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Luxury Br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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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고성연

요즘 아트와 럭셔리 브랜드의 유대는 진한 ‘공생 관계’ 로 발전하고 있다. 사실 소수이기는 해도 전통 있는 럭셔리 브랜드들은 예술성을 추구해왔다. 1세기도 더 전에 당시의 ‘아트’라고 할 수 있는 장인 정신 충만한 공예 예술이 그들의 뿌리이니 말이다. 영리한 브랜드들의 아트 경영을 살짝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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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일찍부터 “돈은 사회의 언어이고, 럭셔리는 그 문법”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사람들이 흔히 럭셔리를 ‘돈’으로 한정 짓지만 실상 ‘가격’만으로 럭셔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뜻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럭셔리 이론가들이 자주 하는 비유를 빌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언어를 습득했다고 해도 문법이나 어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결코 풍부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최근에는 ‘럭셔리의 문법은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아트 사랑’이 지극하다. 아트 바젤 같은 대형 아트 페어에 가든, 베르사유 궁전 같은 찬란한 문화 유적지에 가든 럭셔리 브랜드들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전시를 후원하는 정도의 사례야 다반사고, 예술 분야의 상을 제정해 아티스트를 지원하기도 하고, 전통 있는 기업이라면 자사의 브랜드 아카이브를 소재로 꽤나 괜찮은 전시를 하기도 한다(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 아예 아트를 관장하는 재단을 설립하기도 한다.
갈수록 끈끈해지는 럭셔리 브랜드와 예술의 ‘유대’는 어떤 성격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브랜드 미학을 정립하고 홍보하기 위한 마케팅 차원의 전략적 승부수? 기업의 메세나 활동? 럭셔리 기업을 소유한 억만장자들의 자선 행위?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아마도 어느 정도는 맞는 해석일 것 같다. 하지만 요즘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아트에 대한 집념 어린 투자와 열정을 보노라면 그 둘의 관계에는 ‘공생(symbiosis)’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갤러리도, 작가도, 기업도 브랜딩이 필요하다
아트에 ‘브랜드’가 끼어들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주로 ‘돈 냄새’가 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패션 디자인은 대놓고 상업적이지만 예술은 순수라는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 물론 ‘영혼의 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예술 자체는 디자인처럼 처음부터 기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업적인 용도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 점이 굉장한 매력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예술을 둘러싼 세계, 아니 인간을 둘러싼 상업적인 논리에서 완전히 배제된 적은 거의 없었다. 예술가에게는 그 이유가 예술을 마음껏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일례로, 피카소는 세기의 화가라는 수식에 어울리는 재능도 지녔지만 인맥 쌓기와 관리를 잘하는, 사회적 지능(SQ)이 뛰어난 덕분에 생전에도 막대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그는 상류층 인사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화가, 화상, 시인 등과 폭넓은 유대 관계를 가지면서 퍼스널 브랜딩을 한 셈이다. 피카소는 “예술가도 성공할 필요가 있다.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작품을 지속적으로 창작해나가기 위해서”라고 말한 적도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기업도 브랜딩을 하고, 갤러리도 브랜딩을 하고, 작가도 브랜딩을 한다(소속 갤러리에서 해주든 본인이 하든). 그런데 ‘돈’과 ‘브랜딩’이 넘쳐나는 아트 세상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벌지 못한다. 전 세계 주요 갤러리들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수익성 있는 갤러리는 블루칩 작가들을 보유한 소수에 불과하다. 30%는 적자에 허덕이고 55%는 연간 수억원의 수익을 손에 쥘까 말까 한 정도로 버티고 있다는 게 실상이다. ‘쏠림 현상’이 심한 아티스트들의 세계는 두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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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브랜드와 아트의 진한 공생 관계
그러므로 럭셔리 브랜드들의 아트 사랑이 더해가는 현상을 미술계에서는 환영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보인다. 공간도 제공하고 자금도 투자하고 브랜딩도 ‘기막히게’ 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기업들은 예술 자체로 돈을 버는 게 아니므로 덜 계산적(?)이고 신인에게도 관대한 편이라는 의견도 많다. 그래서 아티스트들은 브랜드 협업에 호의적인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려의 여지가 있다면, 그건 브랜드의 개입으로 작가들이 예술적 진실성을 타협하거나 저버리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또 실제로 종종 생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브랜드의 예술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성공 요소로 ‘독립성’을 꼽곤 한다. 어떤 일을 진행하든 이래라저래라 참견하지 않는 태도는 물론 그 DNA를 유지하기 위한 구조적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브랜드 전시나 컬래버레이션 상품 프로젝트 같은 경우 아티스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서로가 ‘윈윈’하는 시너지를 내는 게 결코 만만치는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럭셔리 브랜드들의 궁극적인 종착역은 결국 ‘소비자’가 아니라 ‘대중’을 위한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공간을 마련하는 일인 것 같다. 이러한 공간이야말로 작가들에게는 기회를 선사하고, 대중에게는 값비싼 콘텐츠를 즐기도록 해주는 진정한 의미의 ‘공유’일 수 있다. 패션 산업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독립적인 성격의 공간인 만큼 지극히 유행을 타는 상품을 마치 예술 작품처럼 포장해 파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곳이고 말이다(럭셔리 브랜드 그룹의 예술 후원 재단은 거의 독립적인 경영 체제로 운영된다). 또 브랜드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브랜드 이미지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므로 영리한 선택이기도 하다(대신 막대한 공을 들여야 하지만). 이는 최근 마케터들이 주장하고 있는 ‘비과시적 소비(inconspicuous consumption)’라는 흐름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요즘 엘리트 소비자들은 “나 브랜드요”라고 외치는 듯한 노골적인 브랜드 사치품보다는 눈에 확 띄지 않은 ‘은근한’ 럭셔리 제품을 선호한다는 주장이다. 브랜드 미술관이라는 공간형 콘텐츠도 노골적인 과시 없이 우아함을 누리고 발산할 수 있는 ‘미묘한 럭셔리’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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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자격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미술관이나 전시 공간을 운영하는 럭셔리 브랜드들의 색깔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현대미술을 후원하는 최초의 프랑스 기업 까르띠에의 30년 역사를 자랑하는 까르띠에 재단은 정통성이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위적’이라고 할 만큼 참신한 카리스마를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수학을 주제로 삼는다든지 장 폴 고티에의 파격적인 설치라든지, 최근에는 콩고 미술을 소개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각과 풍부한 스토리텔링으로 가장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이 비통은 ‘제왕적 기개’가 돋보인다. 일찍이 무라카미 다카시와 구사마 야요이 등 작가들과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주도해온 브랜드답게 예술을 가장 대중적인 감각으로 화려하게 펼쳐 보이는 법을 아는 듯한 이 브랜드는 최근 루이 비통 재단미술관으로 그 위용을 제대로 뽐내고 있다.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경우에는 생태 공원 오아시 제냐를 조성한 브랜드답게 친환경적인 예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또 구찌와 보테가 베네타 등을 거느린 케링 그룹의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은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원을 쏟아내고 있다. 마틴 스코세이즈 감독이 이끄는 필름 파운데이션과 손잡고 고전 영화가 남긴 문화 예술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도 발벗고 나설 정도.
에르메스는 미술관 같은 공간을 두고 소장품을 모으지 않는다. 예술 작품이나 공간을 사는 대신 ‘인적 자원’을 후원한다는 방침이다. 에르메스 코리아도 미술계에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는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운영하지만 서울 도산공원에 위치한 메종 내에 전시 공간인 작은 아틀리에만 꾸리고 있다. 이 같은 ‘은근한’ 후원 방식은 브랜드나 로고를 눈에 띄게 강조하지 않는 ‘비과시적 브랜드’ 의 대표 주자인 에르메스의 이미지와도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올봄 밀라노에 문을 연 프라다 재단 미술관도 이 혁신적이고 반항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브랜드의 주인을 쏙 빼닮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미우치다 프라다는 젊은이들에게 문화의 매력에 빠질 수 있는 아이디어의 장을 강조해왔는데, 바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양조 공장 부지에 세운 이 미술관이 딱 그렇다. ‘아름다운 오브제’ 대신 ‘빠르고, 신선하고, 실험적인 곳’을 지향했다고. 몇몇 럭셔리 브랜드의 아트 경영은 영리하기도 하지만 진정성이라는 차원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저마다 확실한 색깔과 유연성을 보여주면서 단지 돈만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지점에 접근하고 있다. 아마도 그건 억지로 예술적인 덧칠을 해 포장하기보다는 브랜드 정체성에 이미 예술의 핵심인 창조성이 스며들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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