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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국, 일본 등 세계 각지를 떠돌던 노매드의 삶을 살았고 국적도 여러 차례 바꾼 백남준에게 사실 한국은 태어난 곳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어쩌면 그의 생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국형 디지털 샤먼’이라 불릴 정도로 백남준의 작업에는 고국에 대한 애정과 한국적인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특히 무속 신앙을 믿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백남준은 한국의 무속 문화와 샤머니즘에 남다른 관심과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신과 인간을 이어준다고 믿는 무속 신앙이 미디어와 텔레비전보다 앞서 등장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이라고 여겼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고향인 독일 부퍼탈(Wuppertal)에 자리한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연 자신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1963)에서 백남준은 전통적인 희생 제물인 상징과도 같은 ‘소’의 머리를 전시장 입구에 설치했다. 작가로서의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여는 첫 전시에 피가 흐르는 소 머리를 걸어둔 것이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동서양 신화에 20세기 새로운 신화인 디지털 세계를 콜라주한 세계 최초의 전시라고 평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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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에 관한 관심사를 함께 나눈 또 다른 거장 요셉 보이스의 서거 4주기를 기념하기 위한 퍼포먼스에서 백남준은 아예 스스로 무당으로 분해 진지한 굿판을 벌인다. 1990년 서울 현대화랑(갤러리 현대)에서 벌인 ‘요셉 보이스를 위한 진혼굿’(1990)이라는 퍼포먼스였는데, 보이스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과 소품은 물론이고, 놋그룻, 담뱃대 같은 한국 굿에 쓰이는 오브제, 피아노와 요강 같은 언뜻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 등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마치 동서양의 콜라주 같은 굿판이었다. 또 가족의 섬유 공장이 있던 서울 중심가의 이름을 딴 사당 형태의 작품 ‘종로 교차점’(1991)에서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백남준의 어린 시절 사진이나 조부의 사진, 영상 등을 벽에 부착하고 바닥에 놋그릇을 펼쳐놓았는데, 조상 숭배의 전통인 제사상을 연상시킨다(벽 구조물 한가운데 놓여 있는 익숙한 시멘트 중절모 역시 보이스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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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범상치 않은 인물의 기행과도 같은 업적이 알려지면서 한국에서는 의아함과 신기함이 뒤섞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천재 스타’의 출현을 크게 반겼다. BTS가 빌보드 차트를 강타하고, 국내 드라마와 영화가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휩쓸 정도로 K-문화가 강세인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그야말로 변방으로 여겨지는 동양의 작은 나라 출신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이러한 정서를 꿰뚫고 있듯, 백남준은 각종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35년 만의 귀국 당시 인터뷰(1984)에서 “왜 조국을 놔두고 외국에서만 활동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그의 애정이 깃든 대작 가운데 십장생 중 하나로 신성하게 여겨지는 동물인 거북을 주제로 한 대형 미디어 조각 ‘거북’이 있다(울산시립미술관 소장). 백남준의 이름을 크게 알린 TV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대표작으로 독일 베를린의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처음 공개됐는데, 1993년은 백남준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독일관 작가로 참여해 ‘시스틴 채플’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가장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시스틴 채플’이 시스틴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에서 영감을 받은 서양적 세계관 속 ‘하늘’을 의미한다면, ‘거북’은 동양적 세계관인 ‘땅’으로 대변된다. 총 1백66대의 TV으로 이뤄진 ‘거북’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웅장한 자태와 스케일(가로 10m, 세로 6m)로 단번에 관람객을 강렬하게 압도한다.
※ 참고 문헌
구보타 시게코, 남정호, <나의 사랑 백남준>, 아르테, 2016.
백남준,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재)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 2018.
김홍희, <굿모닝, 미스터 백! – 해프닝, 플럭서스, 비디오아트, 백남준>, 디자인하우스, 2007.
박상애, <비디오 테이프 분석: 굿모닝 미스터 오웰>, (재)경기문화재단 백남준아트센터, 2014.
Rachel Jans, ‘Nam June Paik: Kinship, Collaboration, and Commemoration’, San Francisco Museum of Ar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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