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roll In Venez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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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 2016

글 고성연(베니스 현지 취재)

베니스가 아름다운 고도(古都)가 아니라 현대적인 ‘창조 도시’로 자리매김한 이유
서울대 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의 건축 설계에 참여해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네덜란드의 건축 거장 렘 쿨하우스는 줄리아 포스카리가 쓴 <Elements of Venice>라는 책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저자는 베니스가 영속적인 변혁을 이끌어왔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모더니티(modernity)’의 선두에 자리해온 도시라는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그의 말대로 베니스의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여기에는 이 아름다운 수상 도시가 컨템퍼러리 아트의 보고라는 점도 한몫한다. 현대적인 아트 도시로 거듭난 베니스의 흥미로운 면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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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도시 가운데 파리 다음으로 이 물의 도시를 사랑한다. 난 베네치아에서 태어나고 싶었다.” 프랑스의 지성 미셸 드 몽테뉴는 <수상록>에 이렇게 적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흐르는 운하, 유유히 떠다니는 곤돌라, 미로 같은 골목들, 그리고 산 마르코 광장의 핑크빛 두칼레 궁전… 베니스에 도착해 물 위에 떠 있는 이 매혹적인 도시의 자태가 시야에 서서히 들어올 때의 묘한 느낌, 어쩌면 충격적일 수도 있는 그 순간을 경험해봤다면 몽테뉴의 생각에 기꺼이 동의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이탈리아인은 말했다. “베니스는 정말 특별하지만 사는 데는 ‘희생’을 치러야 해요. 정말로 사랑스러운 도시이지만 사실 물건을 옮기는 따위의 일상적인 일을 할 때는 물길과 좁은 골목이 뭐 그리 편하겠어요.” 그렇다. 대중 교통수단인 수상 버스는 항시 관광객으로 차 있고, 수상 택시는 ‘택시’라기엔 몹시 비싸다. 그래서 본섬을 떠나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인근 섬 리도(Lido)로 이주하는 이들도 많다고 그녀는 설명했다(산 마르코 광장에서 멀지 않은 리도 섬은 자동차와 백사장, 널찍한 도로가 있어서일까. 뭔가 여유로움이 더 묻어난다).


대지미술이 따로 없다, 물길과 정원 속에 펼쳐지는 ‘휴식 같은’ 비엔날레

그래도 베니스는 많은 이들의 로망이다. 웬만한 불편함도 감수할 만큼 묘하게 분위기가 유혹적이다. 그것도 양파 껍질처럼 다채로운 매력이다. 아드리아 해를 낀 이 항구 도시의 별칭만 해도 ‘가면의 도시’, 사랑의 도시’, ‘곤돌라의 도시’ 등 다양하지 않은가. 하지만 몇 번을 방문해도 베니스가 지겹지 않은 이유가 고전적인 풍경과 낭만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콘텐츠’가 계속 도시를 물들이고 있다는 점이 큰 작용을 하지 않나 싶다. 특히 컨템퍼러리 아트를 빼놓을 수 없다. 수준 높은 현대 미술과 건축, 영화 같은 문화 콘텐츠가 융합적으로 도시에 우아하고도 역동적인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그래서 ‘아트 산책’을 하노라면 베니스가 절대로 과거의 영광에만 기대는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베니스에는 1백 년 넘은 역사와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비엔날레(Biennale)가 있다. 홀수 해마다 국제 미술전인 아트 비엔날레가, 짝수 해에는 건축 비엔날레가 열린다. 올해는 지난 5월 말부터 시작된 건축 비엔날레가 오는 11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영구 전시장인 비엔날레 장소는 아트홀릭이 아니어도 반할 만큼 근사하다. 물길 따라 펼쳐진, 숲 속 휴양지 같은 느낌을 주는, 그 자체로 ‘예술’이다. 전시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옛 조선소 건물을 활용해 대형 기획전이 열리는 ‘아르세날레(Arsenale)’, 또 하나는 녹음 짙은 정원 속에 국가별로 전용관을 둔 ‘자르디니(Giardini, 실제로 ‘정원’이란 뜻)’다. 올해는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를 받은 칠레 출신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가 총감독을 맡아 ‘전선에서 알리다(Reporting from the Front)’라는 주제로 아르세날레를 수놓았다. 전쟁과 난민, 경제 위기, 재생, 사회적 건축… 모형과 도면으로 둘러싸인 건축전은 자칫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해석과 해결책을 내놓았는지 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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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 of the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Italy, 2014

Interior of the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Italy,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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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Giardino Levi

2008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Giardino Le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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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미학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산 마르코 광장 맞은편에 ‘살루테(Salute)’라는 수상 버스 정거장이 있다. 베니스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바로 찾아갈 수 있는 역이다. 이 고아한 자태의 대성당과 나란히 멀리서 보면 삼각형의 실루엣을 이루는 장소가 있다. 바로 2009년 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을 연 현대미술관 푼타 델라 도가나이다. 도가나(dogana)는 이탈리어어로 ‘세관’이란 뜻으로, 실제로 이 건물은 15세기 베니스의 세관이었다고 한다. 아트는 최고의 럭셔리라는 말도 있지만, 미술관 건축 프로젝트야말로 진정한 럭셔리가 아닐까 싶다. 이 대형 프로젝트를 감행한 인물은 프랑스의 부호 프랑수아 피노 회장. 세계적인 미술 경매 업체 크리스티를 소유하고 있을뿐더러 구찌, 보테가 베네타, 발렌시아가 등 유수 럭셔리 브랜드들을 거느린 케링(Kering) 그룹의 수장이다. 엄청난 아트 애호가이자 컬렉터인 피노 회장은 세계적인 스타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건물 레노베이션 비용만 수백억 원을 들여 이 낡은 공간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육중한 나무와 노출 콘크리트의 조화가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이 미술관은 안도 다다오다운 탁월한 공간의 미학과 구성, 그리고 베니스 특유의 서정적인 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아치를 그리는 창들 사이로 시원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작품들을 보노라면 어째서 미술을 럭셔리의 최고봉이라고 하는지 새삼 공감하게 될 따름. 작은 전람회라는 뜻을 지닌 <아크로카제(Accrochage)>라는 전시가 11월 20일까지 계속되는데 방대한 피노 컬렉션에 포함된 이래 이제껏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작품들을 모아놓은 전시로, 미니멀리즘과 비움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는 공통분모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관람자에게 공간의 여유를 선사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주기 위함이 기획 의도 가운데 하나라는데, 실제로 탁 트인 분위기 속에서 뭔가 편안한 개방성이 묻어난다


현대미술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

사실 베니스를 무대로 한 피노 회장의 아트 사랑은 더 일찍 싹텄다. 베니스시로부터 인수한 18세기 궁전 팔라초 그라시를 리모델링해 2006년 현대미술의 정수를 담은 장소로 꽃피우게 했기 때문이다. 궁전인 만큼 고전적인 오라를 뿜어내는 팔라초 그라시의 공간에 실험 정신 가득한 각종 예술 작품이 들어선 모습을 보는 건 상당히 흥미진진한 일이다. 1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이 미술관은 피노 회장의 풍성한 컬렉션을 비롯해 걸출한 큐레이터들이 선보이는 다양한 주제의 전시, 그리고 루돌프 스팅겔, 우르스 피셔 같은 쟁쟁한 현대미술 작가들의 개인전도 열면서 창조적인 아트 도시로서 베니스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 톡톡히 했다. 제프 쿤스의 커다란 강아지 조각, 주방용품을 재료로 만든 수보드 굽타의 해골 작품 등을 운하가 흐르는 미술관 야외에 전시해 화제가 된 것도 팔라초 그라시였다. 2009년 피노 회장의 컬렉션만으로 꾸민 대형 기획전 <매핑 더 스튜디오(Mapping the Studio)>는 당시 개관한 푼타 델라 도가나와 팔라초 그라시에서 동시에 장기간 진행되면서 ‘피노만의 비엔날레가 펼쳐지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현재 팔라초 그라시에서는 ‘회화의 연금술사’로 불리기도 하는 신표현주의 예술가 시그마르 폴케(Sigmar Polke, 1941~2010)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오는 11월 16일까지). 폴케는 폴란드 출신의 독일 화가로 전통 회화 기법이나 재료를 부정하고 특정한 양식에 종속되기를 거부한 혁신가로 대중매체와 영화, 과학적 영상 기술에서 채택한 기본 이미지들을 의도적으로 변형하거나 가정용품, 페인트, 래커 등과 혼합하기도 했다. 상파울루비엔날레 회화상 수상(1975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1986년)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폴케의 작품들, 특히 대형 작품들을 대리석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팔라초 그라시의 우아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설적인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눈부신 아트 저장소

아트를 잘 몰라도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은 웬만하면 들어보았을 것이다. 뉴욕 구겐하임 뮤지엄 덕분일 텐데, 그 설립자인 솔로몬 구겐하임에게는 현대미술사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조카딸이 있었다. 뛰어난 안목과 아티스트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후원으로 유명한 위대한 컬렉터, 페기 구겐하임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살았지만 유대인이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금세기 갤러리(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를 설립한다. 피카소, 달리, 자코메티, 칸딘스키 등 당시 유럽의 전위적 작가들을 과감히 소개하고 미국 신진 작가들을 후원한 이 갤러리는 미술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고 예술 사조를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례로 허드렛일을 하던 잭슨 폴록을 발굴한 일화가 유명하다. 일찍이 거장이 될 재목을 발굴하는 안목이 탁월했던 그녀는 사생활에서는 사뭇 드라마틱한 삶을 산다(소녀 시절 아버지를 타이태닉호 침몰 사고로 잃었고, 당대의 아티스트들과 불꽃같은 사랑을 했다). 두 번째 남편인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이혼한 뒤 그녀는 금세기 갤러리를 폐점하고 베니스로 가서 여생을 보낸다. 페기가 실제로 살았던 집, 그리고 컬렉션 일부를 토대로 문을 연 곳이 바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PGC, 푼타 델라 도가나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이다. 그녀의 소장품은 사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됐으므로 PGC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니스 분관인 셈이다. 엄청나게 큰 집은 아니기에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거장들의 눈물이 날 만큼 멋진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예컨대 소담스러운 정원에 친근하게 놓인 조각은 자코메티, 브랑쿠시 같은 대가들의 작품들이며 실내에는 그녀의 남편이었던 에른스트의 작품은 물론 파울 클레, 잭슨 폴록, 키리코, 칸딘스키, 몬드리안 등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 집 소장품처럼 보는 게 다소 황송할 정도의 명작들이 놓여 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면 피카소의 디자인 스케치를 반영해 창틀에 설치한 푸른 유리 작품이 반짝이면서 그 사이로 보이는 운하의 경치도 일품이다. 운하 쪽을 향하는 야외 공간에는 마리오 마리니의 ‘도시 천사’가 벌거벗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데, 그 경쾌한 모습은 발걸음을 돌리기 아쉬워지게 만든다. 이 기적 같은 수상 도시를 다시금 찾으리라 마음먹게 만드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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