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열정을 뿜어내는 황금빛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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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07, 2017

글 김민서

2008년, 두바이의 아트 페어 아트 두바이(Art Dubai)에 출품한 작품 9점이 모두 판매된 것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아트 두바이 완판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은 채은미 작가.

오랜만에 아트 두바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작가를 청담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올해 아트 두바이 참가는 몇 년의 공백기를 뒤로하고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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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하게 볼록한 금색 사각 큐브가 격자무늬 배열로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주변 공기와 감상자의 심리를 빛으로 표현하며 공간을 장악하는 작품은 ‘아트 두바이 완판 작가’로 알려진 채은미 작가의 황금 큐브 작품이다. 이력에 비해 국내에는 크게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채은미 작가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두바이에서 해마다 열리는 아트 페어 아트 두바이(Art Dubai)에 참가해 3년 연속으로 출품작을 전부 판매했다. 이후 한동안 조용히 작업과 대외 활동을 해오다가 지난 3월에 열린 아트 두바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채은미 작가의 시그너처는 황금이다. 아트 두바이에서 뛰어난 실적을 거둔 것은 아랍권에서 좋아할 만한 금이라는 재료 덕도 크다는 점은 작가 스스로도 일부 인정한다. 하지만 그녀는 작품 일부분에 넣어 재료의 단편적 효과를 누린 게 아니다. 화면 전체에 금을 대담하게 사용해 재료의 물질적 특성은 물론 내재적인 의미에 주목한다. 이제는 작가와 떼어낼 수 없는 ‘짝꿍’이 되어버린 황금은 일찍이 일본 유학 시절에 탄생했다.
“도쿄예술대학 연구생 시절에 우연히 누군가 일본 전통 의상을 입고 다다미 방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작업하는 걸 봤어요. 그 경건함에 이끌려 천천히 다가가니 바닥에서 황금색 빛이 올라오는 거예요. 그 광경이 잊히지 않았어요. 이후로 계속 금색만 눈에 띄었고, 작업을 한번 해봐야겠다 결심했어요.” 채은미 작가는 2000년대 초반에 ‘금박 회화’를 발표했다. 당시 작품은 캔버스에 얇은 금박을 입힌 평면 회화였다. 휴지처럼 얇은 금박을 다루는 건 쉽지 않았다. 단기간에 익힐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작가는 접착제를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옻칠에 눈을 뜨게 됐다. “옻칠은 계속 숨 쉬고 있고 1천 년이 지나도 변색되지 않아요. 금과 같은 옻칠의 영원성에 끌렸어요. 옻칠을 하다 보니 가장 궁합이 좋은 자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금과 옻칠, 자개 등을 다루는 작업이 너무 전통적인 기법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고민하다 보니 작품이 조금씩 변한 것 같아요.”

작품은 점차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변화했다. 사출성형해 도금한 큐브의 순수한 황금색과 자개가 격자무늬로 엇갈려 다양한 효과를 만들었다. 화면의 상하좌우 또는 대각선으로 이어지는 자개가 황금 큐브에 반사돼 바뀌는 모습은 작품이 살아 있는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날씨, 낮과 밤, 조명, 감상자가 입고 있는 옷에 따라서도 작품이 계속 유기적으로 변한다. 작품의 이러한 형태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작가에게 내재된 것이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점차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는 오랜 고민과 연구, 작업에 대한 열정,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다. “미술 이론 공부를 하면서 서양 중심의 미술 사조가 언젠가 아시아로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서양적인 색채를 쫓아가기 싫었고, 다른 재료와 색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고 싶었어요.”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한 발짝씩 나아가는 연구자적 자세는 그녀의 작품과 매우 닮았다. 작품과 대면하는 오랜 시간은 작가에게 성찰의 시간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큐브는 일일이 손으로 붙여야 해요. 조금만 틀어지면 전체가 달라져서 0.1mm 오류도 용납할 수 없어요.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몇 달 정도 걸리죠.” 금박 큐브는 디지털 영상과 만나 한 단계 더 발전했다. 2015년에 선보인 ‘Cube Table TV’는 그녀의 작품이 평면 회화에서 설치미술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채은미 작가는 지난 3월 중순에 열린 아트 두바이에 아주 오랜만에 얼굴을 내비쳤다. 아트 두바이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겪어본 그녀는 아랍권 미술 시장의 가능성을 인정했다. “전반적으로 작품이 세련되어지고 컨템퍼러리 아트가 많아진 거 같아요.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예전에는 컬렉터 대부분이 왕족이었는데, 지금은 두바이에 사업하러 온 외국인들이 많다는 거예요. 아직 열리지 않은 상자 같아요. 앞으로 정말 큰 시장이 될 수도 있겠죠.” 작가 역시 7년 만의 참가인데도 기대보다 많은 관심과 질문을 받았다.
“올해는 자개보다 좀 더 현대적인 작품을 주로 선보였어요. 두바이는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액수가 커요. 제 작품은 서너 개를 시리즈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의치 않고 한 번에 전부 구입하는 고객이 많아요. 당장의 판매에 급급하기보다 앞으로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는 판로를 만들고 싶은데, 그런 작업은 시간이 필요하니까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면 언젠가 이뤄지리라 생각해요.” 활동 재개를 알리는 첫 무대인 아트 두바이에 이어 아트 바젤 홍콩을 다녀온 그녀는 국내 시장보다는 좀 더 큰 세계 무대로 진출하려는 열정과 포부를 지니고 있다. 과거 자신의 예술적 바탕을 뒀던 일본도 염두에 두고 있다.
작가는 2014년부터 ‘위로의 잔’을 만들고 있다. “기독교 미술 단체 ‘아트 미션’과 연말 전시를 준비하면서 누군가 힘들어할 때 밥 먹자고 말하는 것처럼 차 한잔 대접해 위로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 작업으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위로의 잔’을 만들게 됐어요. 그러고는 힘들어하는 지인들에게 하나둘 선물했고, 이후 틈틈이 잔을 만들고 있어요.” 작품으로 누군가 위로하고 싶다는 작가의 모습에서 잠시 작업에서 손을 떼야 했던 고난의 시간이 느껴졌다. 겹겹이 쌓아온 세월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작품에 녹아 들지 그녀의 차기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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