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후원의 진정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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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단색화 열기로 한국의 미술 시장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여전히 그늘 속에 가리워진 작가들이 많다. 언론이나 대중은 주로 거장이나 스타 작가, 떠오르는 블루칩에 열광하기에 중진 작가들은 좀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꾸준히 여물어가는, 때로는 의미 있는 변혁을 이뤄내기도 하는 ‘그네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박수를 쳐주고 있는 새로운 패트런 문화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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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가락동 주택가의 빌딩 지하실. 내로라하는 미술계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다. 작가 리경이 새로 작업실을 옮기며 간단한 파티를 연 자리였다. 작업실 이사와 집들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날이 특별한 건 오랜 시간 작가의 작품을 후원해온 독지가의 공간이라는 점에서다. 리경의 팬임을 자처하는 이윤정 씨는 미술 전공자인데, 주부로 지내면서도 항상 미술계의 소식을 가까이하며 전시를 즐기고, 작품도 종종 구매하는 컬렉터로 활동해왔다. 우연히 접한 전시에서 리경의 작품에 푹 빠졌고, 그 이후 물심양면으로 후원에 나섰다. 코리아나미술관 개인전, 일본 에르메스 메종 개인전, 국립현대미술관 특별 기획전 등 전시마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다가 이번에는 건물 빈 공간을 작가 레지던시로 제공하게 된 것이다.

마음을 담은 공간을 선사하는 예술 애호가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서로 알고 지내면 좋겠다고 여기는 지인들을 저마다 초대했고, 흔치 않은 네트워킹 파티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전시가 끝나고 나면 모두 해체해 사라지고 마는 설치 작품, 그래서 그림처럼 손쉽게 판매하기도 힘든 작업을 계속하는 중견 작가를 향한 독지가의 후원. 마음껏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선사하는 것만큼 더 값진 선물이 있을까. 레지던시는 후원자들의 자원과 예술가들의 필요성이 만날 수 있는 적합한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2010년 서울 종로구에 개관한 OCI미술관은 인천 남구의 유휴 공간을 활용해 2011년부터 작가들을 위한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후원 제도가 만 35세 미만이라는 조건을 통해 신진 작가들에게 기회가 몰리는 데 반해, 이곳은 나이 제한을 철폐했을 뿐 아니라 매년 중견 작가 1명을 선정해 개인전을 연다. 2012년 공성훈, 2014년 유근택, 곽남신 등 중견 작가의 전시는 그들이 재조명받기 직전에 이뤄진 전시로, ‘미술판을 읽는 눈이 빨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지현 부관장은 커리어의 정체기를 맞았다가 레지던시에 들어오면서 돌파구를 찾은 작가들이 생겨나고, 작가들과 교류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면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민한 작가들을 여럿 ‘모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들 사이에서 기 싸움이 벌어질 때도 있고, 때로는 별것 아닌 일로 갈등이 생겨난다. 운영 주체가 정말 작가들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후원하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예술가와 함께하는 삶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또 금세 잊히기도 하지만 그것에 연연하지 않은 채 묵묵히 작업을 해온 작가들. 레지던시 운영의 진정한 원동력은 다름 아닌 이런 작가들에 대한 응원과 지지다. 경기도 남양주에 자리 잡은 (주)벤타코리아의 레지던시가 그 좋은 예다. 김대현 대표이사와 이경임 갤러리 퍼플 관장은 기업가가 아니라 마치 레지던시 매니저와 큐레이터처럼 허물없는 모습으로 작가들과 어울리며 작가들을 지원하고 있다. 2013년부터 9명의 작가가 입주해 작업 중으로, 거주 기간이 2년 반에 이를 정도로 길다 보니 서로 간의 교류도 깊어지고, 그 속에서 나온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아트 상품 컬래버레이션으로, 문화 예술에 소외된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아예 공장 설립 시 작가들의 작업실을 함께 짓는 기업도 생겨났다. 바로 경기도 화성시에 2015년 10월 개관한 로얄화성센터다.
약 99,100m2(3만 평) 정도의 부지에 전시장, 갤러리, 실내 체육관, 야외 음악당까지 갖춘 이 공장은 기무사 건물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개조한 민현식 교수의 지휘로 4년여에 걸쳐 완성됐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상하이의 파워 스테이션 오브 아트(PSA) 등 남겨진 옛 공장을 현대미술관으로 활용한 사례가 점차 늘고 있는데, 아예 공장인 동시에 예술 활동이 가능한 복합 문화 센터를 만들었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곳의 모체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자리한 갤러리 로얄. 지난 8년 동안 갤러리를 운영해온 김세영 갤러리 로얄 관장은 “겉으로는 기업이 작가를 후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업도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갤러리 운영에 좀처럼 관여하지 않는 (주)로얄 & 컴퍼니 박종욱 대표도 사업가는 일관된 철학을 지녀야 하는데, 예술가들과 함께할 수 있는 점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면서 레지던시형 공장을 만드는 결단을 내렸다고.

단순한 컬렉터에서 진정성 있는 패트런으로

1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이성자 화백의 전시 리뷰를 위해 전시장을 찾은 적이 있다. 보도 자료를 챙겨주며 “우리 작가 좀 잘 소개해달라”라고 부탁하는 노신사가 있길래 갤러리 홍보 담당자인지 묻자, 자신은 ‘이성자의 친구들’ 모임의 대표라며 작가의 팬클럽을 자처해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 전시장 뒤풀이에서, 또 다른 여러 행사에서 만난 이들 중에서 미술 관계자인 줄 알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본래 직업은 따로 있는데, 그저 작가의 후원자라서 그 자리에 참석했다는 경우를 꽤 자주 접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기에 그들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아트 컬렉션 문화가 ‘예술 애호가’의 차원보다는 미술 시장의 팽창과 함께 나타난 ‘컬렉터 문화’로 형성됐기 때문이었을 터다. 사실 한국에서는 컬렉터들이 미술 작품을 싸게 구입해 되팔아 시세 차익을 노리는 단기 투자자와 혼동되기도 하지 않았는가.
한동안 기업의 예술 후원도 검은 돈과 연결된 부정으로 보일 만한 사건이 줄을 이은 때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미술 시장의 세일즈 포인트는 ‘사두면 오른다’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미술 경매가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도 미술 시장 호황기에 작품을 구매했다가 그림을 되팔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가격이 공개된 투명한 시장에서 좀 더 싸게 작품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맞물리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작품을 사고파는 데 치중한 ‘컬렉터’가 아닌 진정성 있는 ‘후원자(patron)’, ‘독지가(philanthropist)’의 등장은 미술계의 자양분을 제공하는 산소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저 멀리 뉴욕, 파리, LA의 백만장자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자신이 지닌 소중한 자원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예술 후원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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