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k Le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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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 고성연

심미성과 기능성을 충족시키는 디자인과 자아를 표출하는 아트를 ‘겸업’하는 아릭 레비. 서프보드에 그림을 그려넣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술에 입문했다는 그의 삶에서 ‘작업을 한다’는 건 일종의 호흡처럼 그를 지탱해왔다. ‘테크노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전천후 크리에이터 레비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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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들이 많이 사는 파리 20구에 자리 잡은 한 아틀리에. 우연찮게 공휴일에 만남이 이뤄졌던지라 이 스튜디오의 주인인 장신의 남자는 모터 사이클을 타고 도착해 문을 열고는 직접 안으로 안내했다. 자신처럼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를 나부끼는 일곱 살짜리 딸과 함께. 자신의 작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과자를 꺼내 인심 좋게 건네는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디자인계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인 아릭 레비(Arik Levy). 언론에서 필립 스탁, 론 아라드와 함께 ‘세계 3대 산업 디자이너’라고 칭하곤 하는 슈퍼스타다. 제품, 인테리어, 무대미술 등 영역을 가리지 않고 신소재, 신기술을 예술적인 감성으로 녹여내는 남다른 재주와 디자인 언어 덕분에 ‘테크노 시인’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수식어를 꿰찰 정도로.

서프보드와 함께 자라난 아트 사랑

하지만 그는 디자이너라고만 불리기에는 조각, 그림, 사진, 비디오 아트 등 상당히 넓은 창조 스펙트럼을 지닌 인물이다. 이제는 쉰 줄에 접어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레비는 오랫동안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들면서 아티스트로도 꾸준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활동해왔다(그의 작품 세계를 다룬 두꺼운 아트 서적도 2권 나와 있다). 특히 돌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구조적 조각 작품 ‘록(Rock) 시리즈’는 이제 그를 상징하는 수작으로 여겨진다. 워낙 팔방미인형 인재를 많이 만나보긴 했지만 그래도 슬쩍 궁금해졌다. 상업적인 성공과 명성을 동시에 거머쥔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기에도 바쁜 시간 속에서도 왜 아트를 손에서 놓지 않아왔는지? “그거야 전 열네 살 때부터 치열하게 뭔가를 그리고 만들어왔으니까요.어릴 적부터 자코메티의 드로잉을 사랑했고,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도 그리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그러다 그리는 솜씨가 늘어 나중에는 ‘소년 페인터’로 생업까지 하게 됐다면 믿겠어요(웃음)?”
10대 시절, 그는 서프보드를 에어브러시로 채색하고 단장하는 일로 제법 돈벌이를 했다. 이스라엘 출신으로 텔아비브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서핑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소년이었는데 아트에 대한 관심을 버무려 ‘예술적인’ 서프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려 1천5백 개가 넘는 서프보드에 그림을 그려 넣었고, 꽤 잘 팔렸단다. 당시 그는 헝가리 출신 빅토르 바사렐리(Victor Vasarely)를 비롯해 기하학적 형태와 선에 의한 착시 효과를 내세운 키네틱 아트 작가들을 열렬히 추종했고, 서프보드 작업을 할 때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바사렐리의 오리지널 프린트를 1982년에 처음으로 갖게 됐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 작품은 아직도 제 방에 걸려 있어요.” 움직임과 선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그가 자연스럽게 눈을 돌린 분야는 자동차 디자인. 사실 한 번도 공부한 적은 없었지만 스위스의 유명 아트 스쿨인 아트 센터 유럽(Art Center Europe)에 자동차 디자인 전공으로 지원까지 했다. 무용을 하던 여자 친구가 제네바로 유학을 떠나자 그도 따라나서면서 내린 당돌한 선택이다. “당시 여자 친구가 2주 먼저 떠났는데, 제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주고는 학교에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이 친구가 곧 찾아올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요.” 이 황당한 전갈을 받은 학교에서는 다소 난감해했지만 실제로 2주 뒤에 서프보드를 안고 찾아온 레비를 합격시켰다(자동차 디자인에 정을 못 붙인 그는 나중에 산업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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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노 시인’이라 불리는 전천후 크리에이터의 탄생

졸업을 한 그는 세이코-엡손의 후원으로 일본에서 몇 개월 보낸 뒤 그다음 정착지로 향했다. 그가 지금까지도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파리였다. 지금도 ‘일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그는 패기와 의욕으로 똘똘 뭉친 채 1990년대를 누구 못지않게 바쁘게 살았고, 커리어 사다리를 한 계단씩 올라갔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예술적 자아를 찾고자 게을리하지 않았던 ‘실험’이 바로 주변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록 시리즈의 시작점이었다. “그땐 제가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렇지만 자연과 소셜 코드(social codes), 감정, 기술적인 영역, 그리고 나의 예술 세계를 연결 지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고 기억되네요. 그것이 비대칭의 기하학적 조각물을 탄생시켰던 거죠.”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록 시리즈 중 대형 조각으로 처음 설치된 작품이 2006년의 ‘빅 록(Big Rock)’이다. 거울광으로 마감해 사람이든, 빛이든, 나무든, 노을이든, 구름이든 주변의 이미지를 비추는 이 작품은 그의 디자인과 예술 세계를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대표작이 됐다. 나무, 황동, 레진 등 다양한 소재와 구조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록 시리즈는 이제 미국, 네덜란드, 체코 등 세계 곳곳에 공공 미술 작품으로 설치되고 있다. 그가 의도한 록 시리즈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면서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와 연결하게 해주는 의도로 만들었다는 게 ‘테크노 시인’이라는 명성에 어울리는 그의 설명이다. “내 바위 조각은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바위는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변화시키고, 주변과 호흡하면서 새로운 중력점을 만들어내고 끝없이 진화하는 스토리를 엮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아티스트들이 ‘언더그라운드 고전’으로 꼽는 <Art & Fear>라는 책을 보면 재료는 예술가들의 환상에 귀 기울여주지 않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어떤 재료로 뭔가를 빚어내려 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가는 대로 손쉽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재료의 성질과 머릿속 구상을 현실에서 일치시키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테크노 시인’이라는 별칭을 얻는다는 건 꽤나 뿌듯한 영예일 터다. 자기 안의 심상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단단하고 아름답게 정제된 작품으로 펼쳐놓을 수 있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그의 바위 조각 시리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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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여, 두려워하지 마라!

사실 가구나 제품 디자인을 하면서 아트 퍼니처나 오브제를 만드는 경우는 꽤 있어도 레비처럼 큰 규모의 추상 조각이나 설치를 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행보를 가리켜 소위 ‘예술 놀이’가 아니냐고 보는 다소 삐딱한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반문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인물은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 엔지니어이기도 하지 않았느냐고. 심지어 사진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예전의 초상화가들은 오늘날로 치면 사진가이기도 한 셈인데, 생계를 위해 초상을 그리고 그 돈으로 낙하산을 개발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였겠느냐고. 그러고는 자신은 오히려 괜히 갤러리의 눈치를 보거나 금전적인 곤경을 겪지 않으면서 창작과 전시에 순수하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털어놓는다. “아직은 예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영역에서 도달해보지 못한 지점이 많아요. 그래서 매일 아침 겸허한 마음과 도전적 야심을 함께 품은 채 눈을 뜨죠. 그렇지만 이미 관심 있는 일을 찾았는데,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게 뭐가 있나요? ”
그렇다. 정말로 창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작품은 자신이 관심을 갖는 것들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걸 찾았다면, 그저 자신의 작업에 몸을 담그게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서프보드를 신들린 듯 채색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익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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