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l Along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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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고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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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도시 파리에는 갤러리와 미술관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워낙 규제가 엄한지라 도심에 새로 생긴 큰 규모의 예술 공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 도시의 서쪽 끝자락으로 향하면 참신한 예술의 장을 마주할 수 있다. 파리 16구 불로뉴 숲. 청량한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짙은 녹음(綠陰)을 병풍처럼 두른 채 건물이 하나 솟아 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을 온몸에 받으면서 유유자적 흘러가는 구름 배 같기도 하다.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의 놀이터에는 까르르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이 울창한 수풀 속의 건물은 바로 개관 1년을 맞이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이다. 전시 미술품보다 건물이 더 유명한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을 설계한 건축 거장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의 작품이다. 이 명성 높은 노장이 돛이나 배만큼 좋아한다는 물고기 모양의 설치물이 그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르 프랭크(Le Frank)’ 가까이에 매달려 있다. 미슐랭 스타 셰프 장 루이 노미코가 운영하는 이 레스토랑과 함께 4층짜리 미술관 안에는 서점과 오디토리엄, 그리고 핵심 공간인 11개의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총 면적 11,000m².

사랑하는 도시에 건네는 미술관이라는 선물
명품 브랜드 소유의 재단에서 예술에 투자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함부로 넘볼 수 없다. 특히 법 규제나 여론 때문에 새로운 랜드마크를 세우기가 유난히 까다로운 파리에서는. 파리에 현대미술을 담는 새로운 공간을 세우려는 LVMH 그룹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오랜 열망이 마침내 이뤄진 것이다. 종종 세계 3대 컬렉터로 꼽히기도 하는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반세기 뒤에는 파리 시민들의 소유가 될 수 있도록 이 미술관을 시에 기증하기로 했다. “파리의 풍요로운 문화적 풍경을 담아내면서 모든 관중을 포함시키고자 하는 사명으로 시작한 일이에요. 특정 기업의 투자라기보다는 파리라는 도시에 선사하는 일종의 선물이죠.” 25년 가까이 아르노 회장의 고문역을 맡아온 장-폴 클라브리의 설명이다. 사실 이토록 아름다운 미술관이라면, 그리고 모두가 예술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된다면 그것이 개인의 숙원 사업이든 브랜드 차원의 전략에서 생겨났든 무슨 상관이랴 싶다. 특히 파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고전주의나 인상파 작가가 아닌 현대미술을 품은 공간이라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확실히 이 숲 속의 공간은 렌초 피아노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퐁피두 센터나 장 누벨의 유리 건축물에 경외심이 드는 현대미술 전시를 펼치는 까르띠에 재단 미술관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굳이 ‘예술의 소통 공간’이라거나 ‘삶의 예술(art de vivire)’라는 단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우아하고 화려하면서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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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감각으로 가득한 역사

그 매력은 아마도 미술관 앞에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선 광경이 자주 눈에 띄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듯싶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문을 연 지 9개월 만에 이미 관람객 수 1백만 명을 돌파했다. 물론 ‘개관 효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가 세운 미술관이라고 해서 반드시 관객몰이를 한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이 쏟아지기도 한다. 뭔지 모르게 브랜드 색이 강할 것이라는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도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 자체로 걸어 다니는 브랜드인 스타 건축가와 프랑스 최고 럭셔리 그룹의 수장이 이끄는 명품 브랜드의 만남이었으니 개관 전부터 화제가 만발하기도 했지만 ‘대체 얼마나 화려할 건데?’라는 식의 비판적인 눈초리도 꽤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베일이 걷히면서 드러난 루이 비통의 현대미술관은 나름 튀기는 해도 파리 시민들이 불로뉴 숲의 정취를 해친다고는 할 수 없는 우아한 조화미를 뿜어냈다. 햇살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날이면 미술관 건물 한편에 자리 잡은 계단 위를 흐르는 물줄기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은 꽤나 평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루이 비통이라는 화려한 브랜드에 이끌려 찾아온 방문객이든, 현대미술 애호가든 누구나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풍경이다. 애초에 아르노 회장이 현대미술을 매개체로 한 더 많은 대중과의 소통을 원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이뤄가고 있는 셈이다. 사실 루이 비통은 가장 친근하면서도 대중적인 감각으로 예술을 대중 앞에 끌어낸 역사를 지니고 있다. 30대의 마크 제이콥스를 내세워 무라카미 다카시와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구사마 야요이와 물방울 모노그램을 선보이면서 팝아트를 패션에 입히고 대중에게 더 각인시킨 브랜드니 말이다.

콘텐츠를 선별하고 보여주는 그들만의 방식
이 수려한 공간 속에 들어앉은 콘텐츠의 색깔이나 구성 방식도 흥미롭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전시를 지휘하는 수장은 파리 시립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관장 출신이자 베니스 비엔날레 기획자로서도 명성을 날린 수잔 파제((Suzanne Page′)다. 그래서 개관 당시에는 프랑크 게리를 기리는 건축전 위주의 콘텐츠였던지라 그녀의 출중한 실력과 어우러진 아르노 회장의 감탄스러운 컬렉션을 기대한 이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다소 엇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미술관 내부의 ‘핫 스폿’으로 노란색 배경에 거울을 활용한 감각적인 설치 공간을 담당하기도 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개인전을 비롯해 영구 소장품을 공개하는 상설전 <항(Hang) 시리즈>를 잇따라 개최하는 등 시간과 흐르면서 콘텐츠가 드러나자 나름의 개성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콘텐츠 구성을 보면 네 가지 테마를 기본 틀로 삼은 채 전시를 꾸려나가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사색(contemplative), 팝아트(popist), 표현주의(expressionist), 음악과 소리(music/sound)가 그 네 가지다. 이 중 팝아트와 음악에 초점을 둔 전시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항 시리즈 3>는 이 미술관의 특색 있는 매력을 잘 보여주는 전시라고 여겨진다. “나는 한 번도 아프리카에 간 적이 없다. 하지만 문화적인 기억이 있다”라는 멘트가 그에 대한 그리움을 더 불러일으키는 장 미셸 바스키아의 ‘그릴로(Grillo)’(1984), 벽 한 면을 길게 수놓은 길버트 & 조지의 작품 ‘클래스 워, 밀리턴트, 게이트웨이(Class War, Militant, Gateway)’(1986) 같은 1980년대 팝아트 작품들부터 공연 현장의 생생한 감동을 전해주는 더글러스 고든의 ‘K364’(2010)나 클럽에서 온몸으로 음악에 반응하는 젊은이들의 영상을 담은 ‘더 크레이지 하우스(The Krazy House)’(2010) 같은 최근작들까지 다채롭고 흥미로운 콘텐츠가 넘실댄다. 저마다의 취향이 있겠지만 베를린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1980년생의 젊은 아티스트 시프리앙 가이야르의 ‘Desnianski Raion’(2007)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반젤리스의 음악과 레이브 뮤직 등을 배경으로 파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베오그라드, 키예프 등의 황폐한 도시 외곽 풍경이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등장하는 영상 작품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흔적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는데, 끝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누군가 우연히 이처럼 끌리는 작품을 만나게 하는 기회를,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으로도 이 미술관의 존재 이유는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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