 전시장으로 이어져 공간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물리적, 구조적 변화가 없이도 작가 내면의 감정과 이미지가 투사된 벽화 덕분에 완전히 다른 감성의 공간이 된다. “물건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요. 그것을 바라보면서 생겨나는 감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의 말처럼, 작가는 있는 그대로 사물을 제시하는 듯하면서, 그것을 통해 우러나는 감정을 자극하고, 그로써 사물이 제 스스로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 그것이 삶과 우주의 신비에까지 닿기를 바라는 건, 작가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물 자국처럼 순간적으로만 일어나는 신비다. 그래서 다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연장하기 위해 작품에 몰두하게 된다. 별로 그린 것도 없는 듯, 여백 가득한 장언리의 작품 앞에 오래도록 눈길이 가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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