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with Bosco So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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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06, 2019

글 고성연

멕시코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았지만 북미, 중남미, 유럽 대륙에 걸쳐 네 군데에 작업실을 두고 지구촌을 누비는 아티스트 보스코 소디(Bosco Sodi). 그는 ‘직업적 소명 의식’이나 ‘성공’을 겨냥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영혼과 정신을 보듬기 위한 치유책으로 미술 세계에 입문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명상 같은 행위라고. 그래서 그에게는 ‘과정’이 중요하다. 타고난 색채 감각 덕분이 아닐까 싶은 출중한 색의 스펙트럼을 구사하고, 캔버스에서 뛰노는 듯한 원초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텍스처의 조화는 그 과정의 결과물도 충분히 의미 있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진지하고 강렬하면서도, 치유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작품 세계만큼이나 인간으로서의 매력도 넘치는 코즈모폴리턴 작가 보스코 소디.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부산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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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낯선 풍경이나 공간, 사람을 대하는 경험이 주는 설렘이 좋다고 말한다. 그 낯섦이 조금은 익숙하게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 들면 어쩐지 뿌듯한 경험치가 쌓였다는 우쭐함이 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는 그 ‘낯섦’을 다분히 내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재단해버리는 실수를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낯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일종의 폭력성이 반영된다는 비판은 늘 있어왔다. 어쩌면 ‘무지’보다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라는 식의 어설픈 소화력이 더 문제일 수 있는 이유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예술 작품을 접할 때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느낌’ 가는 대로 하는 감상이 더 좋다. 타지의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에도 시선이 집중되고 마음이 가는 작품이 있기 마련인데, 일단은 어린아이처럼 되도록 순수하게 감상하다가 나중에 그 실체를 차차 알아가는 편이 재미도, 의미도 있지 않나 싶다. 차츰 호감이 쌓여가다가 언젠가 그 작품의 창조자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상당한 행운일 테고 말이다. 보스코 소디(Bosco Sodi)는 바로 그런 운이 작용해 만나게 된 아티스트다. 홍콩의 한 갤러리에서 접한 그의 작품은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눈길을 잡아끌었다. 처음 시선을 두게 된 작품은 꽤 강렬한 단색조의 추상회화였는데, 원래 그림에 있어서는 빨강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취향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흔치 않은 ‘레드’였다. 색상만큼이나 관심의 촉수를 절로 뻗치게 만든 요소는 특유의 ‘질감’이었다. 캔버스 위로 살짝 솟아오른 몽글몽글한 덩어리들은 자신만의 소우주를 수줍은 듯, 하지만 격렬하게 담아내고 있었는데, 뭔가 원시적인 생명력을 분출하는 그의 회화는 분명 그동안 봐오던 단색화와 달랐다. 어떤 평론가는 보스코 소디를 가리켜 ‘화가’라기보다는 ‘물감의 조각가(a sculptor of paint)’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만큼 색조도, 질감도 강한 인상을 주지만 서로를 부담스럽게 만들기보다는 한 몸처럼 잘 어우러진다. 어쨌거나 색과 텍스처의 앙상블이 자아내는 특유의 감성과 에너지는 ‘작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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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첫 개인전, 부산 땅을 밟은 ‘코즈모폴리턴’

그는 멕시코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뉴욕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작가였다. 하지만 뉴욕뿐 아니라 그의 고향 멕시코시티, 여행자들의 천국으로 일컬어지는 멕시코의 또 다른 도시 오악사카(Oaxaca), 그리고 바르셀로나에도 작업실을 두고, 지구촌 곳곳에서 열리는 전시를 위해 ‘발품’깨나 팔 수밖에 없는 동선을 지닌 작가였다. 1970년생으로 한국 나이로는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세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기에, 때때로 여행길에 가족을 동반하기도 한다. 홍콩에 이어 지난봄 우연히 그의 작품 한 점을 부산 조현화랑에서도 접
했는데, 바로 그 공간에서 올가을 전시가 열리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보스코 소디가 한국에서 갖는 첫 개인전. 먼 길을 온 그를 만나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조현화랑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의 개인전(10월 10일~12월 8일)에서는 대형 흑백 회화가 주로 전시되고 있다. 컬러풀한 작품은 앙증맞은 캔버스 크기의 소품만 걸려 있을 뿐이다. 무채색이 주를 이루지만 특유의 질감이 뿜어내는 강렬함은 여전하다. 특히 바닥에 여기저기 놓인, 진흙을 구워 동그랗게 빚은 ‘클레이 큐브’ 작품들과의 조화가 공간에 무게감과 생동감을 동시에 불어넣는 듯하다. 물론 그는 색의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지만, 알고 보니 부산에서의 ‘블랙 & 화이트’ 전시에는 좀 더 개인적인 이유가 반영돼 있었다. “수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기도 하고, 인간의 생사, 육체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죠. 인간의 삶에 흑과 백이 상징하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색과 텍스처의 조합. 특히 안료와 톱밥, 아교, 물을 걸쭉하게 섞어 만드는 재료에서 비롯되는 특유의 질감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저는 처음부터 색과 텍스처 모두에 무게를 두고 싶었어요. 대개 질감을 중시하면 무채색 등 튀지 않는 색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고, 색채주의자는 질감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편이잖아요. 둘을 한데 녹이는 법을 고민하던 차에 조르주 브라크 전시를 보러 갔다가 ‘영감’을 얻었어요.” 그의 설명인즉, 브라크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도록을 샀는데, 책 말미
에 톱밥을 유화에 넣어 약간의 질감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에 ‘아, 이거다’ 싶었다는 것. “유화물감에 톱밥을 넣어보니 실제로 질감을 좀 불어넣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실수로 물감 통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통째로 바닥에 쏟아졌는데, 일단 치우지 않고 놔뒀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약간의 금(crack)이 간 상태가 됐는데, 그 모습이 정말로 아름다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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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를 위한 ‘테라피’로 시작한 그림, 글로벌 아티스트로 성장하게 하다

20년 전 일을 회상하면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그는 이 작은 사건을 계기로 ‘실험’을 계속하다가 현재 쓰는 재료의 구성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색상의 경우에는 여행을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샘플’ 안료를 구매하고는 마음 가는 대로 활용한다고. 예컨대 필자가 보고 반한 ‘레드’는 인도에서 발견한 안료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하지만 그와 똑같은 ‘인디안 레드’로 이루어진 작품은 이제 구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5년 전쯤 뉴욕에 무시무시한 허리케인이 몰아쳤을 때 보스코 소디의 스튜디오도 물에 흠뻑 잠겼는데, 이때 인도에서 1톤이나 사 온 빨강 안료도 휩쓸리는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그는 휴대폰으로 당시 침수된 스튜디오의 참상을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다. 온통 붉은 물결로 뒤덮인 실내는 그야말로 작은 ‘홍해’ 같았는데, “이 정도면 거의 장소 특정적 작품을 방불케 한다”라고 위로 섞인 농담을 건네자 덩달아 웃으면서 “무슨 공연 같지 않냐”라고 맞장구쳤다. 그래도 덕분에 그의 작품을 구입하는 컬렉터들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당시 주문을 마친 회화 16점이 망가졌는데(그중 3점은 영국의 슈퍼스타 작가인 데이미언 허스트(DamienHirst)가 주문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사실 마치 ‘의식(ritual)’과도 같은 ‘과정(process)’ 속에서 완성되는 작품 성격상 절대로 똑같은 그림을 다시 그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모두들 이해심 있게 ‘다른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한 것. “작품만이 아니라 작업실에 있는 도구, 재료 등도 다 못쓰게 된 셈이라 한동안은 작업도 할 수 없었는데, 다들 흔쾌히 괜찮다고 이해심을 보여주더라고요.”사실 보스코 소디는 문화 예술계 친구는 많지만, 정식으로 미술을 전공한 적이 없다. 멕시코에서 내로라 하는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주의력 결핍, 난독증 같은 문제 때문에 어머니의 권유로 ‘미술 수업’을 들은 게 전부다. 치유책으로 삼은 미술이기에 그는 화학공학자인 부친의 길을 따라가보려고도 하고, 국제관계학을 배워보기도 했지만, 그 어떤 공부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20대 결혼을 하고 파리에 1년 정도 체류한 적이 있는데, 이때 아티스트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늘 그렇듯 그림을 그렸는데, 표구를 하려고 액자 가게에 맡겼어요. 그런데 나중에 찾으려고 하니까 상점 직원이 ‘당신 그림을 전부 사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그래서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길로 생각하게 됐죠.” 그리하여 그는 당시 예술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던 바르셀로나로 향했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작가 수업을 하게 됐다.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고 10년이 지나 뉴욕으로 터전을 옮겼는데, 이는 작가 커리어로 볼 때 ‘신의 한 수’였다. 뉴욕으로 옮긴 뒤 1년쯤 지나 브롱크스 뮤지엄에서 <판게아(Pangaea)>라는 전시를 개최했는데, 이를 계기로 ‘러브콜’이 쏟아지는 작가로 거듭나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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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동료’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플랫폼을 세우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성공에 그저 도취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엄연한 현실이지만,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미술 시장의 논리에 따라 소위 ‘몸값’이 솟구친 데 대해 편치 않은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일환으로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도덕적 의무’ 같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래서 5년 전 쯤 오악사카에 커다란 아트 센터를 설립했다. 설계는 일본의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가 맡았는데,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 벽과 멕시코 해안 지역에 걸맞는 토속적인 분위기가 어우러진 ‘카사 와비(Casa Wabi)’가 탄생했다. 그의 작업장이자 아티스트를 위한 레지던스 프로그램과 아이들을 위한 창조적인 놀이터로도 쓰이는 커다란 복합 공간이다. 스스로 ‘성공했다’는 표현을 쓰기도 겸연쩍다는 그는 카사 와비에 대해서만큼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플랫폼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이곳에 머무는 이들은 창조적 자유를 보장받지만, 반드시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워크숍에 참가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지역 주민들은 미술 같은 건 전혀 모르는 저임금 노동자들. “제가 받은 축복을 돌려주는 방법을 고민해봤을 때, 우선 떠오르는 건 내 조국, 내 고향 사람들이었고, 그다음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아티스트들이었어요.” 자신이여러모로 ‘행운아’임을 잘 아는 그의 ‘축복 나누기’가 부디 유행처럼 전파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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