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해야 알 수 있는 세계, 필립 파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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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 2024

글 김민서

Exhibition in Focus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시대. 전 세계 거의 모든 기업이 이 초현실적인 기술을 어떻게 접목할지 경쟁하고 있다. 관련 기업의 주식은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산업을 넘나들며 ‘AI’와 ‘챗GPT’란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AI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만드는 등 인간만의 ‘능력’이라 여겨온 창작의 영역까지 빠르게 손을 뻗었다. 이런 열기(?) 때문일까. 지난 2월 26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프랑스 예술가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의 전시 기자 간담회에서는 인공두뇌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인공두뇌는 단지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라며 스스로 선을 그었듯 그의 작품을 그저 인공지능의 영역에 가둬서는 안 된다. 4개월에 걸쳐 펼쳐질 전시 는 최첨단 기술을 요리하며 스펙트럼을 확장해나가는 필립 파레노의 예술 세계를 다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는 7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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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는 손에 잡히는 완성형 형태가 있는 작업을 추구하지 않는다. 2016년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전시 <Anywhen>에서는 위아래로 거대한 스크린, 공중을 떠다니는 물고기 풍선, 신비로운 영상과 음향으로 ‘터빈홀’을 채웠고, 관람객은 바닥에 눕거나 풍선들 사이를 오가며 공간을 경험하고 때로는 공간의 일부가 되어 작품을 함께 완성해갔다. 그는 조명, 영상, 음향, 인공지능, 퍼포먼스 등 다양한 요소를 도구 삼아 전시장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작품이 스스로 변화하고 움직이게 한다. 솔직히 아주 기발하거나 이전에는 보지 못한 획기적인 형태의 예술은 아니다. 현대미술에는 퍼포먼스로, 사운드로, 빛으로, 영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매체를 섞어 작업하는 예술가가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의 작품 세계가 지닌 독보성은 무엇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부터 최근까지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를 망라한 서베이 전시인 리움미술관의 <보이스(VOICES)>가 그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미술관
‘아시아 최대 개인전’이라는 수식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미술관 내·외부 전관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밖’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동안 미술관의 상징처럼 자리를 지켜온 애니시 커푸어의 작품 ‘큰 나무와 눈(Tall Tree and the Eye)’ 대신 13.6m 높이의 타워가 서 있는 야외 전시 공간. 마치 놀이공원의 ‘번지드롭’같이 생긴 이 작품의 이름은 ‘막(膜)’. 이상한 소음을 내며 위아래로 움직이는 이 타워는 42개 센서로 주변의 기온, 습도, 풍량, 소리, 진동 등 환경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리고 이 데이터는 미술관 안으로 송출되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등 미술관을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유기체로 만든다. ‘막’은 작업의 소재가 되는 에너지원을 모아 미술관 내부로 공급하는 일종의 허브인 셈이다. 전시장 홀의 스크린에서 2개의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타워에서 전송한 데이터로 만든 작품이다. 왼쪽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풍경 영상이 거의 정지한 듯 더디게 움직이고, 오른쪽 영상은 외부 환경 데이터를 반영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한편 ‘막’은 미술관 지하 갤러리에도 작품의 에너지원을 보낸다. 수십 개의 말풍선이 떠 있는 공간에서 반짝이는 할로겐 전구, 규칙 없이 움직이는 벽 등 계속 변화하고 움직이는 작품 ‘차양’은 이곳이 바깥 ‘막’의 세계와 연결된 공간임을 보여준다. 필립 파레노는 이를 통해 ‘균열’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미술관은 닫혀 있는 공간이고 외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값비싼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온도와 습도까지 조절합니다. 거기에 틈을 내고 싶었습니다.” ‘보이스’라는 전시명이 말해주듯 전시장 안에는 오묘한 사운드가 끊임없이 귀를 자극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 운율을 활용해 새로운 목소리를 창조했다. 이 목소리는 동사-주어-목적어 순의 체계로 이루어진 새로운 언어 ‘∂A(델타에이)’를 습득하는데, 전시장 한편 ‘세상 밖 어디든’이란 영상 작품 속 캐릭터 ‘안리’가 배두나의 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말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에도 외부 ‘막’이 보내는 데이터가 활용된다.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인식
모든 작품이 바깥 ‘막’에 의존하는 건 아니다. 전시장 곳곳에 놓인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은 실제 눈으로 만들어 점점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녹으며 시간의 흐름을 각인시키는데, 작품 보호차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하는 미술관에서 눈사람이 녹아내리는 풍경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눈사람이 녹아 없어지면 빙수기로 새로운 눈사람을 내놓는다). 또 창밖에 놓인 평범한 크리스마스트리 모습의 작품 ‘혼란의 시기: 일 년 중 십일 개월은 예술 작품이고 12월은 크리스마스’는 이름 그대로 시간에 관한 이해를 다른 방식으로 확장한다. 작가는 전시장을 해 질 무렵 석양빛 같은 색상으로 감싸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역시 2002년에 선보인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이란 작품이다. 주황빛으로 물든 공간에는 물고기 모양의 헬륨 풍선이 관람객들 사이로 자유롭게 유영한다. 2018년 베를린의 마틴 그로우피스 바우에서 선보인 ‘내 방은 또 다른 어항(My Room is Another Fishbowl)’ 현장을 재현한 모습이다. 거대한 어항에 갇힌 물고기처럼 우리도 관찰당하는 입장이 되고, 그 안에서 나의 존재와 주변 환경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생경한 경험으로서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작가의 또 다른 주특기다. 지난 수년간 리움미술관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가 여럿 열렸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건 재작년 이안 쳉(Ian Cheng)의 전시였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예술도 그 자체로 가치 있으나, 다가오는 시대에 우리가 기대하는 천재 아티스트는 이안 쳉 같은 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뇌리에 깊이 남았다.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고, 인간이 인지하는 시공간의 감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필립 파레노와 공통점이 많기도 하다. 기술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은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건 고도의 테크닉이 아니라, 가치와 아름다움의 유무를 ‘판단’하는 능력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것 하나 정지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에 관객을 초대하고, 이곳에서 벌어지는 순간과 과정이 작품을 만들고 이 미술관을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필립 파레노. 당신은 어떻게 감상하겠는가? “그의 작품은 설명하려면 할수록 단조로워진다(flat)”는 김성원 부관장의 말처럼 직접 공간의 일부가 되어 경험해야만 비로소 이해의 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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