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을 거닐며 영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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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 2015

글·사진 한성필(미술가)

북극과 남극, 쿠바 등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시각예술가 한성필 작가가 최근 평온한 안식을 누리면서 창조적 영감을 담뿍 받는 특별한 유럽 여행을 떠났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어니스트 헤밍웨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찰스 디킨스 같은 대가들이 영감을 받은 이탈리아 마조레 호수와 프랑스 루아르 고성에 머물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은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르네상스가 바로 이 미려한 두 곳에서 정교한 교집합을 이룬다는 것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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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가 흘러가면서 생긴 호수라고 하면 흔히 스위스를 떠올리지만, 알프스 남쪽에 위치한 이탈리아에도 빙하호가 여럿 있다.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는 길이가 약 54km, 폭이 약 12km인,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다. 이 호수 북쪽으로는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호수 남서쪽으로는 피에몬테(Piemonte) 주의 네비올로 와인 산지가 자리한다. 경사 급한 산비탈과 수심 깊은 빙하호의 전형적 특징을 보이는 이 지역은 수려한 풍광과 평온한 분위기 덕분에 ‘에덴의 정원(Il Giardinodell’Eden)’이라고 불릴 정도로 현지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다빈치와 헤밍웨이의 창작 원천, 마조레 호수

이 호반 지역에서도 특히 경치가 빼어난 곳이 스위스의 로카르노(Locarno)와 이탈리아의 스트레사(Stresa)다. 매년 8월 초에 열리는 국제 영화제 개최지로도 잘 알려진 로카르노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도시다. 대표적인 예로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마조레 호숫가에 머물면서 새로운 창작 에너지를 담뿍 받았는데, 로카르노의 비스콘테오 성(Castello Visconteo)을 설계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인상 깊게 발현했다.
밀라노에서 스위스 방향으로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호숫가를 따라 기차로 1시간 남짓 여행하다 보면 스트레사에 다다른다. 부유한 스위스와 이탈리아인들의 휴양지로, 아름다운 별장과 화려한 호텔이 자리한 이 도시는 런던부터 베니스까지 운행한 ‘오리엔탈 익스프레스’가 정차하던 역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탈 특급 살인 사건(Murder on the Orient Express)>과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 등 많은 소설과 영화의 배경지였기 때문인지 더욱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스트레사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추억이 배어 있기도 하다. <노인과 바다>가 헤밍웨이가 주로 머물며 영감을 받은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와 쿠바를 배경으로 한다면, <무기여 잘 있거라>는 바로 이곳 스트레사와 마조레 호수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탄생한 작품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박격포에 부상을 입은 19세의 헤밍웨이는 1918년 9월 이곳 스트레사의 그랜드 호텔(Grand Hotel des Iles Borromees)에 머물렀고, 10년 뒤 그의 경험과 상상력에서 이 명작이 태어났다. 그는 스트레사와 마조레 호수를 “이탈리아 호수 중 가장 아름답다”라고 찬미하면서 몇 번씩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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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숨은 명소, 보로메오 제도
마조레 호수에는 이 지역 출신 추기경으로 ‘호수의 수호자’로 여겨진 카를로 보로메오의 이름을 딴 보로메오 제도(Isole Borromee)라고 불리는 여러 섬이 있다. 그중 현재 보로메오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벨라 섬(Isola Bella, 아름다운 섬)은 작은 어촌의 바위섬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런데 1632년경 보로메오가 아내를 위해 로코코 양식의 아름다운 보로메오 궁전(Palazzo Borromee)을 지으면서 환골탈태했다. 이 유서 깊은 집안은 가문의 딸과 모나코 왕국 그레이스 켈리의 손자가 최근 결혼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역시 이 섬을 동경했다. 그는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에서 게오르그 멜히오르 크라우스(Georg Melchior Kraus)라는 독일인 화가가 그린 8점의 마조레 호수 수채화 작품을 참고해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재미있는 사실은 괴테는 이곳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고 그저 상상력으로만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마조레 호숫가에서 가장 큰 섬인 마드레 섬(Isole Madre)은 전체가 식물원과 동물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다양한 나라에서 들여온 알록달록 신기한 조류와 희귀한 식물로 가득 찬 곳이다. 또 과거 어업에 종사하는 어부들이 살았기에 ‘어부의 섬(Isola Pescatori, 페스카토리 섬)’이라고도 불리는 수페리오레 섬(Isola Superiore)은 아기자기한 골목과 식당, 숙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호수 주변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보면 예전 귀족들이 살던 성이나 별장이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몇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성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오래된 마을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평안함을 만끽할 수 있다.
프랑스 르네상스와 루아르 고성의 내밀한 이야기

‘예술의 나라’라고 하면 대다수가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떠올릴 것이다. 15세기부터 꽃피운 르네상스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밀라노공국, 피렌체공국, 베네치아공국, 만토바공국, 제노바공국 등 수많은 공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피렌체공국이 메디치 가문의 주도로 르네상스를 탄생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예술가를 키워왔다면, 밀라노공국은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 아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의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그들의 궁정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스포르차 가문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당시 30세의 다빈치를 초대해 후원했고, 이를 통해 그는 17년간 밀라노공국에서 30~40대의 젊음을 불태우며 ‘최후의 만찬’을 포함한 6점의 그림을 남겼다.
16세기 이후 국력이 약화된 이탈리아의 공화국 체제는 점차 와해됐고, 르네상스도 저물기 시작하지만 이 시기의 프랑스는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경제적으로는 중상주의 정책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탄생했고, ‘지리상의 대발견’을 통한 부의 집중화가 이뤄졌으며, 정치적인 면에서는 봉건 영주들이 중립을 유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를 손에 넣기 위해 원정을 떠난 프랑스 왕들은 풍부한 문화와 르네상스에 대한 경이를 느꼈다. 특히 르네상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수아 1세(Franc¸ois 1, 1494~1547)는 국운이 기울어가는 모국을 떠난 재능 있는 이탈리아 예술가, 학자, 건축가를 프랑스로 초청함으로써 자국에 르네상스를 이식하고 문화를 꽃피우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 강을 따라 찬란한 역사와 문화가 솟아났다. 천혜의 자연으로 ‘프랑스의 정원’이라 불리는 이 일대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운 아름다운 70여 개의 고성이 줄지어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루아르 계곡에 터를 둔 고성의 역사는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커다란 동경을 품었던 프랑수아 1세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중세에 방어용 성채였던 앙부아즈 성(Cha^teau d’Amboise)에 이탈리아 양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화려한 연회를 위한 장식적인 성으로 그 성격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후 강가와 계곡에는 중세적 유산과 르네상스 양식의 뛰어난 조합으로 프랑스식 건축양식을 꽃피운 다양한 성이 들어섰다. 이 다양한 고성들은 저마다 독특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프랑스 동화 작가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의 경우에는 위세 성(Cha^teau d’Usee)의 낭만적인 풍경에 매료돼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창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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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모두 사랑한 이유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는 왜 그의 모국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터를 잡고 있을까?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존경과 경외로 맞이한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를 찾은 레오나드로 다빈치에게 앙부아즈 성과 지하로 연결된 클로 뤼세 성(Cha^teau du Clos Luce′)에 머물도록 했다. 다빈치는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올 당시 미처 완성되지 못한 주옥같은 작품을 함께 가지고 왔는데, 여기에는 ‘모나리자’도 포함돼 있었다. 이 때문에 1516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519년까지 3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른 프랑스는 다빈치의 최고 수작을 포함해 가장 많은 작품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16세기 프랑수아 1세가 착공해 17세기 ‘태양왕’ 루이 14세 때 완성한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 중앙에 위치한 특이한 이중 나선형 계단 역시 당시 프랑스에 머물던 다빈치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빈치와 그의 후원자이자 프랑수아 1세의 우정과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는 한층 더 윤색됐고, 앵그르 같은 프랑스 화가들은 이를 천재 예술가가 프랑스 국왕의 품에 안겨 임종을 맞이한다는 감동적인 내용의 시각화된 그림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실제로 앙부아즈 성에 딸린, 사냥꾼의 수호성인 이름을 딴 생 위베르 교회(Chapelle Saint-Hubert)에는 다빈치의 유해 일부가 묻혀 있고, 이탈리아풍 정원 앞에 있는 최초의 다빈치 무덤 자리에는 그의 흉상이 자리 잡고 있다. 다빈치를 낳은 것은 이탈리아지만,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열악한 문화를 한 단계 전진시키는 근간을 마련한 것은 프랑스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문화 예술 강국의 면모를 지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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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서 삶과 창작을 만끽하라

유럽은 성(城)의 역사로 풀어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과거에 성은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군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성들이 르네상스의 향기와 어우러져 미적인 기쁨을 제공하는 곳으로 성격이 바뀌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많은 고성이 관광지나 호텔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문화와 역사의 흔적은 아직까지도 살아 숨 쉰다. 필자는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고성에 초대받아 2015년 7월에는 마조레 호수의 프리노 성(Castello di Frino)에, 9월에는 루아르 강가의 쇼몽 성(Cha^teau de Chaumont-sur-Loire)에 머물면서 작업할 기회를 가졌다.
다른 문화권과의 낯선 대면은 창작으로 재탄생된다. 다빈치가 그러했듯이 현대의 예술가들이 타 문화와 직접 충돌하는 노매드적인 도전을 하는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흔히들 동서양은 사고방식이 판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극(極)과 극은 통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유럽의 고성에서 생활하면서 개념적인 현대미술을 창조하는 것은 옛것을 연구해 새로움을 알아나가는 동양적인 사고인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발현하는 다른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고즈넉한 고성에서의 체류는 비단 예술가뿐만 아니라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예술의 향기를 통해 삶의 철학을 성찰하게 해주는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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