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뒤에 숨은 여러 얼굴, 긍정의 역학 이끌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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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06, 2016

에디터 고성연 | 일러스트 하선경

타인의 삶을 기웃거리면서 시기심과 패배 의식에 사로잡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질투’라 불리는 이 미묘한 감정은 인간이 통제하기 힘든 방식으로 영혼을 괴롭혀왔다. ‘악한 괴물’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질투는 인간의 본성이며 인류 진화의 요소이기도 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다만 질투가 삶의 추동력이 될 수 있도록 다스리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검은 질투’를 지양하고 긍정적 효과를 낳는 ‘하얀 질투’를 추구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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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드라마 <또! 오해영>의 여자 주인공 오해영(일명 ‘흙해영’)은 등장 인물을 소개한 포스터에서 초록빛 블라우스를 입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녹색은 영미권에서는 ‘질투’를 나타내는 색이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4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오셀로>에서 질투심을 가리켜 ‘녹색 눈의 괴물(green-eyed monster)’이라고 표현했고, 영어 관용구로 얼굴이 창백해지도록 심하게 질투한다는 뜻으로 ‘green with envy(jealousy)’라는 어구도 있다. 이에 대해 그리스인들이 질투를 하면 담즙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바람에 얼굴이 초록빛을 띤다고 믿었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어쨌거나 <또! 오해영>에서 평범하다는 맥락에서 ‘그냥 오해영’으로 불리는 여자 주인공은 인간의 삶을 자주 괴롭히는 ‘질투’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웬만한 ‘구박’에도 씩씩하게 버티는 발랄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사실 그녀에겐 이름이 같은 잘난 고교 동창에게 비교당하면서 열등감과 피해 의식에 시달리던 과거가 있다. 성인이 되어 그런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나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하필 동명이인 동창인 ‘예쁜 오해영’으로 말미암아 결혼식 전날 퇴짜를 맞는 악재를 맞닥뜨리면서 다시금 고통받는 인물이다. 그러다 ‘인생 사랑’으로 다가온 남자를 만나고, 부모의 따뜻한 사랑 덕에 차츰 극복해나가기는 하지만, 그녀는 극 후반까지도 열등감 어린 질투심에 분노하고 괴로워한다. 게다가 알고 보면 ‘악연’으로 얽힌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도 각기 질투심에 사로잡혀 극적인 사건을 벌인다.
드라마이기에 극단적인 설정일 수도 있지만 질투가 우리네 삶을 멍들게 하는 ‘마음의 괴물’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결점으로 폄하하기엔 인간이라면 주든 받든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하는 덫이기도 하다. 그래도 때로는 이 복잡미묘한 감정이 누군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어차피 피해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질투를 다스려 ‘나의 힘’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진짜 질투는 가까이에 있다
질투는 자신보다 더 많은 걸 가졌거나 그렇게 보이는, 또는 그럴 수 있을 만한 사람에 대한 불만, 열등감, 분노 등이 뒤섞인 감정이다. 자칫 증오나 복수심, 탐욕 등으로 번질 수도 있다. <쌤통의 심리학>이라는 책의 저자는 히틀러가 사회 곳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질투한 나머지 극단적인 탄압까지 하게 됐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심지어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건축가가 되고 싶은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이루지 못한 것도 유대인들 탓이라고 생각했다고. 비록 히틀러 사례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질투라는 감정은 무수히 질책받고 경계시되어온 게 사실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질투를 가리켜 ‘악마의 특징’이라고 했다. 지구촌 최고의 ‘큰손’으로 추앙받는 투자계의 제왕 워런 버핏은 자신의 회사 주주들을 위한 연례 회의에서 ‘7대 죄악’을 검토하도록 하는데, 그중에서 시기심을 가장 쓸데없는 죄악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죄악은 잠깐이긴 해도 약간의 즐거움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시기심만은 예외죠. 시기심은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늘 그 사람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뿐이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평생 조력자인 찰리 멍거를 두고 “그는 자신이 시기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그런데 멍거는 그저 드러내지 않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다. 질투심이 아예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머스 홉스나 장 자크 루소 같은 철학자들은 질투심을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닌 성질로 봤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속성이 있고, 질투는 바로 이 ‘비교’에서 비롯되기 때문. 그래서 혹자는 질투를 유발하는 건 남들에 대한 경쟁심과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의 혼합체라고도 했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질투의 대상으로 삼기 쉽다. 인간에겐 어딘지 자기와 비슷한 점이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으므로, 가까운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누리면 자신도 그걸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사람들이라면 성공에 대해 조금 배 아파하거나 불행에 대해 은근히 즐거워하는 ‘쌤통 심리’ 정도로 끝나지만, 가까운 이들을 질투하게 될 경우엔 고통스러워질 수 있다. 미국 소설가 고어 비달은 이런 성향을 자신에게 빗대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질투가 꼭 쓸데없는 것일까? 긍정과 부정의 미학
그렇지만 우리는 대부분 질투를 드러내기를, 아니 인정하기조차 꺼린다. 학자들은 질투심을 타인에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가장 고백하기 싫은 감정 중 하나로 꼽는다.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데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반대로 질투를 받는 대상은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열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 점에 대해 신경 쓴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동시에 간절히 원하는 게 무엇인지 타인에게 공개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질투라는 감정에 큰 위협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기도 한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질투처럼 소모적인 감정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 제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갖가지 감정을 만들어내는 건 인간의 ‘뇌’인데, 뇌를 컨트롤하기 쉬울 리가 없지 않은가.
오늘날에는 적어도 감정 컨트롤에 도움이 될법한 기제가 많아졌다. 질투에 대한 해석이 훨씬 더 다양해졌고, 파괴적인 속성과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전문가 소견 또한 풍부하다. <질투의 민낯>의 저자 지그리트 엥겔브레히트는 질투심이 나타나는 모든 형태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의기소침하게 체념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후퇴형(우울형) 질투(depressiver neid), 상대가 누리는 지위를 박탈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를 방법을 찾는 적대형 질투(feindseliger neid), 그리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배우려 하면서 더 노력하는 선망적 질투(bewundernder neid)다. 흔히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적대적 질투는 ‘검은 질투’, 상대방을 동경하고 축하해주면서 부러움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선망적 질투는 ‘하얀 질투’로 불리기도 한다. 예컨대 ‘팝의 여왕’ 마돈나는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성공과 라이프스타일을 부러워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알려져 있다. ‘질투는 나의 힘’이 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질투가 인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인류 진화의 핵심 요소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검은 질투에 불타는 이들은 ‘나도 해야지’가 아니라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남도 가질 수 없다’는 식의 위험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이들은 상대에게 해를 가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가 강하므로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공감 능력이나 이해심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전문가들은 아마도 이런 적대적인 감정에 이끌려 사회적 관계를 파괴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질투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갖게 됐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타인의 견제나 적대심을 경계하면서 자연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혹은 자신이 누군가를 시기하기보다는 질투를 받는 대상으로 비칠 수 있도록 으스대기도 한다. 이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질투가 곧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증표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심리학자들은 지적한다.

우리가 정말 질투하는 대상은 ‘감정’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질투하는 진정한 대상은 따로 있다고 엥겔브레히트는 주장한다. 타인이 소유한 값비싼 물건이나 능력, 지위 그 자체보다 그것들을 소유한 사람이 지녔을 것이라 짐작되는 ‘감정’과 더 깊은 연관이 있다는 논리다. 그들이 누리는 기쁨, 만족감, 여유로움, 자존감의 상승과 같은 감정들 말이다. 본질적으로 그들이 지닌 장점 때문에 더 행복하게 잘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타인의 진짜 감정은 알지도 못한 채 하는 추측일 뿐이다. 그냥 ‘그들은 저 많은 걸 누리고 있으니 행복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넘겨짚으면서 자신을 질투로 몰아가는 것이다. <또! 오해영>에서도 ‘그냥 오해영’은 자신은 ‘예쁜 오해영’이 뛰어난 외모와 두뇌의 소유자에 인기도 있으니 상대적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예단하면서 열등감을 느끼지만, 상대방의 진짜 현실은 알지 못했다. 모든 게 빛나 보이는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아픈 상처가 있고, 심지어 ‘그냥 오해영’인 자신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다는 점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의 질투심도 결국은 자신이 행복하고 싶은 바람과 욕구 때문인 셈이다.
이쯤에서 행복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인간의 행복이란 의외로 짧게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행복의 가치’를 연구한 대니얼 길버트를 위시해 행복 전문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대부분 긍정적인 일이 이끌어내는 행복의 효과는 실제보다 훨씬 더 강할 것으로, 부정적인 사건의 부작용은 실제보다 훨씬 더 심할 것으로 예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의외로 행복감은 짧게 지속된다고. 현실에서는 아무리 강렬한 사건도 3개월 이상 그 영향력이 지속되기 힘들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강력한 한 방보다는 소소해도 잦은 추억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논리다.
이렇듯 남들처럼 행복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질투가 솟는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런 감정 때문에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질투심을 인정하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감탄하면서 오히려 질투의 대상과 친해지는 식으로 ‘흰색 질투’로 승화하는 방법도 있고, 믿을 수 있는 지인과 함께한 자리에서 자신의 질투심을 터놓고 말하면서 털어버리는 방법도 있다. 그와 동시에 나만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분명 사람의 가치는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심리학자들은 무엇보다도 자기 안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을 건넨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이다. 자신이 어디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지 파악하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질투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질투를 기꺼이 인정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욕구 내지 욕망이 무엇인지 감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작업’을 하다 보면 대개 질투의 중요한 원인은 그것을 유발한 첫 번째 계기에 있지 않고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스케치를 빼어나게 잘하는 누군가를 질투할 때는 사실 그처럼 스케치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점 자체를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처럼 헌신과 절제를 발휘할 일을 찾지 못해 부럽고, 괴로웠던 셈이다. 결국 과제는 ‘내 자신이 행복한 일’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정에서 다른 이가 가진 무엇인가가 정말 의미 있게 다가온다면, 그래서 진심으로 얻고자 노력한다면 그땐 질투가 ‘하얀 추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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