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18 SUMMER SPECIAL] Eileen Gray & Le Corbu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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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4, 2018

글 고성연

1세기가 지나도 사랑받는 테이블과 의자를 디자인한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 아일랜드 출신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런던과 파리에서 공부하고 일본 장인에게 옻칠 작업을 배워 자신의 숍을 열었다가 가구 디자인, 건축으로 영역을 확장한 인물이다. 그녀의 고객은 사교계 명사들이었던지라 대중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없었다가 말년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작 본인은 자신감이 부족한 편이었지만, 건축계 거목 르 코르뷔지에의 질투를 사기도 한 ‘세기의 재능’이 담긴 남프랑스 빌라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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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 1878~1976)에 대해 처음 들은 건 10년 전인 2008년, 영국의 스타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을 만났을 때였다. 필자의 런던 유학 시절 인터뷰했던 재스퍼 모리슨은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한 중대한 계기 중 하나가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아일린 그레이라고 했다. 10대 시절, 런던에서 열린 아일린 그레이 회고전을 보고는 단번에 반했다고. 높낮이 조절이 가능한 명품 사이드 테이블로 20세기 디자인 아이콘으로 꼽히는 ‘테이블 E-1027’, 그리고 근대 건축의 원리를 스위스 출신의 건축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에 앞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빌라 E-1027’이 바로 그녀의 대표작이다. 2009년 파리에서 개최된 크리스티 경매에서 2천1백90만유로에 낙찰돼 20세기 가구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운 빈티지 안락의자 ‘드래건 체어(Dragon Chair)’도 아일린 그레이의 작품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72년 <Eileen Gray: Pioneer of Design>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가 런던에서 열렸을 당시에 주인공인 아일린 그레이는 90대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그녀는 런던 회고전이 열린 지 4년 뒤 작고했다). 그렇지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탄탄대로를 달리다가 생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피날레처럼 회고전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이 시기 전까지만 해도 아일린 그레이라는 이름은 디자인·건축계에서 묻혀 있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반세기 가까이나 말이다. 런던 전시가 열린 이듬해부터야 그녀가 디자인한 가구들이 재생산되기 시작했다. 작품 수가 많지는 않지만 20세기 디자인·건축계에서 나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고 칭송받는 아일린 그레이의 업적이 뒤늦게야 부각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유럽 문화 예술계에서는 꽤 잘 알려진 얘기인데, 그 배경에는 그레이와 친분이 있었던 르 코르뷔지에의 질투 어린 경쟁 심리가 상당히 작용했다. 남프랑스의 로크브륀-카프-마르탱(Roquebrune-Cap-Martin)을 무대로 전개되는 스토리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E-1027,
단순히 전망 좋은 빌라가 아닌 이유
눈부시게 아름다운 푸른빛 지중해 위로 솜사탕처럼 부드럽게 녹아드는 해사한 햇살. 파도와 공기의 숨결을 마치 음악처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 영혼을 정화시켜줄 듯한 이 경이로운 풍광을 가만히 응시하며 해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 뒤로는 짙은 녹음과 바위가 산자락이 펼쳐져 있다. 그중 고혹적인 푸른빛을 뿜어내는 바다를 향해 돌출한 곶 위에 자리 잡은 장방형의 하얀색 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아일린 그레이가 몸소 설계하고 실내에 들일 가구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고 디자인한 ‘빌라 E-1027’이다. 남프랑스에는 워낙 크고 작은 아름다운 도시가 즐비하지만, 모나코를 이웃에 둔 로크브륀-카프-마르탱 역시 빼어난 경치와 독특한 매력을 자랑한다. 아일랜드 귀족 출신으로 런던 등에서 디자인을 공부했고, 이미 파리에서 가구 디자이너로 풍부한 경력을 쌓은 아일린 그레이는 건축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젊은 연인이던 장 바도비치(Jean Badovici)의 제안으로 이 집을 직접 설계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고독과 명상을 누릴 수 있는 그들만의 ‘작은 피난처’ 같은 보금자리를 원했다고. ‘E-1027’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도 두 사람을 위한 공간임을 함축하기 위해 짜 맞춘 것이다. E는 아일린 그레이의 E, 10은 알파벳의 10번째 글자인 ‘J’(Jean), 2는 바도비치의 B, 7은 그레이의 G를 각각 뜻한다. 1926년부터 3년에 걸친 공사가 끝난 시점이 1929년. E-1027은 건축 잡지의 편집장이던 장 바도비치가 자신의 잡지에 소개하면서 은근히 화제작으로 떠오른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필로티), 평평한 지붕, 내부를 벽으로 나누지 않은 오픈 플랜, 루프 테라스…. 이 순백색 저택은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 건축 5요소를 야무지게 담아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부아(1931년 완공)를 비롯해 근대건축을 대표하는 주택을 다 따돌리고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이다.
최소한으로, 그러나
풍부하게 공간을 채운 그레이표 가구들
E-1027 빌라는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물 외관도 아름답지만, 실내 공간을 보면 그 진가가 확연히 드러난다. 아일린 그레이가 유리창 안으로 들어오는 지중해 내음을 머금은 햇살이 공간을 감싸는 특유의 따스하고 편안한 분위기도 그렇지만, 그녀가 몸소 디자인한 가구와 소품의 앙상블이 멋지다. 1920~1930년대에 파리에서 활동한 디자이너답게 아르 데코 스타일이 묻어나지만 ‘최소한의 공간’을 활용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실용성, 다용성, 간결함 같은 측면을 많이 반영했다. 그래서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캠핑 스타일(campling style)’을 의도했다는 이 집의 가구 컬렉션에는 접이식 의자와 테이블, 길게 누워 낮잠을 청할 수 있는 데이베드, 표면이 코르크로 이루어져 다루기 쉬운 티 트롤리, 이동식 파티션과 스크린 등등이 있다. 이 중 상판 높이를 10단계로 조절할 수 있고 테이블 다리를 침대나 소파 밑에 넣어 쓸 수도 있는 기능성 뛰어난 사이드 테이블 ‘테이블 E-1027’이 오늘날에도 애호가를 많이 거느린 대표작이다. 그런데 아일린 그레이는 완성된 집에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1931년 장 바도비치와 헤어지면서 로크브륀-카프-마르탱을 떠났기 때문이다(외국인 신분이던 그레이는 E-1027을 설계할 때 대지를 사면서 ‘클라이언트’ 이름으로 장 바도비치를 내세웠다고 한다). 그녀는 프렌치 리비에라 지역의 또 다른 도시 망통(Menton) 인근에 새집 ‘탕프 아 펠라(Tempe a` Pailla)’를 지었고, 이것이 실제로 설계에 옮긴 두 번째이자 마지막 건축 작품이었다. <명품 가구의 비밀>이라는 책의 저자인 조 스즈키는 “E-1027이 완성됐을 당시 그레이는 이미 쉰 살이었고, 열네댓 살 어린 바도비치는 한창 놀기 좋아하는 나이였다”면서 “하지만 아일린 그레이가 가구 디자이너로서 진정으로 빛난 때는 98년의 생애를 통틀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천진난만하게 E-1027 빌라를 설계하고 가구를 디자인한 시기였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기심과 질투심에 묻혀 잊힐 뻔했던 반세기
그렇다면 르 코르뷔지에와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일린 그레이는 장 바도비치와 친분이 깊었던 르 코르뷔지에와 처음에는 가깝게 지냈고, 자신이 나이는 더 많았지만 그를 멘토처럼 여기기도 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 자주 들렀는데, E-1027 빌라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고, 독학으로 건축을 공부한 아일린 그레이의 설계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모나코 출신인 아내와 함께 1938년과 1939년에 이 빌라에 묵었는데, 이때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 만다. 아일린 그레이의 허락도 없이 새하얀 외벽에 7점 정도의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은 것. 그레이는 대노했다. 그녀는 벽에 어떤 장식적인 그림도 달거나 그려 넣기를 원치 않았을뿐더러, 성적인 메시지를 담은 듯 벌거벗은 여자들을 그린 르 코르뷔지에의 벽화는 전혀 자신의 취향도 아니었다. 건축 비평가 로완 무어는 이 행위를 가리켜 “오줌을 싸 영역 표시를 하는 개처럼, 지배권을 주장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렇게 르 코르뷔지에와 연을 끊게 됐는데, 이상하게도 이후로 더 손해를 입은 건 이 사건의 피해자인 아일린 그레이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E-1027 빌라 입구에 그린 벽화 옆에서 자신의 아내와 찍은 사진을 잡지와 책에 게재했고, 아일린 그레이의 이름은 꺼내지도 않아 많은 이들이 르 코르뷔지에가 이 집의 설계자라고 오인했다. 오늘날 디자인 역사가들은 이 생태계의 거물이 휘두른 권력에 짓눌려 아일린 그레이가 공식 무대에서 사라진 것일지도 모른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심지어 그녀의 연인이던 장 바도비치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1929년 빌라를 완공했을 당시 잡지에 소개했을 때, 자신을 공동 건축가로 나란히 기재했으며, 나중에도 르 코르뷔지에의 말을 공개적으로 바로잡지 않았다. 아일린 그레이가 E-1027를 설계했다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된 건 1979년. 그녀의 사후 3년 뒤다.
모든 감정의 파편을 품은 채 반짝이는 지중해
바도비치는 1956년 세상을 떠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망가진 E-1027 빌라는 경매로 나왔는데, 이때 재클린 오나시스와 재혼한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사려고 나섰다는 후일담이 있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경매계 인맥을 활용해 스위스 출신의  재력가 여성이 낙찰자가 되고, 자신은 관리자가 되는 식으로 이 집에 대한 애착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어쨌거나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E-1027 근처에서 남은 생을 살아갔다. 그가 생의 후반부를 보낸 그 유명한 4평짜리 오두막인 ‘카바농(Le Cabanon)’을 1952년에 지었는데, 이 오두막이 바로 E-1027 빌라 뒤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쥔 르 코르뷔지에가 여름마다 4평 오두막에 가서 지내면서 소박한 말년을 보낸 것은 맞다. 하지만 실제로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 가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근처에 캠핑 시설을 설계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오두막 지을 땅을 제공한 레스토랑에서 항상 식사를 했고, 작은 작업실을 두고 있었으며, E-1027 밑자락에 있는 바다에서 매일같이 수영을 즐겼다(그는 이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앞마당처럼 시원하게 펼쳐진 지중해를 벗 삼아 살았는데, 4평이 뭐 그리 대수였겠는가. 일각에서는 르 코르뷔지에가 찌질함을 버리지 못하고 E-1027의 존재감을 ‘희석’시키거나 본인의 영토에 포함시키고자 이 오두막을 지은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하지만, 그 진의를 누가 알랴? 그저 이 일대의 평화로움을 포함한 모든 것이 좋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역동적이고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전반에 시대를 앞서갔던 위대한 크리에이터들의 우정과 사랑, 질투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역사적인 두 건물. 지금은 르 코르뷔지에의 오두막(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도, 아일린 그레이의 빌라도 프랑스 공공 기관 소유로 ‘역사적 자산’이자 ‘문화 상품’으로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 모든 감정의 파편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듯,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지중해는 이곳을 찾는 방문객을 아주 평온하게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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