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현대미술의 수호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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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1, 2011

에디터 배미진

르네상스시대 예술의 후원자가 귀족이었다면 현대미술의 수호자는 명품 브랜드다. 기존의 작품을 투자 차원에서 구입하는 기업의 행위와는 다르다. 현대미술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저변에 큰 가치 투자를 하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예술 후원은 브랜드가 예술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완벽한 예술을 위한 헌신, 현대미술에 날개를 달아주다
예술에서 후원자의 역할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르네상스가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메디치가에서 예술가를 후원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의 후원에 힘입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불려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주문을 받고 제작한 시스티나 천장화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렘브란트에게 화상 오일렌부르크, 아브라함 브란센 같은 후원자가 없었다면 가난과 같은 시련과 난관으로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현대미술에 있어 명품 브랜드의 역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결정적이다. 작게는 오트 쿠튀르를 개최하는 것부터 크게는 현대미술 재단을 설립해 지속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하는 방법까지 명품 브랜드의 자본은 예술계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패션 하우스가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이면서까지 오트 쿠튀르를 개최하는 이유는 단지 브랜드의 명성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새로운 형태의 창조적인 직물과 수공 장식품을 제작하는 공방의 명맥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수백 년간 예술의 도시 파리의 정신을 이어온 공방들의 조합을 지키고 그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기 위해 대규모 패션쇼를 개최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소재와 실루엣을 개발하고 새로운 비주얼을 브랜드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기에, 이 부분은 마케팅과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명품 브랜드와 예술가와의 컬래버레이션 역시 양면성을 띤다. 침체기를 겪던 루이 비통이 그래피티 아티스트 스테판 스프라우스와 현대미술의 총아 무라카미 다카시와 컬래버레이션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은 현대미술에 대한 순수한 후원은 아니다. 예술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의 본질이 왜곡될 뿐 아니라 마케팅의 시녀로 이용되는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루이 비통, 혹은 마크 제이콥스를 만난 이 아티스트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대중에게 더 확실하게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현대미술에 관심이 없던 대중도 일본의 명품 거리인 오모테산도를 뒤덮은 다카시의 작품을 보고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어디선가 그의 작품을 본다면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대중에게 예술적 단서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명품 브랜드의 컬래버레이션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단,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명성을 얻은 후 예술에 대한 순수한 가치를 잊지 않는 도덕적 책임은 예술가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렇듯 명품 브랜드가 다양한 예술가와 컬래버레이션을 하는 것은, 나만의 것을 추구하는 예술적 목적과 명품 브랜드의 발전 방향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스와로브스키는 세계적인 건축가 요시오카 도쿠진과 매장 설계를 하고, 펜디는 ‘디자인 마이애미’라는 정통 디자인 페스티벌을 통해 무명에 가까운 신진 예술가들을 후원한다. 펜디가 이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장인정신과 실험 정신의 조화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향해 가고, 도전 정신을 갖고 높은 완성도를 추구하기 위한 스스로의 채찍질이기도 하다.
The Power of Luxe
상업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예술적 후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것은 까르띠에 재단과 에르메스 재단이다. 1984년 창립된 까르띠에 현대미술 재단은 예술에 대한 기업 후원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예술가들의 창조, 발명, 전시를 지원해 현대미술이 세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예술가들을 후원한 다. 까르띠에 재단이 작품을 구입하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기준은 미술 활동의 다양성과 절충성을 대표하면서 개방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생존 작가의 작품만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을 기록하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은 금전적인 보상이나 명예를 목적으로 개인이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안정적인 방식의 후원이다.
에르메스는 미술 재단 활동을 통해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할 뿐 아니라 최근에는 한국에 ‘H BOX’라는 대규모 설치미술 프로젝트를 유치하기도 했다. 오는 5월 1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되는 모바일 상영 프로젝트인 H BOX는 명품 브랜드의 후원이 없었다면 한국에서 직접 만나보기 어려운 대규모의 전시다. 파리, 스페인, 런던,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선보이게 된 이 전시는 디디에 피우자 포스티노가 설계한 이동식 상영관에서 작가들이 만든 싱글 채널 비디오를 상영한다. 상영관, 여행 키트, 현대판 예술품 진열실과 같은 다양한 레퍼런스가 한데 섞인 이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경험한 작가들이 새로운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수 있게 하는 데 의미를 둔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벤저민 베일은 지속 가능한 예술을 추구하는 데 이러한 명품 브랜드의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에르메스 재단은 작가를 후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의 어떤 부분에도 관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방향성에 맞는 작품을 창작할 뿐이죠. H BOX 역시 온전히 예술가들이 완성한 순수 예술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에 관한 단편을 영상으로 상영하는 이러한 작품은 큰 자본이 필요하지만 전시 기획만으로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예술적 후원이 결정적이죠. 특히 지속적으로 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예술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혼자서 지속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타인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계가 좋은 예술가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명품 브랜드는 장인들과의 오랜 관계를 통해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꾸준한 후원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듯 순수한 접근으로 현대미술을 후원하는 명품 브랜드들은 예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예술의 발전이 명품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명품을 소비하는 이들이 예술의 소비 주체라는 것을 명백히 인정한다. 이렇듯 명품 브랜드들의 후원은 예술 그 자체의 존재 이유를 이해하고,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며 그 저변을 밝히는 수호자 역할을 철저히 하려는 노력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속적인 행보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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