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들어온 고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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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 2023

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디블렌트 CD)

‘유물’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한국의 오래된 보물이나 고미술품에 어떻게 현대성을 부여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오랜 시간 한국의 디자이너나 기획자에게 큰 숙제였다. 유홍준 교수는 최근 강의에서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우리의 옛것을 설명했는데, <삼국사기>에 나온 이 문장만으로도 알 수 있듯 사실 우리의 고미술품 중에는 미와 쓰임새를 두루 갖춘, 현대성이 깃든 것이 많다. 누추하지 않고 검소한, 사치스럽지 않지만 디테일이 유려한 우리의 앤티크와 고미술품은 다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하던 차에 우리 고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2023 라라페어(2023 LaLa Fair : Living Antique & Living Art)’가 열렸다. 라라페어에 이어 ‘2023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한국 장인이 손잡고 만들어낸 작품들을 선보이는 전시도 막을 올렸다. 우리네 미의 정수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타임리스 럭셔리’의 잠재력을 찬찬히 들여다볼 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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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단순과 위대한 고요.’ 독일의 미학자이자 미술사가 요한 요아힘 빈켈만이 고대 그리스 예술품의 정수를 표현한 구절이다. 우리의 앤티크와 고미술품의 아름다움을 논할 때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가 빈켈만의 표현과 함께 빈번히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백제의 미학을 담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다. 얼마 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라라페어가 열린 기간(2023. 4.7~16)에 ‘백제문화의 꽃,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유홍준 교수는 ‘검이블루, 화이불치’로 요약될 수 있는 우리 미(美)의 가치와 고미술품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치면서 “무엇이든 세련된 문화는 현재성을 갖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명작 이야기’는 백제시대의 것에서 자연스레 현재의 일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일상에는 세련된 옛 문화가 현재성을 갖기는커녕 거의 사라진 것만 같다. 최근 한국의 미술 시장은 양적으로 큰 성장을 했지만, 대부분의 미술 애호가들은 현대미술에 열광하고 외국의 특정 사조에 속한 디자이너 가구를 주로 수집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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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앤티크와 고미술품은 다 어디에 있었나
각 분야 중요무형문화재 장인들의 후계자가 없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 공예품의 상황도 안타깝고, 전통과 현대의 협업을 제대로 이뤄내지 못하는 시스템과 젊은 창작자들의 열정도 아쉬운 지금, 이름부터 즐거운 ‘라라페어’가 열렸다. 2019년 ‘리빙앤틱페어’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미술 페어로 올봄 ‘2023 LaLa Fair : Living Antique & Living Art’로 돌아왔다. 고미술 갤러리 20여 개와 특별 주제관 여섯 곳으로 구성된 라라페어는 고미술품이 지금의 우리와 함께 호흡할 방법에 관련해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며, 고미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기획을 시도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진귀한 우리나라의 작품들이 현대미술 작품이나 디자인 가구와 어우러지며 ‘고미술이 어떻게 생활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특별한 아이디어를 전한 기회였다. 전시장 풍경을 보면 우리의 전통적인 오브제나 미술품을 일상에 흥미롭게 믹스 매치하는 다양한 아이디어로 영감을 줬는데, 예를 들어 제주의 절구를 바탕으로 화병을 넣은 테이블을 만들어 모던한 베르너 팬톤의 클래식 팬톤 의자와 매치한다든지,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 수를 놓은 돗자리를 거대한 회화처럼 전시장 한가운데 걸기도 했다. 라라페어를 개최한 두손갤러리 김양수 대표는 고미술과 현대미술, 디자인과 공간 구성을 아우르며 매일 밤 한국 현대 작가들과 머리를 맞댔다. 또 젊은 디자이너들의 재치 넘치는 응용과 실험을 인큐베이팅하고 있는데, 양태오 디자이너가 이번 전시 섹션 중 ‘수집가의 역할과 시도’라는 코너로 그의 고민에 재빨리 화답했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직접 컬렉팅한 토기 잔들을 3D로 재현해 미래적인 형태를 지닌 작품으로 재탄생시켰는데, 토기 잔의 디테일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척 모던하게 느껴져 과거의 아름다움을 현재의 시간으로 끌어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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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에서는 어떤 향기가 피어올랐을까?
도예가 이인진 작가의 달항아리에 플라워 스타일링을 덧댄 김형학 플로리스트의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이인진 작가의 작품은 전통적 제작 방식과 현대적 조형미가 돋보여 라라페어의 의미가 잘 담겨 있었고, 한국 고미술품에 꽃꽂이를 선보인 김형학 플로리스트의 작품도 한국 전통의 미감을 현재의 시선에 와닿게 했다. 현대미술 작가 김종원과 신연숙이 되살린 디지털 부적 NFT도 흥미로웠는데, 다양한 부적을 현대미술과 연결해 앞으로 해외 NFT 오픈 마켓에 적극 소개할 계획이라고. 우리 고미술의 정수를 품은 ‘백제금동대향로’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아이콘으로 정해 ‘백제의 향’을 구현하기도 했는데, “1천5백 년 전 우주를 품은 채 만들어진 백제금동대향로에서는 어떤 향기가 피어올랐을까?”라는 질문에서 탄생한 향합 같은 굿즈는 Z세대의 마음에도 고미술품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을 것 같다(라라페어 첫날에는 진지한 아트 컬렉터로 알려진 BTS 멤버 RM이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라페어를 개최한 두손갤러리는 ‘2023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세계적인 디자인 거장들과 통영의 자개 장인들이 협업해 완성한 ‘자개 테이블’ 전시를 열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고인이 된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구현한 작품을 포함해 마르셀 반더르스와 엘레나 살미스트라로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디자이너의 디자인이 통영의 자개 장인과 만나 동시대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재탄생한다는 맥락에서, 한국의 전통을 어떻게 명품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해답의 실마리가 엿보인다.‘한국의 럭셔리’를 세계적인 럭셔리로 성장시키려면, 우리부터 진정한 럭셔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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