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evolves in virtual wor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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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6, 2020

글 고성연

재난 속 미술 생태계의 디지털 해법


지구촌을 날벼락같이 내리친 코로나19 때문에 세상에 많은 변화가 휘몰아치고 있다. 이동과 이주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21세기지만 ‘원거리’ 가 불가피한 일상이 됐고, 친구들과의 여행을 꿈꾸기보다는 ‘비대면(untact)’ 활동이 당연시되며, 세계화는커녕 지역화가 ‘넥스트 노멀’로 꼽히고 있다. 비즈니스 생태계에서는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이 확인되기도 했고, 정치적으로도 국수주의적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문화 예술계에서는 스타 뮤지션들의 온라인 릴레이 콘서트처럼 위기 속 ‘하나 됨’을 외치고 인간애를 바탕으로 모든 장벽을 부수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특히 시대를 비추는 거울임을 자처하는 현대미술계의 최근 행보는 자못 흥미롭다. 초기에는 전시 공간을 닫아야 했던 탓에 움츠러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제는 디지털 플랫폼과 도구를 동원해 반전을 꾀하는 모습도 눈에 많이 띈다. 기획자나 아티스트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영감이, 문화 소비자에게는 참신한 위로와 즐길 거리가 되는 작금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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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들은 자주 방문하고, 심지어 빈번히 같은 공간을 찾아도 늘 시간이 부족한 듯한 데다 지겹지가 않다. 아마도 문화 예술 분야의 전시 콘텐츠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물론 이는 수시로 바뀌는 콘텐츠와 더불어 공간 자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과 바늘, 음식과 그릇의 관계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를 둘러싼 공간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동시에 자신을 ‘펼치기’ 위해 반드시 공간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고약한 바이러스 하나로 말미암아 지구촌의 연결이 무섭도록 차단되고 격리가 흔해지자 ‘공간’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무게 있게 다가온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공간, 보호해주는 공간, 억압하고 옥죄는 공간, 콘텐츠를 담는 공간…. 관점에 따라 사뭇 대립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철학자 그라프 뒤르크하임은 이처럼 이중성을 지닌 공간을 가리켜 ‘자아실현의 구체적인 매개체’, ‘발전 가능성’ 같은 표현도 썼지만, 동시에 ‘저항이자 한계’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사이버 공간, 디지털 세상은 어떨까? 손으로 직접 느낄 수 없는 것이 한계지만, 가상 세계는 무한히 공간을 만들고 펼쳐나갈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자원의 부담이 없지는 않지만, 보다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대면 활동이 줄어든 탓에 문화 예술 콘텐츠에 더 목마른 요즘의 일상에서는 아무래도 관심을 끌어내기에 유리해진 측면도 있다. 처음에 분위기가 바짝 얼어붙었던 미술계의 대처를 보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표현이 진부하기는 해도 현 상황에 잘 어울린다. 미술관, 갤러리, 경매 회사 등 대부분 근사한 공간을 낀 채 업을 이끄는 주체들은 처음에는 한탄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디지털 콘텐츠와 서비스를 강화하거나 새롭게 창출하면서 나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다(‘발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슬기로운 해소책 짜내기에 바쁘다). 홈페이지에 온라인 전시나 e도록을 올려놓는 건 기본이고, 미디어 아트가 아닌 회화나 조각 전시의 경우에도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영상 편지 등의 도구를 활용한 다채로운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그중에는 꽤나 영리하다 싶은 비즈니스 모델도 눈에 띈다. 플랫폼을 운영하는 유통업자든 콘텐츠를 만드는 아티스트든 문화 소비자든 눈여겨볼 구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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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튜디오 방문도 전시 개막도 온라인으로…
지난달 초 영국의 명망 있는 현대미술가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스튜디오를 ‘방문’해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가 소속된 리손 갤러리(Lisson Gallery)의 주최로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Zoom)’을 이용해 잉글랜드 서폭에 있는 그의 넓은 작업장을 구경하고 평론가의 설명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 자유롭게 이동 가능하더라도 쉽지 않은 해외 스튜디오 방문인지라 흔쾌히 ‘접속’했다. 하반신이 불편한 그는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면서 자신이 일하는 공간을 소개했고, 애니메트로닉스 기술로 만든 쥐, 가짜 눈 더미 같은 신작도 보여줬는데, 기대 이상으로 몰입감이 있었다. 화면에 뜨는 ‘아이디’ 말고는 굳이 나 자신을 드러낼 필요 없이 철저한 관찰자처럼 조용히 ‘참여’할 수 있고, 원한다면 질문을 던지거나 다른 관중과의 채팅도 시도 가능한 일종의 선택권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심지어 산만해지는 순간에는 대놓고 딴짓도 할 수 있는,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를 ‘자유’도 있지 않은가. 물론 방문자 입장에서는 몸소 방문해 얘기를 나누는 편이 제일 좋을 수도 있겠지만, 오가는 여정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으로 인한 부담이 거의 없고, 작가나 갤러리 입장에서 보면 수백 명의 다국적 ‘관객’을 한꺼번에 거뜬히 수용할 수 있으니 효율성 면에서 탁월하다. 지금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원하는 이들이 많을 법하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는 <수평의 축>이라는 국내·외 작가 17명의 작품 70여 점을 선보이는 동시대 미술 기획전을 인스타그램 생중계로 먼저 공개했다. 자연을 동시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구성한 이번 전시를 기획한 양옥금 학예연구사가 등장해 실시간으로 소통했는데, 3천여 명이 접속해 활기를 자아냈다. 앞서 지난 3월 말 MMCA 덕수궁관에서는 개관 이래 처음으로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의 온라인 개막을 시도한 바 있다. 당시 유튜브 채널에서 전시 투어를 녹화 중계로 진행해 1만4천1백18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으고 누적 영상 조회 수 5만7천 건 이상(4월 22일 오전 기준)을 기록했는데, 영국 시사 문화지 <모노클>은 ‘대부분의 문화 기관이 문을 닫아버린 상황에서 한국의 MMCA는 유익한 사례를 제공했다’는 요지의 호평을 하기도 했다. MMCA는 지난해 학예연구사가 진행하는 영상 투어를 유튜브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개시하는 등 디지털 플랫폼 활용에 적극적으로 임해왔다. 물론 재난을 염두에 둔 행보는 아니었지만, 올해 코로나19 사태로 이 같은 노력이 더 빛을 발하는 모양새다. MMCA 관계자는 “유튜브 구독자가 코로나 사태 이후 5천 명 정도 늘어났고,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도 4개월여 만에 전년 대비 거의 2배 증가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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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의 한 챕터가 열리고 있다!
사실 미술계를 위시한 문화 예술 생태계에서 ‘디지털 패러다임’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기술, 도구, 서비스가 이미 준비돼 있었다. 이미 2011년에 시작된 구글 아츠 앤드 컬처(Google Arts & Culture) 서비스로 휴대폰만 있으면 세계 유수 문화 기관의 스트리트 뷰와 콘텐츠를 ‘가상 산책’하듯 살펴볼 수 있다. 방대한 컬렉션을 보유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Met 360도 프로젝트’ 같은 경우는 주요 내부 공간을 360도로 방향을 바꿔가며 동영상으로 살피는 서비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트 페어계의 ‘브랜드’인 아트 바젤 홍콩은 올봄 행사를 개최하지 못하자 ‘온라인 판매’로 전환해 꽤 쏠쏠한 결과를 얻어냈다. 또 이제는 대형 미술관뿐 아니라 갤러리나 개별 아티스트의 영양가 높은 디지털 서비스나 상품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런던, 뉴욕, 홍콩 등지에 전시 공간을 둔 세계적인 갤러리 하우저 앤드 워스(Hauser & Wirth)는 늘 세련되면서도 트렌디한 컬렉터나 젊은 대중과도 호흡하는 ‘힙한’ 콘텐츠로 유명한데, 이번에도 발 빠른 대응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중순 ‘디스패치(Dispatches)’라는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하고, 그 첫 단추를 마틴 크리드(Martin Creed)의 생동감 넘치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퍼포먼스로 꿰었다. 평소 같았으면 아트 페어나 전시 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뻔한 쟁쟁한 작가들이 자신의 자택이나 작업실에서 찍은 영상 편지와 온라인 전시 등 다양한 콘텐츠로 구성한 프로그램이다. 하우저 앤드 워스는 HWVR이라는 VR 모델링 툴을 내놓는 등 디지털 기술 개발에도 열심인데, 내년께 스페인 메노르카에 문을 열 아트랩(ArtLab)을 미리 볼 수 있는 VR 전시도 최근 시작했다. ‘거미’ 작가로도 잘 알려진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Maman)’을 영상미 넘치는 VR 콘텐츠로 만나볼 수 있다.
더 흥미로운 현상은 ‘AR 열풍’이다. VR이 물리적으로 당장 가볼 수 없는 공간을 체험하는 데 효과적이지만, 디지털 기기를 통해 ‘주입되는’ 콘텐츠만 접할 뿐 ‘나의 주변 세상’을 볼 수 없는 데 반해, AR은 유저의 일상 풍경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확장성이 있고, 스토리텔링에도 유리하다. BTS 멤버 RM·제이홉과의 만남으로 한국의 젊은 층에도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카우스(KAWS)는 얼마 전 아티스트와의 기술 협업으로 유명한 영국 기업 어큐트 아트(Acute Art)와 손잡고 ‘홀리데이 익스팬디드(Holiday Expanded)’라는 서비스를 선보였는데, AR 아트의 모범이 될 만한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냐는 평까지 받고 있다. ‘어큐트 아트 앱’을 활용해 자신이 원하는 배경에 눈과 손에 X자 표시를 한 KAWS의 대표 캐릭터 ‘컴패니언(COMPANION)’을 등장시키는 게 가능한 서비스다. 세 가지 파트로 구성돼 있는데, 첫 번째는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배경으로 한 12개의 대형 AR 조각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글로벌 공개 전시다. 뉴욕 중심부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을 배경으로 캐릭터가 다양한 동작을 취한 모습이 절로 눈길을 잡아끈다. 내가 앉아 있는 카페에 만화처럼 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불러올 수 있는 ‘오픈 에디션’도 있는데, 누구나 시도하고 SNS상에서 공유할 수 있지만, 한정된 시간만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원하는 장소를 배경으로 삼을 수 있는 데다 ‘소유’까지 할 수 있는 유료 에디션도 있다. 25점의 AR 조각으로 구성된 이 에디션을 가리켜 “AR 아트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선례로 남을 수도 있다”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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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을 기회로 삼는 자세
사실 AR이든 VR이든 단순한 영상 서비스든 플랫폼을 운영하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그저 무료 서비스에 그치고 만다는 우려가 있어왔다.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하고 예상보다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자 중소 사업자들은 자본력을 등에 업은 대형 미술관이나 글로벌 갤러리와 달리 “우리는 마냥 무료 콘텐츠를 제공할 수는 없다”면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서비스 차원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콘텐츠 제작에도 돈이 들어가지만, 유료화로 변경하자니 그다지 반응이 없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약을 바탕으로 기회를 창출하는 ‘디자인 싱킹’의 논리처럼 새로운 아이디어로 디지털 생태계의 틈새를 노려보겠다는 자세도 필요할 것 같다. 미술 생태계에서 부쩍 늘어나고 있는 디지털 행보는 공간의 확장을 이끌어감과 동시에 더불어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배출구를 선사해주는 순기능이 분명 있다. 보다 단순한 시각에서, 이 기회에 덜 알려진 신진 작가를 홍보하거나 공간의 매력을 부각하는 PR 마인드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결국 우리는 실제 공간을 원하지만, 온라인에서 그 공간을 더 그리워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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