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건축의 경험이 선사하는 ‘소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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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01, 2024

글 고성연 l Photo by 고성연

문화 예술 기행_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Bato Hiroshige Museum of Art)


잘 짜인 거미줄처럼 여기저기로 정교하게 뻗어 있는 신칸센 노선도 피해 가는 도치기현 나스군의 작은 마을 나카가와마치(Nakagawa-machi). 일본에서 소도시 여행을 해본 적은 있지만 대중교통은 단 하나의 버스 노선만 존재하는 ‘찐’ 시골 동네를 홀로 찾아간 건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온갖 행사로 점철된 도쿄에서의 ‘아트 위크’ 일정을 마치고 구마 겐고(Kengo Kuma)와의 인터뷰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잠시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바람도 쐴 겸 그를 상징하는 ‘작고, 약하고, 뽐내지 않는’ 건축의 근원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 작업의 하나인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Bato Hiroshige Museum of Art)을 방문하고자 나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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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자동차 없이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Bato Hiroshige Museum of Art)에 가려면 일단 신칸센은 필수다. 이른 오후, JR 우지이에 역까지는 순조롭게 도착했지만 그곳에서 갈아타야 하는 간토 버스를 간발의 차로 놓친 것 같았다. 다음 버스는 저녁이 되어서야 올 듯한데, 마침 공휴일이라 그런지 상점들이 다 닫혀 있는 텅 빈 마을에서는 ‘우버’도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졸지에 낯설기 그지없는 동네를 산책하며 ‘미술관행’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아주 운 좋게도 빈 택시를 맞닥뜨렸다. 구세주나 다름없는 상냥한 택시 기사가 열심히 달리는데, 주변이 온통 논밭인 시골길이다. 이윽고 도착한 나카가와마치에 잡은 숙소의 자태가 시야에 들어오니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인구가 2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마을에는 무려 2백 년 된 유서 깊은 고택을 개조해 조성한 멋진 호텔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미술관과의 거리는 그야말로 지척이다. 해가 질세라 발걸음을 재촉하니 정말로 5분도 되지 않아 미술관 표지판이 나온다. 꽤 진한 파란색 하늘을 커다란 배경으로, 삼나무 숲을 등진 채 낮고 길게 뻗어 있는 단층 미술관. 그 앞으로는 넓은 주차장 부지가 펼쳐져 있고, 뒤편의 숲과 미술관 사이에는 대나무들이 아리땁게 늘어선 안뜰이 있다. 주차장에서 살짝 경사진 길로 올라가 거리와 자연을 연결하는 듯 시원하게 뚫려 있는 왼쪽으로 들어서면 바로 미술관 입구와 안뜰로 이어진다. 그날은 미술관도 고요했기에 그저 담백한 맞배지붕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 외관을 덮고 있는 연갈색 삼나무 루버가 묘한 오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규칙적인 리듬감을 띠며 배치된 직선의 기둥들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머금은 미술관은 분명 소박하지만 우아한 해사함을 품고 있다. 구마 겐고(Kengo Kuma)에게 ‘삼나무 루버 장인’이라는 명성을 안겨준 ‘작은’ 건축물임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비가 오면 어쩌지 싶어 위를 올려다보니 방화, 방수 재질의 얇은 지붕을 설치하고는 그 위에 삼나무 루버를 살짝 띄워서 얹었다. 당시에는 신기술이었던 ‘원적외선 훈연 열처리’를 삼나무 루버에 적용해 나무의 질감을 살릴 수 있게 됐다고.
‘버블 경제’ 시대에 일을 찾아 헤매던 구마 겐고라지만 어쩌다가 외진 시골 마을에 이런 미술관이 들어선 것일까? 바토 히로시게는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거장 중 하나로 인상파에 영향을 준 인물인 우타가와 히로시게(Hiroshige Utagawa, 1797~1858)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공공 미술관이다. 도치기현 출신의 사업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아오키 도사쿠(Tosaku Aoki)의 소장품이 기증되면서 미술관이 설립됐다. 1995년 고베에서 발생한 한신대지진 당시 그의 창고가 무너지면서 폐허 속에서 히로시게의 작품이 발견됐는데, 이를 계기로 유족은 아오키의 소장품 성당수를 그의 고향(도치기현)에 기증하기로 했고, 설계 공모전에서 구마 겐고가 이끄는 KKAA가 당선된 것이다(2000년 완공). 필자가 들렀을 당시, 동시대 작가의 작업과 더불어 전시한 우타가와의 목판화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도 익숙한 ‘파도’로 유명한 호쿠사이 가쓰시카(Katsushika Hokusai)처럼 대담한 구도와 색상이 아니라 잔잔하고 담백한 느낌이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구마 겐고는 자연 친화적인 우타가와의 작업에서 받은 영감을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 설계에 반영했다고 한다).
바토 히로시게 미술관 탄생담과 비슷하게도, 건물 일부는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택을 개조한 필자의 숙소 역시 알고 보니 이 지역 출신인 한 유복한 집안(이즈카테이)에서 마을에 자택을 기증한 사례다. 또 다른 ‘작은’ 건축이라 할 수 있는 이 호텔은 ‘지속 가능한 여행’을 지향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입실하는 투숙객에게 발품을 팔 만한 인근의 명소를 소개하는 앙증맞은 그림 지도 꾸러미를 제공한다(근처 맛집이나 미술관 카페에서 쓸 수 있는 쿠폰까지 살뜰하게 챙길 수 있다). 다음 날, 연휴 기간이라 오후에나 버스가 온다기에 정갈히 차린 일본식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카페인도 섭취하고 다른 시간대의 풍경도 볼 겸 다시금 미술관을 찾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서노라니 마침 은은하게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먼 곳까지 찾아온 작은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도 건네는 듯한 첼로 연주였다. 미술관 앞 부지와 뒤뜰을 연결하는 트인 공간에서 한 남성이 활을 놀리고 있고,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가만히 서서 듣고 있는데, 대나무 잎 사이로 불어와 얼굴을 간지럽히는 산들바람까지 가세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타지에서 온 여행자에게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시공간이 있을까 싶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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