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중문화 콘텐츠는 판타지로 물들어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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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01, 2017

에디터 고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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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물론이고 TV 드라마, 영화, 소설 등 대중문화 콘텐츠의 판타지 열풍이 심상치 않다. 신화적 상상력의 쾌감 덕분에 부당한 현실에 지친 사람들이 판타지로 위로받는다고들 한다. 사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판타지는 늘 관심을 끌어왔지만, 이처럼 21세기 들어 판타지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스토리텔링의 진화와 함께 비현실적인 소재로 현실을 더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술력에 힘입은 시각적 스펙터클의 미학이 자리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지 않은 판타지는 진정한 판타지가 아니라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판타지로 물들고 있다. TV 속 세상에서도 극장에서도, 그리고 그 열풍을 이어 서점가에서도 판타지 콘텐츠가 유달리 두각을 나타내는 모양새다. 특히 드라마 세상의 판타지 열기는 유독 뜨겁다. 지난해 가을 만화 주인공이 현실 세계를 넘나드는 MBC 드라마 <W>가 화제를 몰고 온 데 이어 3년 전 <별에서 온 그대>에서 외계인을 내세운 박지은 작가는 또 다른 판타지 로맨스 <푸른 바다의 전설>(SBS)에서는 인어를 소재로 삼았고, 명실공히 국내는 물론 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드라마계 히트 제조기로 자리매김한 김은숙 작가는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중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최종회에서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케이블 드라마 역사를 다시 쓴 도깨비 열풍을 이은 tvN의 금·토극 후속작 <내일 그대와> 역시 지하철로 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시간 여행자와 그의 아내의 로맨스를 담은 판타지물이고, 배우 이영애의 안방극장 복귀작으로 화제가 된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타임 슬립을 소재로 한 작품. 올 초 극장가에서 ‘대박’을 터뜨린 데다 그 여세를 몰아 서점가에서도 강풍을 일으킨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역시 판타지 청춘 로맨스물이다. 이처럼 판타지 성향이 짙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강세에 대해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대중심리’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는 분석이 많다. 각박하고 부조리한 세상의 반대 양상을 보여주는 초현실적인 배경과 스토리, 캐릭터가 지친 나머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대중에 위로와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는 논리다. 그렇지만 판타지 콘텐츠의 인기가 단지 현실 도피적인 요소 덕분일까? 이도 사회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유행인 걸까, 아니면 커다란 흐름인 걸까? 중요한 건 판타지 콘텐츠는 해당 산업의 혁신적인 변모를 불러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주류에서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다

문화 콘텐츠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리얼리즘 계열과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판타지 계열, 이렇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소설, 영화, 게임 등 요즘 대중문화의 장에서 판타지 콘텐츠는 이미 글로벌 차원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고, 양적으로만 보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돌아보노라면 판타지 콘텐츠가 질적, 양적으로 모두 각광받은 건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우선 영상 매체가 등장하기 전 신화, 전설, 민담의 전통을 계승한 판타지 문학은 인간이 갈망하는 초월적인 세계를 다뤘기에 그 매력을 인정받았을뿐더러 인기도 누렸지만, 결코 주류로 대접받지는 못했다(특히 서구 세계에서는 이성과 현실의 재현인 미메시스(mimesis)를 중시한 만큼 많이 평가절하됐다고 <판타지>라는 책의 저자 송태현은 설명한다). 동양 문화권에서도 중국의 <서유기>나 우리나라 <구운몽>, <전우치전> 등 환상(판타지) 문학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 꽤 있지만, 서구 영향으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부상하는 바람에 잘 계승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주로 아동문학으로 인식됐던 판타지 소설의 격을 끌어올리고 독자층을 청소년, 성인으로 확대한 <반지의 제왕>의 J. R. R 톨킨을 위시해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조앤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 등이 높은 평가와 인기를 동시에 낚아챘고, 21세기 들어서는 영화 콘텐츠로도 엮이면서 전 세계 대중의 삶에 스며들었다. 장 보드리야르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판타지는 현실 너머에 존재한다기보다는 일상과 공존하는 하나의 문화 코드이자 언어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의 소통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 배경에는 콘텐츠 자체의 진화도 있었지만 ‘이성의 힘’을 강조한 근대에 대한 회의가 짙게 깔리면서 합리적 이성 너머의 ‘근원적인 것’에 대한 통찰로 무게중심이 옮겨 가는 사회, 문화적 변화가 버티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고 초월적인 세계를 갈망하는 대중 심리를 영리하게 파고든 자본주의적 전략이 대중문화 콘텐츠 세계에서 주효했던 셈이다. 이는 실재보다 더 실감 나게 현실을 그려낼 수 있는 테크놀로지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시각적 스펙터클을 가능케 한 ‘컬처 테크놀로지’의 힘

영화는 그 중심에 있었다.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달로 영화는 판타지를 생생한 ‘하이퍼 리얼리티’로 나타내는 놀라운 시각적 체험을 제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사실 ‘판타지’라는 단어 자체에는 이미 시각적인 스펙터클의 중요성이 묻어 있다고 한다. 라틴어로 ‘가시화하다, 명백하게 하다’라는 단어(phanta′stcus)가 파생되면서 생겨난 단어여서다. 영화란 시각적 체험이어서일까? 판타지 영화가 영화적 욕망이 가장 잘 발현된 콘텐츠로 부각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터다. 그렇다고는 해도 판타지 영화의 시초는 현란한 스펙터클을 선사할 만한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시절까지, 의외로 꽤 많이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초는 1902년에 나온 조르주 멜리어스의 <달 세계로의 여행(A Trip to the Moon)>이라는 작품으로 사상 최초의 영화이자 리얼리즘 계열의 시작인 뤼미에르 형제의 <공장 노동자의 퇴근(Workers Leaving the Factory)>보다 7년 늦게 선보였다. <판타지 영화와 문화 콘텐츠 산업>에 따르면 이 고전 SF 판타지는 성공작이었고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 <블레이드 러너> 같은 SF 판타지든 기괴(weird) 영화든 무협 판타지든 하위 장르에 상관없이 기술력(화면)과 서사가 뒷받침되면 판타지의 흥행 성공 확률은 높았다고. 21세기에 돌입하면서 판타지 영화의 전성시대가 본격 펼쳐진다. 2001년에 <해리 포터>와 <반지와 제왕>이 각각 개봉했고, <캐러비안의 해적>, <나니아 연대기>, <황금나침반> 등이 잇따라 흥행에 성공하면서 대대적으로 새 장을 연 것. 컴퓨터그래픽(CG), 3D 입체 기술 등이 일취월장한 덕에 2010년에는 판타지 영화에 획을 그은 <아바타>가 등장했다. 배우의 표정을 통해 감정을 포착하는 수준까지 가능한 기술인 ‘이모션 캡처’ 로 사람을 대신하는 디지털 액터(digital actor)가 더욱 정교해졌을 뿐만 아니라 3D 입체 영화 제작을 훨씬 손쉽고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촬영 시스템도 개발됐다. 콘텐츠를 실어 나르는 플랫폼이 다양해짐에 따라 경쟁력 강화와 리스크 방어 차원에서 압도적인 스케일을 내세우는 블록버스터화 흐름이 거세지면서 판타지 영화는 점점 더 각광받고 있다. 여기에는 스펙터클이 돋보이는 판타지물은 한 문화권에 뿌리를 둔 상품이 다른 문화권으로 진입할 때 언어, 관습 등의 차이로 가치가 떨어지는 ‘문화 할인(cultural discount)’ 현상이 상대적으로 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캐릭터 상품, 테마 파크 등 다른 상품으로 확장할 수 있는 원 소스 멀티 유스(OSMU)의 가치도 높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역대 세계 흥행 순위 톱 20 영화에서 판타지물이 아닌 작품은 <타이타닉> 정도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판타지 열풍은 드라마 세상에서도 뜨겁다. 2011년부터 전 세계를 ‘판타지 미드’의 매력으로 물들인 <왕좌의 게임>을 비롯해 고전 동화를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재해석한 판타지 수사 드라마 <그림형제>, 좀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사투를 그린 판타지 좀비물 <워킹 데드> 등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한국형 판타지 블록버스터의 가능성? 결국은 스토리텔링의 힘일까

동양 문화권에서도 판타지 콘텐츠를 향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공화국 일본은 판타지의 하위 장르인 SF물로 1960년대 <철완 아톰>부터 시작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담은 <아키라>,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작품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너의 이름은> 같은 감성적 판타지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계속 선보여왔고, 중국에서는 동양권에서 가장 대중적인 고전 설화 <서유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와 무협 판타지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서양의 신화와 요정, 영웅담을 기반으로 한 할리우드발 판타지물에 비하면 아무래도 ‘뛰노는 무대’나 ‘체급’ 자체가 달랐고, 장르의 다양성에서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해 스펙터클을 갖춘 데다 동양의 신비스러운 판타지가 매혹적이었던 장이머우의 감독의 <와호장룡>은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한 첫 번째 무협 판타지로 평가된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멜로와 서사가 적절히 깃든 판타지 영화 <은행나무침대>, 그리고 <구미호>나 <여고괴담> 같은 공포 판타지 영화, 납량 특집 드라마 <M>이 인기를 끌면서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흥행과 호평을 동시에 움켜쥔 작품이 많지는 않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내추럴시티>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SF 판타지물이 잇따라 나왔지만, 아무래도 제작 규모가 뒤처지는 데다 우리 정서에 맞는 심오한 세계관의 부재로 처참한 성적을 거뒀다.
그 뒤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SF 판타지 영화 <괴물>과 최동훈 감독의 코믹 영웅 판타지 영화 <전우치>, 광개토 대왕의 일대기를 그린 판타지 사극 드라마 <태왕사신기> 정도가 주목할 만한 흥행작이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순수한 로맨스나 우정을 담은 드라마 장르가 한국인의 코드에 잘 맞는다는 시각도 있지만 판타지적 소재인 좀비를 다룬 <부산행>의 성공이나 최근 <가려진 시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같은 작품들의 흥행 실패를 보면 역시 예측이 어렵다는 대중문화 콘텐츠 세계에서 확실한 ‘성공 공식’이란 따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인기 판타지 콘텐츠를 둘러싼 열기에는 눈여겨볼 만한 요소가 분명 있다. 판타지는 현실 세계를 압도할 만큼 충분히 환상적(fantastic)인 오라를 뿜어내야 하지만 ‘리얼리티’에 바탕을 두지 않은 스토리텔링이라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예컨대 <왕좌의 게임>은 냉혹하고 참혹한 현실이 떠오르는, 그래서 ‘판타지의 탈을 쓴 현실’이라는 평을 듣는가 하면 <도깨비>는 스타 제작진과 배우들, 비현실적이면서도 한국적인 정서와 세계관이 깃든 판타지가 안겨주는 친밀한 쾌감과 세련된 미장센, <부산행>, <밀정> 등을 담당했던 스튜디오가 구현한 CG의 위용이 인기에 큰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현실의 인생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있다. 토종 낭만 설화를 활용했을 뿐 ‘능력자(도깨비)’를 만나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살짝 비튼 판타지라는 비평을 듣기도 하지만, 이 드라마는 희·비극적 요소를 품고 있고 권선징악의 교훈과 업보, 삶과 죽음을 둘러싼 변화무쌍한 양태를 버무렸다는 점에서 현실 인식이 턱없이 부족하지는 않다. 오히려 인간은 정해진 운명의 고리를 벗어날 수는 없지만 ‘다음 생에서는 잘해낼 수 있다’라고 버거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는 영리함을 발휘한다. <너의 이름은>도 어찌 보면 ‘보디 체인지’라는 소재 자체는 흔하지만 “일본 어디에도 이처럼 황홀한 풍경은 없다”라고 할 정도로 세밀하고 아름다운 작화 자체가 판타지 수준인 데다 동일본 대지진의 비극을 모티브로 삼되 희망을 전함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를 낳는다. 예술은 그 자체로 ‘거짓말’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신화적 상상력과 기술력에 힘입은 미학적 역량이 어우러진 판타지의 매력도 결국에는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는 휴식을 선사하는 데 있는 것만 아니라 그런 순간에도 진실을 고민해볼 수 있는 찰나를 빚어내는 데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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