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esthetics of Pai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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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7, 2015

에디터 고성연

애주가이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좋은 술이 없는 곳에 좋은 삶이란 없다”라고 했다. 여기에 ‘좋은 페어링(good pairing)’이라는 덕목이 추가돼야 할  듯싶다. 안주든, 정찬이든 술과 요리는 당연히 짝을 이룰 수 있지만 요즘 그 페어링의 수준과 다양성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다. 섬세한 와인 페어링, 만인의 사랑을 받는 우아한 샴페인 페어링, 강렬한 위스키 페어링과 경쾌한 패기가 넘치는 화이트 스피릿 페어링 등 삶을 풍요롭게 하는 페어링의 세계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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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책인 술을 위하여 건배!”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네 가족들(The Simpsons)>의 주인공 호머 심슨이 남긴 명언이다. 심슨 같은 애주가 캐릭터가 아니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드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술은 많은 이들에게 해악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삶의 즐거움과 영감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결국 술이 아니라 인간이 나쁜 것일 테니까. 다행히도 요즘 한국의 술 문화는 점점 폭음에서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과음과 폭음이 잦은 회식 문화가 바뀌고 술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유흥 주점보다는 전문 바(bar)나 레스토랑, 카페, 그리고 자택에서 술자리를 갖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술을 함께하려는 성향 덕분에 주류와 술 문화의 다양성도 무럭무럭 커지는 모양새다. 그중 하나가 술과 미식의 조화를 도모하는 ‘페어링(pairing) 문화’다. 페어링이라 하면 흔히 와인 페어링을 떠올리지만, 요즘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샴페인 페어링, 위스키 페어링 등 다채로운 페어링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정 음식에 잘 어울리는 술을 찾는 이들뿐 아니라 각종 술과 환상의 궁합을 이루는 짝꿍 요리를 찾아다니는 페어링 애호가도 증가하고 있다.  “F&B(Food & Beveridges)가 아니라 B&F가 아니냐”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사실 술이 미식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든, 요리가 술의 풍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든 그 선후(先後)는 그리 중요치 않을 것 같다. 섬세한 조화와 절제, 공유를 추구하는 페어링의 메커니즘 덕에 술자리가 보다 건강하고 즐거워진다면 말이다. 그래서 심지어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이들도 ‘공복 음주’에 대한 부담이 없고 마음 놓고 ‘안주발’ 세워도 되는 페어링 메뉴에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경우가 많다.
돔 페리뇽  P2와 임정식의 만남,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와 매혹
미식가라면 한 번쯤 방문해본 적이 있거나, 그럴 의향이 있을법한 서울 청담동 정식당. 한인 셰프 최초로 2년 연속 미슐랭 2 스타를 따낸 임정식 셰프가 이끄는 정식당 1층에 지난여름 근사한 바가 들어섰다. 이곳에는 20여 종의 다양한 와인을 글라스 사이즈별(150ml, 75ml, 30ml)로 판매하도록 해주는 디지털 와인 디스펜서가 설치되어 있어 각자 원하는 용량만큼 마실 수 있기도 하고, 심지어 돔 페리뇽(Dom Pe′rignon) 같은 최상급 샴페인도 반 잔(75ml) 단위로 주문할 수 있다. 이 바의 또 다른 매력은 2층에 자리한 레스토랑으로 올라가지 않더라도 임 셰프표 요리를 안주 삼아 가볍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올해 선보인 돔 페리뇽 빈티지 2005와 초리조를 넣은 소스를 곁들인 바삭한 문어 요리 같은 파인 다이닝 메뉴를 바에서 시킬 수 있다. 그것도 몇천원에 혼자서 한 입에 쏙 넣을 만한 B(bite) 사이즈로도, 둘이서 맛볼 만한 작은 사이즈(S)로도 주문 가능하다(물론 좀 넉넉한 안주로 접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보통 접시(R) 사이즈로도). 여러 가지 주류와 요리를 매칭해보면서 그야말로 다채로운 페어링의 미학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따로 예약 주문을 해야 하는 아주 특별한 빈티지 샴페인인 돔 페리뇽 P2-1998을 예로 들어보자. 무려 16년에 걸쳐 완성돼 매혹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P2를 선택한다면 아무래도 샴페인의 영원한 짝 캐비아만큼 탁월한 스타트 메뉴를 찾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식감 좋은 브리오슈에 얹은 캐비아의 짭조름한 맛이 농익은 P2의 빼어난 광물성과 어우려져 몹시도 상쾌한 시너지를 낸다. 수비드(진공포장한 재료를 저온에서 요리하는 방법)로 요리한 달걀노른자를 얹은 육회, 쫄깃한 초리조를 넣은 매콤한 파에야, 바삭한 돼지고기가 일품인 보쌈 등은 정밀함과 강렬함을 동시에 갖춘, ‘결코 세게 때리는 일 없이 살짝 건드리는 듯한 느낌’을 담았다는 P2의 다면적인 매력을 이끌어낸다. 정식당 바를 이끄는 신동혁 소믈리에는 “살짝 매콤한 요리를 샴페인과 매치하면 특유의 씁쓸한 맛과 은근히 잘 어우러지는 묘미가 있다. 바에서 추천을 받는 동시에 자신의 취향에 맞는 두세 가지 요리를 골라 맛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리 한 입, 샴페인 한 모금의 다양한 변형이 가능하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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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무쌍한 와인 페어링을 시도하는 파크 하얏트 서울

와인은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만큼이나 페어링 메뉴의 창의성도 날이 갈수록 날개를 펴가는 영역이다. 최근 파크 하얏트 서울 24층에 위치한 더 라운지에서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한식’이라는 콘셉트를 내세운 ‘강남 컴포트 퀴진(Gangnam Comfort Cuisine)’을 야심차게 선보였는데, 그 이름처럼 메뉴의 면면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자면 당일 올라온 제주산 생선에 김과 새콤한 초장 무스를 곁들여 시식회에서 탄성을 이끌어낸 퓨전 회 요리 ‘회(Hoe)’ 같은 메뉴다. 마시밀리아노 지아노 파크 하얏트 서울 총주방장과 백영민 한식 마스터 셰프의 컬래버레이션으로 탄생한 이 새로운 한식과 미각의 합을 이룰 와인 페어링을 시도해봤다. 먼저 전식으로는 한우 소 꼬리 테린에 피클, 깻잎 페스토를 가미해 부드러우면서 감칠맛 나는 꼬리 편육. 파크 하얏트 서울의 F&B 매니저 앨리스테어 민티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지역의 대표 와인인 바르바레스코(Barbaresco, 2011)를 택했다. 마른 과일의 녹진한 향이 묻어나며 상쾌한 허브 향까지 느낄 수 있는 이 와인이 타닌의 구조도 탄탄하고, 보디감도 적당해 꼬리 요리와 잘 어울린다는 이유에서다. 메인 요리로 자주 추천하는 ‘삼계구이 (찹쌀과 인삼 소스를 넣어 구운 유기농 영계 요리)’와 짝을 지을 만한 와인 역시 피에몬테산 화이트 와인 가비(Gavi di Gavi, Villa Sparina, 2013). 상쾌한 라임과 시트러스 향, 사과 향, 그리고 자몽의 달콤 쌉사름함이 특징인 이 와인은 삼계구이의 살짝 텁텁한 면모를 잡아줄뿐더러 가금류 특유의 텍스처와 맛을 살려주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해운대 백사장과 요트를 볼 수 있는 파크 하얏트 부산 역시 창의적인 페어링으로 미식가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다. 그중에는 다섯 가지 코스에 저마다 다른 꿀을 가미한 프랑스 요리와 와인의 페어링을 시도한 ‘허니 와인 디너’가 눈길을 끈다. 그 시작은 푸아그라 테린에 아카시아 꿀을 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 천도복숭아 콤포트를 곁들인 전채 요리. 여기에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 향이 풍부한 와인인 2013 도멘 피에르 크로(Domaine Pierre Cros, Les Costes)를 페어링하면 절로 미소가 번진다. 달콤함과 산도가 완벽한 균형을 이뤄 평소 푸아그라를 잘 즐기지 않는 고객들의 입맛까지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게 셰프의 설명이다. 아카시아 꿀을 가미한 자몽 셔벗과 쌉싸름한 캄파리로 입을 개운하게 한 뒤 제공하는 메인 요리는 유칼립투스 꿀을 곁들인 훈제 오리 가슴살. 이런 경우에는 두 가지 와인으로 미식의 품격을 올리는 재치를 발휘할 수 있다. 예컨대 첫 번째 와인은 베리류의 풍미를 더해 유칼립투스 향과 조화를 이루는 론 와인(Domaine De la Janasse, Cotes du Rhone, 2013), 두 번째 와인으로는 농밀한 과실 향에 질감이 크리미한 정통 호주 와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몰리두커, 더복서(Mollydooker, The Boxer) 2014를 내놓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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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의 품격을 살리는 싱글 몰트위스키, 맥캘란의 위엄
위스키 시장에서 싱글 몰트만큼 ‘핫한’ 종목은 없을 것이다. 요즘 싱글 몰트위스키 애호가들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청담동 볼트82.  ‘몰트 바 열풍’의 주역인 마서우 대표가 한남동에 이어 설립한 위스키 바다. 그런데 볼트82는 흔히 위스키 바라고만 생각하지만 이곳에는 싱글 몰트와 막강 궁합을 자랑한다는 스테이크 하우스도 있다. 미국 최고의 쇠고기 발골장 중 하나인 마스터퍼베이어스(masterpurveyors.com)에서 재료를 공수하는 볼트 스테이크 하우스와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 맥캘란(Macallan)의 페어링은 호기심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스테이크와 위스키는 각자 꽤나 강한 느낌과 맛을 풍긴다. 그래서 이 둘의 합을 논할 때는 아무래도 맛이 압도당하지 않도록 ‘강약’의 조화를 추구하되 갈수록 연산이 높은 위스키를 고르는 게 정석이다. 먼저 맥캘란 12년과 포터하우스 채끝의 만남. 말린 과일 향과 셰리 향, 달콤한 바닐라를 더한  맥캘란 12년이 ‘뉴욕 스트립’이라고 불리는 담백한 채끝의 맛과 질감을 북돋워준다. 싱글 몰트 페어링의 시작으로 과하지 않은 상쾌한 ‘출발’이다. 이어 맥캘란 15년의 짝으로는 립아이 스테이크가 안성맞춤이다. 과일 향과 스모크, 스파이시함이 혼합된 풍미로 담백하면서도 화사하다는 평가를 받는 맥캘란 15년에 지방기 많은 립아이의 묵직함이 꽤나 잘 어울린다. 강렬한 마무리를 원한다면 맥캘란 18년과 포터하우스 안심의 페어링을 권할 만하다. 셰리 캐스크 특유의 진하고 달콤한 향과 알싸한 스파이시함을 동시에 품은 맥캘란 18년과 부드러운 안심의 조화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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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리단길을 사로잡은 헨드릭스, 프리미엄 진의 ‘짝꿍 음식’은?
요즘 ‘트렌드세터’들의 집합지로 일컬어지는 이태원 경리단길에 가면 눈에 띄는 브랜드 중 하나가 헨드릭스(Hendrick’s)다. 청량한 오이 맛이 특징적이고, 은근한 장미 향도 살짝 품은 프리미엄 진(gin) 브랜드로 특히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경리단길의 플라워 진(Flower Gin)은 헨드릭스를 살 수 있는 독특한 플라워 숍으로도 유명하다. 이 숍의 대표가 유학 시절 즐겨 마시던 헨드릭스를 손님들에게 권하다가 아예 판매도 같이 하면서 꽃도 팔고, 진도 파는 이색 명소를 만들게 됐다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보드카, 럼과 함께 화이트 스피릿의 인기를 이끌고 있는 증류주인 진을 둘러싼 다양한 칵테일 레시피가 있지만 출출한 배를 채워줄 페어링 메뉴도 점차 생겨나는 추세다. 예를 들어 오징어 먹물 시럽과 헨드릭스 진 칵테일 ‘블랙 레이디(Black Lady)’는 먹물 파스타와 썩 흥미로운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헨드릭스 마니아들이 가장 즐겨 찾는 대상은 뭐니 뭐니 해도 진토닉이다. 오이와 얼음, 토닉워터만 있으면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진토닉과 매칭하는 메뉴를 접할 수 있는 장소로는 경리단길의 랍스터 샌드위치 가게로 유명한 로코스(Locos)가 있다.  감자튀김와 코울슬로 등과 함께 나오는 랍스터 샌드위치는 물론 맥주와도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지만 오이 향이 상큼한 헨드릭스 기반의 진토닉과도 빼어난 파트너십을 자랑한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케미’는 있을지언정 100% 완벽한 페어링에 대한 정답은 없다고. 신동혁 소믈리에의 말을 빌리자면 술을 음미하고 그에 맞는 음식을 고르는 재미 덕에 사람들과의 대화가 즐거워지고, 자리가 빛난다면 그게 진정한 페어링의 미학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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