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그라피(KYOTOGRAPHIE) 2025_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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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7, 2025

글 고성연(교토 현지 취재)

천 년 고도의 봄을 ‘사진 예술’로 물들이는 플랫폼의 미학

일본의 ‘천 년 고도’ 교토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놓고 우위를 따진다는 건 저마다의 성향과 방문 목적이 다를 테니 별 의미 없는 논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마 대다수의 나그네들은 벚꽃과 단풍이 곱게 물드는 봄과 가을을 ‘최애’로 꼽을 것이다. 혹시 봄에 교토를 찾을 기회를 갖고자 한다면 국제적인 사진 축제인 교토그라피(KYOTOGRAPHIE)가 열린다는 점을 기억해둘 법하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발품을 파는 이 축제는 운이 좋다면 개막 시기에 벚꽃의 절정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고도의 면면을 새롭게 발견하는 영감 충만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기차역, 미술관, 사찰, 시장 등 교토 시내 곳곳을 다채롭게 수놓은 전시 공간은 출중한 무대 미술 미학과 더불어 각각의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이 빛나는 축제의 장이다. 올봄 ‘humanity’를 주제로 4월 12일 막을 연 교토그라피 2025는 5월 11일까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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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를 찾은 수 차례의 여정 중에서 운 좋게도 단풍의 시작은 스쳐간 적이 있지만 봄을 온전히 누린 적은 처음이다. 안 그래도 인기 많은 이 고도의 주요 호텔들이 저마다 ‘만실’을 외칠 정도로 인파가 들끓고 당연히 방값도 치솟는 시기에 사진 축제를 연다니, 참 용감하고도 영리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어느덧 13회를 맞이한 교토그라피(KYOTOGRAPHIE)는 2013년 프랑스 출신의 사진가 루실 레이보즈(Lucille Reyboz)와 일본의 조명 연출가 나카니시 유스케(Yusuke Nakanishi)가 함께 탄생시킨 사진 축제로 해마다 봄의 축복처럼 교토를 창조적 영감으로 물들여오고 있다.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현대인의 삶에서 밀접하고 친숙한 사진을 활용해 남녀노소가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축제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순수 예술로서의 사진을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 너머의 다양한 공간에서 매년 바뀌는 ‘주제’를 바탕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전문적인 플랫폼이기도 하다. 3백 명 넘는 아티스트들이 참가하는 위성 사진 행사인 KG+, 글로벌 음악 축제인 교토포니(KYOTOPHONIE) 같은 다른 플랫폼까지 아우르는 확장 노선을 성공적으로 밟고 있기도 하다. 전략적 의도가 잘 녹아든 정교한 짜임새 아래 ‘자유로운 품격’을 발산하며 성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정부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 민간 주도 플랫폼으로 10년 넘게 지속적인 나래를 펼쳐온 동력의 원천은 뭘까. 교토그라피는 첫 방문이지만 벚꽃 내음 가득했던 ‘사진 산책’의 풍부한 현장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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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만의 고유한 매력과 협업 전략의 어우러짐
루실 레이보즈가 교토를 처음 발견한 건 1990년대 말이었다고 한다. 블루 노트(Blue Note), 버브(Verve) 같은 음악 레이블과 앨범 커버 작업을 많이 했던 그녀는 당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1952~2023)의 오페라 〈Life〉 프로젝트로 교토를 처음 찾았고 나중에는 아예 일본에 정착하게 됐다. 조명 연출가로 역시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 나카니시 유스케도 일로 인연을 맺게 된다. 둘은 사진 축제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의 도시 아를(Arles) 사례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을 겪으면서 사회·문화적으로 진중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사진 문화를 더 꽃피울 수 있는 플랫폼을 ‘스스로 개척해보자’는 결심을 굳혔다(아를 국제사진축제는 예술가들이 주도해 1970년 탄생했다). 레이보즈와 나카니시는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문화적 토양이 비옥하며, 곳곳을 무대로 변모시킬 수 있는 유럽 여러 도시와 비슷한 규모와 조건을 갖췄다는 점에서 ‘교토’를 택했다. 도쿄 위주도, 상업적 페어도 아닌 ‘글로벌 문화 축제’로서의 정체성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간 주도의 프로젝트인 만큼 다양한 상업 파트너와의 협업이 필수적이었기에 보수성이 짙은 교토에서 ‘판’을 벌이는 데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교토 사람들은 자존심 높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처음에는 프랑스 브랜드 아네스베(Agnès b.) 정도를 제외하면 후원 업체도 거의 없이 시작했다고 한다. ‘humanity’를 주제로 내건 2025년 봄 교토그라피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올봄 행사의 경우에 교토역을 위시해 미술관, 사찰, 역사적 의미를 지닌 전통 목조 주택(마치야), 옛 학교 건물 등 15개의 공간에 다국적 작가들의 전시가 펼쳐지는데(‘패스포트’로 불리는 티켓을 사면 모든 전시장에 기간 내 한 번씩 입장할 수 있다) 시그마, 후지필름 같은 사진업계의 브랜드 말고도 디올, 샤넬, 반클리프 아펠, 루이나, 바이레도, 에이스 호텔 등 다양한 업종에 걸친 브랜드들이 든든하게 뒤를 받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간을 빌려주는 경우도 있고, 전시 관련 비용을 대주기도 하고, 유망 아티스트들에게 상을 주기도 하고(예컨대 프랑스 샴페인 브랜드 루이나는 일본 사진가에게 레지던스와 전시 기회를 준다) 공동 기획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후원과 협업의 사례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달라진다. ‘전시’ 자체의 품격이나 수준이 떨어지게 하는 개입은 적어도 올해 축제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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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사용하는 작업을 해왔지만, (커다란) 인쇄 시설에서 전시하는 건 교토그라피가 처음이에요. 1년 반 전쯤부터 협업을 준비했죠.” _JR
다채로운 공간과 무대 미학의 시너지
늘 검은 선글라스에 중절모 차림으로 공식 행사에 참석하는 프랑스 출신의 40대 아티스트 JR은 세계 각지의 유수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인지도가 높지만 원칙적으로 상업적 브랜드와 협업하지 않는다(교토그라피에서도 후원 브랜드를 두지 않았다). 서울 롯데뮤지엄에서도 대대적인 순회전을 가졌던 그가 교토그라피 2025의 프리뷰가 열린 4월 11일 아침 교토역에 나타났다. 세계와 소통하는 글로벌 사진 축제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현지 시민들과의 협업을 전격 공개하려고 교토역에 나타난 JR만큼 의미 있는 화제성을 불러일으킬 만한 인물이 또 누가 있을까? 그동안 지구촌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펼쳐온 그는 교토 시민 5백여 명과의 협업을 바탕으로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는 대형 사진 작품을 길게 입힌 벽 앞에서 ‘축제의 서막’을 알렸다.
“누가 됐든 간에 교토에 오는 이들은 (대부분) 교토역을 거치게 됩니다. 바로 여정이 시작하는 곳이지요”라고 소감을 밝힌 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JR 교토역에서 전시를 하게 되어 기쁘다면서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JR은 장 르네Jean René라는 이름의 이니셜이다).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협업을 교토 시민들과 함께한 그의 뜻깊은 결과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과거에 인쇄소로 쓰였던 교토신문 건물을 또 다른 전시 무대로 삼은 JR의 공공 프로젝트를 선보였는데, 이는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이 오래된 건물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뉴욕, 아바나 등 여러 도시에서 현지인들과 교감하며 작업한 협업의 여정이 여느 전시처럼 나열되다가, 마지막에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면 비로소 숨을 헉 들이켜며 탄성을 내지르게 하는 ‘하이라이트’가 나온다. 옛 인쇄소의 육중한 기계들이 자리했던 커다란 공간에 교복을 입은 소녀, 야구복을 입은 소년, 신문을 읽는 중년 남성, 기모노 차림의 여성, 주름 자국이 선연한 노인 등 거대한 ‘사진 조각’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스토리를 읊어주는 자근자근한 음성의 퍼레이드가 울려 퍼진다. 서늘한 공간을 채우는 울림에 절로 압도된다. 단번에 프로젝트의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는 이 공공 프로젝트는 다양한 군상을 반영할 수 있는 시민들을 인터뷰하는 JR의 ‘크로니클’ 시리즈 ‘교토 편’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종이를 사용하는 작업을 해왔지만, (커다란) 인쇄 시설에서 전시하는 건 교토그라피가 처음이에요. 1년 반 전쯤부터 협업을 준비했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이 건물에서 전시하는 마지막 아티스트가 될 예정입니다. JR 팀이 현지의 무대미술(scenography) 팀과 긴밀하고 심도 있는 소통으로 작업했다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전시 디자인의 미학’은 교토그라피의 다른 특장점으로 꼽힌다. 대개 아트 페어나 미술관 전시의 무대 미술감독은 한두 명이 맡아 프로젝트를 이끌지만 교토그라피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시노그라피 팀이 10개가 넘는다(한 시노그라퍼가 두 건의 전시를 맡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참여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토론하면서 그 자체로 예술이라 할 만큼 세심하게 공들여 전시를 연출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담는 전시 공간의 위용으로만 승부할 리는 없다. 교토그라피를 수놓은 각각의 전시는 놀랄 만큼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선사한다. 중남미 지역의 다양한 삶을 카메라로 포착해온 80대 멕시코 작가 그라시엘라 이투르비데(Graciela Iturbide), 아이보리공화국의 인플루언서 출신으로 점차 성장하는 예술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20대 래티티아 키(Laetitia Ky), 오키나와 출신의 작가로 성과 인종을 둘러싼 이슈를 날카롭고 역동적인 렌즈로 담아내온 이시카와 마오(Mao Ishikawa), 유망 작가에게 주어지는 ‘KG+ 셀렉트 어워드’의 지난해 수상자로 농촌에서 생업에 종사해온 부모님을 모델로 등장시키는 대만 작가 히싱유 리우(Hsing-Yu Liu), 팔레스타인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알리는 서정적인 사진 작업을 하는 미국 작가 애덤 루하나(Adam Rouhana), 아일랜드의 사진가이자 음악 프로듀서로 어머니에 얽힌 환상적인 서정시를 이미지로 승화시킨 작업으로 울림을 준 이먼 도일(Eamonn Doyle) 등 저마다의 이야기는 절로 ‘집중’을 부르고 상상과 단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이 있다. 사진 이론가이자 미술 비평가, 소설자인 존 버거의 말처럼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은 것들을 불러낸다.” 이들 몇몇의 스토리텔링은 다음 호에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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