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언무언(至言無言), 말이 다다를 수 없는 이강소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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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2, 2025

글 천수림(미술 저널리스트)

Artist in Focus

지각의 철학과 빛, 시공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고 있는 제임스 터렐(페이스갤러리 서울)과 이강소(타데우스로팍 서울)의 전시가 서울에서 동시에 개최 중이다. 터렐과 이강소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태어났지만 각각 MoMA PS1의 전시(터렐 <Meeting>(1980~86/2016), 이강소 국제 그룹전 <Across the Pacific(1993)>)과 레지던시 활동으로 간접적 인연이 닿았고, 작품에서 ‘지각의 전환’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두 작가는 작품을 통해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서울 한남동)에서 진행 중인 이강소(b.1943)의 개인전 <煙霞(연하)로 집을 삼고, 風月(풍월)로 벗을 사마>는 그의 삶의 철학과 예술 사이의 진동을 드러낸다. 지난해 타데우스 로팍과 이강소 작가가 소속 계약을 맺은 뒤 처음으로 연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회화, 드로잉, 설치, 조각, 퍼포먼스는 일관된 형식으로 수렴되기보다 순간적인 감각과 비결정적인 흐름을 통해 ‘되어가는(becoming)’ 과정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림에서든, 조각에서든, 어떤 작업에서도 나의 어떤 맑은 기운과 관조자의 맑은 기운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길 소망한다.” _이강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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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해체하고, 분별을 유보하는 사유

이강소의 이런 예술적 태도는 중국의 고대 철학자인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 현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되기(becoming)’의 철학과 깊이 맞닿아 있다. 장자는 <장자> ‘소요유’에서 ‘진정한 자유는 분별과 목적, 인간의 의지조차 벗어난 곳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이강소는 회화의 과정에서 우연성과 비의도성을 중시하며, 자신이 제어하지 않는 흐름을 받아들인다. ‘무제-(N)91142’(1991)에 등장하는 사슴 무리는 조선의 동양화 ‘백록도’를 연상시키지만, 애초 ‘백록도’에 담겨 있는 이상향의 의미와 고유한 서사를 담지는 않는다. 청회색조의 색감 위에 그려진 형상은 멀리서는 어슴프레해 보이고 가까이 가면 형상은 사라진다. 작가의 통제를 벗어난 간극은 오롯이 관람객의 몫으로 남는다. 그의 작품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슴, 오리, 배 등의 도상은 어떤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고 어벙하게 그렸다고 표현한다. ‘미완’의 상태로 남은 듯 슬렁슬렁해 보이는 이미지는 장자의 무위, 들뢰즈의 생성이 말하듯 ‘되게 함’에 닿아 있다. 이강소는 철학적 개념과 예술의 감각의 경계를 넘나드는 불확정성을 무기로 내면 깊숙한 곳과 무한한 감각의 세계로 이끈다. 일본의 미술평론가 미네무라 도시아키는 “이강소 회화의 희귀한 매력은 이미지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와 그것을 위협하고 무효화하려는 여러 요소와의 끝없는 갈등과 대화에서 배어나는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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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들어가는 조각, ‘되기’의 시각화
1990년대 초부터 이강소는 점토 덩어리를 던지고 낙하시키는 방식으로 조형 실험을 했는데, 이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조각’이라 칭했다. “서양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남한테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던진다’는 것은 나와 세계가 유기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그는 1980년대 초기부터 직접적인 신체적,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점토, 세라믹, 청동, 알루미늄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해 실험을 시작했다. 그냥 얹히고 던지고 쌓아가는 과정, 그 순간이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형식은 ‘되기’의 사유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던지기’의 조형 개념은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한다’고 말한 들뢰즈의 개념인 ‘되기’와도 결을 같이한다.
전시장 1층에 설치된 작품 ‘팔진도’(1981/2017)는 제갈공명의 ‘팔진도’를 모티브로 삼았다. 다양한 소재와 물성의 중첩은 완결을 지양하며 시작점과 끝점을 알 수 없도록 어디로든 연결되게 만든다. “광풍이 불고 초토화되었다는 제갈공명의 ‘팔진도’ 설치는 실재(實在)입니까? 여기 놓인 돌은 실재인가요? 현실에 있는 이 사람들이 실재입니까? 사실 (우리는) 추상적으로 보고 있어요. 저마다 온갖 다른 생각을 하느라 세세히 보지도 않고 돌이라고 하죠. 그렇게 주입된 우리의 현실 세계라는 것이 환상의 세계이자 환영이며 헛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실재라 여기는 이 현실 세계는 환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강소는 “마음과 우주가 하나가 되면, 이때 나도 남도 탈각한다”라며 이런 개념은 이미 현대 과학 이전에 성리학에서 얘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10여 년 넘게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고 있다는 그는 이번 전시명 <煙霞(연하)로 집을 삼고, 風月(풍월) 로 벗을 사마>를 통해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는 철학적 장치로 ‘성리학’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안개와 노을을 집으로 삼고, 바람과 달빛을 친구로 삼는다’는 의미의 전시 제목은 16세기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이 안동 도산서원에 머무르며 자연 속 성찰과 수양을 노래한 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중 제2곡에 나온 구절이다. 퇴계의 자연관에 깊이 공명한다는 작가는 “저의 예술 또한 자아를 표출하거나 고정된 실체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가는 세계의 흐름과 조응하는 행위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강소의 작업은 말 이전의 언어, 혹은 말이 다다를 수 없는 ‘지언무언(至言無言)’의 세계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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