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그레인지 kenneth g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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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01, 2011

글 고성연 기자 (영국 런던)

반세기 넘게 현대 영국인들의 일상을 잔잔하고 의미있게 수놓은 살아 있는 산업 디자인의 거장! 20세기 영국 사회와 발자취를 함께해온 위대한 일상성. 단지 옛 작품에 대한 회상에 빠져 있기에는 활발한 ‘현재 진행형’인 그의 디자인 세계와 삶을 들춰본다.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Hamstead)에 자리 잡은,

런던의 싱그러운 한여름 어느 날. 조용하고 운치 있기로 소문난  아담한 정원이 딸린 집을 찾았다. 소담스러운 열매들이 달린 화초와 나무가 즐비하고 한편에는 작은 작업실도 마련되어 있는 정원에 둘러싸인 이 아늑한 보금자리에서 필자가 만난 이는 영국 디자인계의 ‘거목’ 케네스 그레인지(Kenneth Grange). 당당한 기백이 엿보이고 몸놀림이 꽤 날렵하며 안색도 맑은 편이지만 이마에 파인 깊은 주름과 성성한 백발이 연륜을 말해주는 이 매력적인 노장은 1929년생이다. 수천만 대의 판매고를 기록한 코닥(Kodak)의 필름 카메라 시리즈, 요즘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련됨으로 극찬을 받았던 40년 전의 고속 열차 디자인, 주방용품 디자인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켄우드(Kenwood) 믹서, 런던을 상징하는 명물의 하나로 꼽히는 ‘블랙 캡(TX1)’, 영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주차 요금 징수기,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버스 정류장 간이 대합실, 한때 모든 이들이 하나쯤은 책상서랍에 놓아두거나 주머니에 꽂고 다녔던 파카(Parker) 펜. “디자인엔 사회의 변화 양상이 담겨 있어요. 어째서 그 시기에 그런 제품이 나왔고 인기를 끌었는지, 왜 자취를 감췄는지, 갖가지 일화가 얽혀 있지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킨 케네스 그레인지의 60년 가까운 이력은 자신의 말이 시사하듯 20세기 중반부터 영국 사회와 발자취를 함께해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82세의 백발 노장이 됐지만 여전히 열정을 간직한 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디자인계의 거장이다.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Design Museum)에서는 반세기가 넘는 그의 디자인 인생을 조명하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오는 10월 말까지).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그래서 위대한

전시회에 가보면 그의 회고전이 어째서 ‘메이킹 브리튼 모던(Making Britain Modern)’이라는 부제를 달게 되었는지 금방 수긍이 된다. 아이스크림을 푸는 플라스틱 재질의 귀여운숟가락부터 날렵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자태를 뽐내는 다리미, 1960~70년대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앞선 느낌의 동그란탁상용 시계와 옷걸이, 실용적인 단순미가 돋보이는 면도기시리즈까지…. 견고한 소재에 깔끔한 디자인이 가미된 다양한 일상용품에는 현대성이 투영되어 있다. 그의 디자인이야 로 실용주의에 발명가 정신, 위트가 결합된 ‘영국적 모더니티’를 형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분명 화려하진 않다. 실용성과 간결미를 중시한 ‘바우하우스 정신’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우리 삶에서 수시로 접하는 대중적인 일상용품이 대부분이라 그런지 다분히 일상적이고 소화하기에 무난하다(물론 당시에는 혁신성과 세련미로 화제를 모은 디자인도 꽤 많지만). 그런데 그 일상성에는 늘 곁에두고 써왔던 것 같은 편안함, 그러나 쉽게 물리지 않는 단아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가 기능적인 내구성, 실용성과 맞물려 어느새 삶의 소중한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하는 특별한 친근감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 봐도 낯설거나 촌스럽지가 않다. 정겹고 친숙하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상성인가.

성실한 자세와 긍정의 에너지로 쌓고 지켜온 아성

혹자는 그의 디자인을 가리켜 ‘스트레스가 없다’고도 표현했다. ‘자연스레 일상에 스며드는 친근성’과 맥이 닿아 있는 해석이다. 그건 그의 성격과도 닮았다. 그렇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글이든 작품에는 ‘그 사람’이 묻어 나오기 마련. 분명 케네스 그레인지라는 인물이 그려내는 작품에는 켜켜이 쌓여 있던 스트레스도 해소될 것 같은 담백한 긍정의 기운이 서려있다. “나는 원래 낙천적이고 쾌활한 편이에요. 아침에 눈 뜨면 대체로 기분이 좋고 기운도 샘솟고, 누구라도 흔쾌히 만날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났다고나 할까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어하는 내 아내랑은 반대로 말이죠(웃음)!” 실제로 그는 부지런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24시간형 인간’이다. 그가 1972년에 동료들과 공동으로 설립한 전설적인 디자인 업체 펜타그램(Pentagram) 시절, 사업이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는데도 단 한 번도 납기일을 어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이유 있는 자랑이다. “자주 강조하는 얘기지만 내게는 하루에 최대 24시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어째서 고객과의 약속을 저버리겠어요. 난 일주일에 1백시간 넘게 일해도 끄떡없었어요. 지금도 그런 열의는 마찬가지죠.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아침 7시 반부터 1시간 간격으로 잇따라 세 차례 회의를 한 적도 있어요.” 부모에게 물려받은 예술적 끼와 근면함전후 사회 분위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케네스 그레인지는 이처럼 유달리 부지런하고 의욕이 넘쳤기에 경쟁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도 앞서 나갔다. 이러한 장점은 반은 모친에게 물려받고, 반은 군대에서 체득한 게 아닌가 하는 게 그의 자체 분석이다. 전쟁으로 얼룩졌던 1930~40년대에 아버지가경찰관으로 재직하는 런던 동부의 평범한 가정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14세에 장학금을 받고 윌레스덴(Wilesden School of Art)이라는 예술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어머니는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공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굉장히 근면했으며 내게도 항상 성실한 자세로 일에 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예술 학교에 진학하고 디자이너가 되는 진로를 지원한 것도 그런 방면에는 ‘까막눈’에 가까운 그의 어머니였다. 실제로 다방면으로 예술적 재능을 보였던 케네스의 아버지는 혹시나 아들이 불안정한 생활을 하게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에 오히려 그의 디자인 입문을 별로 반기지않았다고. 그는 “어머니는 미술이나 디자인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깊은 분이 아니셨지만 결코 이기적이지 않은 어머니로서의 순수한 본능에서 내가 뭘 하면 행복할지 예감하셨던 것 같아요”라고 그리운 눈빛으로 회상했다.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투철한 직업 정신은 군대(당시엔 영국에서도 2년간의 강제 복무가 행해졌다)에서 더욱더 견고해졌다. 학교를 졸업한 뒤, 불과 18세의 나이에 건축 사무소의 조수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돌연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을 위한 도안을 담당했기에 결코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표현에 따르면 군대에서 보낸 2년은 ‘체력의 근간을 마련한 위대한 시간’이었다고. “디자이너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이들은 웃는데, 솔직히 장시간을 버틸 수 있는 체력이야말로 나의 엄청난 자산이었다고 봅니다. 몸이 따라주어야 일에도 성실할 수 있는 거지요.”

디자인 인생에 한 획을 그은 성공

이처럼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만 보면 마냥 무던한 캐릭터였을 것도 같지만 사실 그는 젊은 시절 비즈니스 세계에서 성실함만큼이나 요긴한 쇼맨십과 순발력, 도전 정신을 발산했다. 실제로 이런 면모가 그의 인생에 활로를 터주기도 했다. 잭 하위(Jack Howe) 등 당대 유명한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국제 박람회와 같은 전시회 프로젝트를 많이 맡았던 그는 1958년 브뤼셀에서 열린 무역 박람회에서 코닥과 일했다. 20대의 도전적인 혈기로 독자적으로 사무소를 차리고 활동할 때였다. 예상보다 준비가 빨리 끝나 현장에서 전시 부스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카메라만 이렇게 처참하게 흉하지 않았더라면 정말이지 훌륭했을 텐데….” 물론 이 발언 자체는 특정한 이를 겨냥하지 않고 별다른 의도 없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이를 들은 코닥의 임원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고 한다. “음, 그러면 자네가 만약 새로운 카메라의 디자인 작업을 맡는다면 얼마나 받겠는가?” 케네스는 당황했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몇백파운드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음 날 아침, 런던에 돌아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코닥의 연구 개발 임원인 피트 박사라는 인물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당신이 우리 카메라를 새로 디자인하기로 했다는데, 맞습니까?”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필름 사업에 의존했던 코닥이 카메라로도 성공하는 데 물꼬를 튼 제품 중 하나인 44A’이다. 이를 출발점으로 케네스는 코닥과 20년을 넘게 동고동락하면서 ‘인스터매틱(Instamatic)’ 등 히트작을 쏟아낸다. 그에겐 코닥 임원과 짧은 대화를 나눈 그 순간이 인생의 전환점이자 커리어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꼽힌다. “멋지지 않아요? 수주에 이은 성공이 아니라, 인생이 흥미롭고 우연한 사건들을 계기로 변하는 그 자체가 말이에요. 난 그 일을 의식하진 않았지만 도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쪽에선 나의 순수함과 열린자세를 포착했던 것이지요. 찰나에 정서적인 교류와 판단이오간 것이고.”

겸허함을 일깨우는 노장의 진지하고 즐거운 열정

그는 25년의 활약을 끝으로 현재는 잉글랜드 남서부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장 데번(Devon)에 주로 머물며 노후를 즐기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사업체 ‘케네스 그레인지 자인(Kenneth Grange Design)’을 운영하며 여전히 일에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최근엔 패션 디자이너 마거릿 하우얼(Margaret Howell)과 은은한 엷은 회색이 근사한 남성용 셔츠를 완성했고, 가구 브랜드 히치 밀리어스(Hitch Mylius)와 함께 노년층을 위한 의자를 곧 내놓을 예정이다.이렇듯 ‘아직도 일이 고픈’ 그는 가장 소중한 자신의 역작으로1968년에 선보인 고속 열차 ‘인터시티 125’를 서슴지 않고 꼽는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와 나눈 인터뷰에서 말했듯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40년 넘은 지금에도 그다지 많이 바꿀 게 없는 작품이라고 감히 생각한다”는 자평이다. 그는 공공디자인, 특히 대중교통에 관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생활과 밀접한 대중교통은 그의 디자인 철학이 명시하듯 ‘목적이 있고, 그에 합당한 기쁨도 주는 디자인’에 잘 맞는 대상이 아닐까 싶다.낭비적인 디자인이 판을 치고 스타 디자이너들을 내세운 마케팅 전쟁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현실을 마주한 노장은 소비 위주의 현상에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얼마 전엔 호텔의 휴대품 보관소용 플라스틱 카드 키도 차마 버리지 못해 돌려 보냈어요. 그냥 버려도 되는 걸 알지만 낭비란 생각에 그럴수 없었지요.”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태도에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즐거운 기운을 전달해주는 사람이다. 스키를 좋아했지만 양쪽무 릎이 닳아 티타늄 소재의 인공물을 심는 수술을 해서 더 이상 타지 못한다는 설명조차 심각하게 들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무릎 닳는 것도 옷이 해지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해맑은 노안을 지켜보노라니 전시회를 기념해 발간된 그에 대한 책을 집필한 공동 저자가 써 내려간 한 구절에동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우아하게 여물어가는 물건을 만들 줄 안다(Deyan Sudjic, 2011).” 자신의 디자인처럼 세월이 갈수록 깊어가는 우아한 성숙미와 소박한 웃음을 자아내는 케네스 그레인지야말로 이 시대가 낳은 진정한 ‘별 중의 별’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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