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도시에서 마주한 국제적 미술 협업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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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07, 2024

글 고성연(가오슝 현지 취재)

가오슝(Kaohsiung) 미술관 산책

일본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작은 섬나라 대만은 근현대사를 놓고 볼 때 한국과 닮은 면이 많다. 깊은 상흔을 남긴 전쟁과 식민지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수식어를 꿰차게 한 가파른 경제성장, 민주화의 진통과 높은 교육열. 최근의 문화 예술계 동향을 보자면 외국 자본이 주도한 아트 페어가 활발히 전개되고, 자금력을 앞세운 민간 기업의 ‘아트 마케팅’이 눈에 띄게 부각되고 있다는 점도 공통분모라 할 수 있다. 물론 비슷한 궤적만큼이나 다른 면모도 많다. 바로 그 같은 묘한 닮음과 차이의 매력이 바다 너머 멀리까지 도시 탐방에 도전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부산처럼 항구를 낀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Kaohsiung)에서 국경을 넘는 ‘협업’의 다면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짧지만 나름 강도 높은 미술관 산책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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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지속된 코로나 시기를 전후로 여러 차례 찾게 된 대만. 첫 방문지인 수도 타이베이를 위시해 마치 도장 깨기처럼 주요 도시들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여행했는데, 매번 고속열차(HSR) 노선에서 더 남쪽에 자리한 주요 도시를 하나씩 목록에 더해나가는 식이었다. 타이베이 → 타이중 → 타이난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길지 않은 일정을 틈탄 미술관 위주의 방문이었으니 ‘이 도시를 섭렵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늘 그렇듯 주제가 있는 여행은 꽤 밀도 높은 경험과 지식을 안겨준다. “뮤지엄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생각을 보여주는 장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앙드레 말로). 또 어떤 미술 사학자는 이런 주장을 했다. “뮤지엄의 소장품에 대해 논쟁한다는 것은 곧 그 가치와 도덕성, 나아가 정체성을 논하는 것과 같다. 뮤지엄 관람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끝없이 찾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도미니크 풀로).
솔직히 현지에서는 진중한 논쟁거리나 스스로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할 여유를 가진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소장품은 다시 볼 수 있다 해도 기획전 형식의 콘텐츠는 도록과 기억만 남기고 사라지기에 타고난 성향에도 맞지 않는 듯한 ‘부지런’을 떨면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섬세한 경험은 반드시 어딘가에 예리하게 자리 잡는 듯하다. 짧은 감상 속에서도 의미 있는 단상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고, 당장은 아니지만 훗날 깨달음이나 사유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만한 반짝이는 순간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얼마 전 ‘목록’에 추가한 대만 남부의 항구도시 가오슝(Kaohsiung)에서는 동서를 잇는 협업의 스토리텔링을 만났다. 언뜻 화려한 듯 특별할 것까지는 없는 ‘물 건너’ 온 전시 같은데,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여러모로 흥미로운 면면이 엿보이는 기획전이다(어떤 관점과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못 여러 의견이 나올 만한).
런던에서 날아온 기획전, 현대미술 거장들이 한자리에
지난 4월 말, 영국 런던에서 막을 내린 전. 런던을 상징하는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에서 거의 1년 가까이 열린 기획전으로 지난 6월 말 가오슝 시립 미술관(KMFA, 高雄市立美術館)에 상륙했다. 전시 제목처럼 1백 년 동안 회화와 사진의 관계를 탐구한 이 전시는 일단 작품 목록이 화려하다. 예컨대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인 ‘사진 시대의 회화’에서는 20세기 사진이 가져온 도전과 충격에 대응해 화가들이 발전시켰던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위시해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 앨리스 닐(Alice Neel), 도러시아 랭(Dorothea Lange)이 포함돼 있다. 예술가들이 회화적 재료와 기술을 활용해 구성의 미학을 이뤄낸 방식을 보여준 두 번째 섹션인 ‘긴장’에서도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파울라 헤구(Paula Rego), 세실리 브라운(Cecily Brown), 조지 콘도(George Condo) 등 쟁쟁한 이름들이 보인다. 이어 아마도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 중 하나일 제프 월(Jeff Wall)의 1993년 작 대형 작품 ‘A Sudden Gust of Wind(after Hokusai)’가 전시된 ‘회화를 사진으로(Painting into Photography)’ 섹션, 토마스 슈트루트(Thomas Struth), 칸디다 회퍼(Candida Ho..fer), 안드레아스 거스키(Andreas Gursky), 스기모토 히로시(Hiroshi Sugimoto) 같은 현대 사진 미술의 거장들이 줄지어 등장하는 ‘회화로서의 사진(Photography as Painting)’ 섹션, 그리고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작품이 시선을 절로 훔치는 ‘역사를 포착하다(Capturing History)’ 섹션 순으로 전개된다. 마지막으로 이번 전시의 키 비주얼로도 쓰인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자화상(실크스크린 작품)’, 영국 출신의 ‘거성’ 작가들인 피터 도이그(Peter Doig)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대형 회화 등을 선보인 여섯 번째 섹션 ‘컨버전스(Convergence)’가 자리한다.
작가의 이름값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 작품의 면면도 대체로 빼어나다. 작품 수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55점) 미술 애호가라면 외면하기 힘든 구성의 전시다. 특히 서구 작가가 대다수라 아시아 도시에 거주하는 관람객 입장에서는 반가운 전시일 수 있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리히터의 수작이라든지 피터 도이그의 1990년대 대작, 미리암 칸(Miriam Cahn)의 커다란 캔버스 작품을 육안으로 접하는 등 ‘애정’하는 작가들 작품을 접해 즐거웠다. 사실 이 전시는 ‘스타 라인업’에 비해 런던 현지에서는 (적어도) 언론의 대대적인 호평을 받지 못했다. 작품은 빼어나지만 ‘맥락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회화와 사진의 관계’라는 그럴듯한 미끼를 던졌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서사가 풍부하지 않고, 작품 선정도 일부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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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화려한 라인업, 동서양의 컬렉션을 엮은 협업
가오슝 전시 현장을 둘러싼 분위기는 다를 것 같다(전시 초기에 방문하기는 했지만 ‘열기’가 느껴졌다). 이러한 온도 차는 아무래도 전시를 바라보는 관점과 입장이 달라서가 아닐까 싶다. 그 출발점부터 살펴보자면 는 동서양이 만난 협업전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플랫폼인 테이트의 소장품과 대만의 기업가이자 유명한 미술 컬렉터인 피에르 첸(Pierre (Pierre Chen, b. 1956) 이끄는 야게오 재단(YAGEO Foundation) 소장품이 힘을 합쳤다. 이번 가오슝 협업전의 작품 구성을 보면 테이트 소장품 34점, 야게오 재단 소장품 21점으로 이뤄져 있다. 테이트 관장을 지냈던 니컬러스 세로타가 재직하고 있던 당시 피에르 첸과의 우연한 대화에서 시작되어 한참 만에 실제로 구현됐다는 이 전시는 동서양 미술 기관의 만남이기는 한데, 하나는 세계적인 ‘브랜드’를 자랑하는 미술관이고, 하나는 개인 컬렉터의 소장품을 담당하는 사립 재단이다. 어찌 보면 피에르 첸의 화려한 컬렉션(이번 기획전에서는 스기모토 히로시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서구 작가의 작품만 포함됐지만)을 런던에 소개하는 전시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오슝을 찾은 테이트 모던 국제 미술 컬렉션 디렉터 그레고르 무이르(Gregor Muir)는 “어떤 사람들은 가장 비범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다른 사람의 컬렉션을 보고 어떻게 협력할지 고민하고 풀어내는 일은 정말로 즐거운 작업”이라며 “수집은 일종의 예술이고, 그런 관점에서 더 많은 컬렉션과 협업하는 건 멋진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소장품 전시는 대개 ‘상향식’으로 전개되는 일반 전시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할 수 있어 큐레이터로서도 흥미롭다는 얘기다.
“이런 전시를 기획하는 일은 ‘통합’에 가까워요. 우리가 가진 것, 그들이 가진 것이 있고, 거기에서 ‘연결 고리(connections)’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는 일례로 야게오 재단에서 소장한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작품 ‘May Day IV’(2000) 옆에 걸린 테이트의 거스키 소장품 ‘Paris, Montparnasse’(1993)를 한 공간에서 감상하는 건 매력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번 협업전은 ‘주제가 있는 소장품 전시’로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냐는 의견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전시는 애초에 그런 윤곽으로 다가왔다. ‘사진+회화’라는 주제에 꽂히기보다는 야게오 재단의 소장품 목록을 훑어보고는 ‘피에르 첸’부터 검색하게 됐다. 동양의 부유한 컬렉터가 영국인들에게 조금 낯설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한 애호가의 현대미술에 대한 사랑과 수집 과정에 더 초점을 맞춘 스토리텔링으로 엮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런던 전시에서는 그의 소장품 중 동양권 작가들에 비중을 두고, 가오슝 전시에서는 (지금처럼) 서구 작가들이 주로 소개되는 구성을 했다면 균형 잡힌 재미가 있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가오슝에서는 홍보 방향 자체가 달랐다. 가오슝 시립 미술관은 “티켓 한 장이면 (테이트 모던의 기획전에서 전시된) 세계적인 걸작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며, 런던 바깥에서는 유일무이하게 가오슝에서만 볼 수 있음을 강조했다. ‘테이트’라는 브랜드와 피에르 첸이 근사하게 병치되는 구도를 마다할 현지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구나 타이난 태생이지만 가오슝에서 자라 ‘고향’처럼 애틋한 진심을 지닌 듯한 피에르 첸은 이 전시가 작품 대여료 없이(양 기관 모두) ‘순수한’ 협업으로 진행되었음을 밝히기도 했다(이 전시가 다른 도시로 ‘순회’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 정부도 기꺼이 지원에 나섰다. 특히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만큼 30세 미만 관람객들에게는 무료 관람 기회를 제공했다(전시는 오는 11월 17일까지). 다른 기관에서 콘텐츠를 통째로 빌려 오는 순회전이 많은 요즘 시대에 기획자라면 현지의 감성과 실익을 따지는 ‘협업’의 역학을 고심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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