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로 도시 읽기: 아를(Arles) 사례 프로방스의 작은 도시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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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3, 2024

글 고성연 l 사진 고성연

우리가 흔히 ‘남프랑스’라 부르는 프로방스(Provence)는 웬만해선 사랑에 빠지지 않기가 힘들 정도로 매력이 흘러 넘치는 지역이다. 어떤 몹쓸 상처라도 포근히 보듬어줄 것만 같은 따사롭고 정겨운 빛의 고장,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영혼의 안식처 같은 은혜로운 역할을 꾸준히 해온 건 비밀이 아니다. 더구나 자동차로 20~30분 정도만 달려도 저마다 다른 풍광과 분위기를 지닌 소도시가 끝도 없이 등장하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은 여행의 묘미를 한껏 살려준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여러 나라를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프로방스의 아기자기한 도시는 대부분 수차례 방문해도 질리지 않고 ‘최애’를 꼽기도 힘들지만 기나긴 팬데믹 기간이 지나고 제일 먼저 들러보고 싶은 순위권에는 아를(Arles)이 최상단에 위치했다. 명예로운 유네스코 헤리티지 사이트여서가 아니라, 일종의 직업병일 수도 있겠지만, 5년 전쯤 찾았을 때 유의미한 변화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기에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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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Arles)은 지역의 시즌 행사이자 관광 상품으로 여전히 투우 경기가 열리는 원형경기장을 비롯해 로마 유적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고색창연한 소도시다. ‘책’으로만 접했다면 많은 이들이 반사적으로 ‘고흐’를 떠올리게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고작 15개월 정도 머물렀지만 2백 점 넘는 회화를 남겼고 폴 고갱과의 에피소드로 후대에 엄청난 유명세를 얻은 지명이어서다. 그래서 프로방스의 팔색조 매력을 단기간에 섭렵해야 하는 수많은 여행자들은 고흐의 작품에 등장하는 포름 광장의 노란 카페에 들르거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로마 유적을 훑는 ‘필수 루트’를 소화한 다음 이웃 도시로 떠나버리기 일쑤다. 예쁘장하고 사랑스러운 인상을 간직한 채 말이다. 필자도 첫 방문에 그럴 뻔했지만, 우연히 아를의 대표적인 미술관인 뮈제 레아튀(Muse´e Re´attu)에 들러 한 큐레이터와 얘기를 나누다가 살짝 놀라운 증언(?)을 접하게 됐다. 아를에 관심의 촉수가 날카롭게 뻗치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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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민에게 다가서는 루마 아를(LUMA Arles)
그의 말인즉슨, 과하게 표현하자면 예전에는 “저주받은 마을이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푸념과 냉소적 운명론이 지역 주민 사이에서 불거지곤 했던 도시가 바로 아를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적 풍요나 성장을 누리지 못한 정체된 곳이었다는 것이다. 투우와 고흐의 낭만으로 각인될 수도 있던 이미지에 다소 균열을 일으키는 발언이었고, 당시 아를에는 구겐하임 빌바오로 유명한 세기의 스타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hery)가 설계를 맡아 완공 전부터 화제가 된 새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던 터라 의아하기도 했다. 바로 ‘루마 아를(LUMA Arles)’이라고 불리는 복합 단지의 중심축으로 솟아오른 ‘더 타워(The Tower)’라는 건물이다. 프랭크 게리 특유의 강렬한 디자인 스타일을 반영한 이 9층짜리 건물은 멀리서 보면 기하학적으로 깔끔하게 구겨진 금속의 물결 같은 파사드가 인상적인데, 알고 보면 저마다 미묘하게 다른 크기로 정교하게 만든 11만5백 장의 스테인리스 스틸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미술을 비롯한 문화 예술 콘텐츠를 품은 전시 공간은 물론 강당, 도서관, 아티스트 작업실,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당시에는 공사 중이었던 터라 출입이 제한적이었는데, 다시 루마 아를 단지를 찾아 명실공히 도시의 현대적인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이 건물(2021년 6월 오픈) 옥상에 올라가 보니 도시 전체가 그야말로 한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에는 원형경기장을 닮은 듯한 원통형 건물이 어째서 창의성을 불러모으는 ‘등대(light house)’ 같은 역할을 부여받았는지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빛에 따라 다른 색조로 물드는 이 묘한 매력의 ‘더 타워’를 중심으로 한 루마 아를 단지 전체는 면적이 27에이커(약 109,265㎡)에 이르는 ‘파르크 데 아틀리에(Parc des Ateliers)’라 불리는데, 공원에 둘러싸인 철로와 공장 등이 있던 버려진 부지를 되살린 ‘재생 건축’ 사례다(뉴욕에 기반한 건축 사무소인 셀도르프 아키텍츠와 조경 전문인 바스 스메츠가 맡았다). 이 대대적인 프로젝트의 배경에는 글로벌 제약 그룹의 상속자로 아를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마야 호프만(Maja Hoffmann)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녀가 2004년 설립한 스위스 취리히의 루마 재단에서 추진한 프로젝트의 결실이 2021년 초여름에야 ‘완공’으로 대중에 드러난 것이다. 사실 프로젝트 진행 시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돈질’로 아를의 모든 걸 바꾸려 하느냐는 관점이 부정론의 핵심이었다. 마뜩잖은 눈길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긍정론이 우세한 듯하다. 놀랍도록 다학제적인 공간에 아이들이 노닐고 학습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데다, 동시대 최고 예술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각종 기획전이 ‘무료입장’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개방성 덕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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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호프만이 시도하는 문화 예술 기획의 힘, 그 현주소
겨울철에 방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를은 여전히 삶의 속도가 꽤 느려 보였고, 어쩌면 첨단 시설에 익숙한 글로벌 여행자에게는 다소 불편한 도시이기도 했다. 고속철(TGV) 노선이 없는 기차역에는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앱으로 부를 수 있는 우버도 없었다. 사실 도심 자체가 워낙 작은 데다 쏠쏠한 볼거리도 많기에 슬슬 걸어 다니기에 전혀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그렇게 구글 지도 앱을 켜놓은 채 열심히 다니다 보면, 마야 호프만이 자신의 고향처럼 여긴 이 도시에 물심양면으로 쏟아부은 노력에 의한 변화의 흔적을 여러모로 알아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못마땅한 시선이 존재하는 이유도 잘 뜯어보면 은근히 다방면에 걸쳐 그녀의 손길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루마 아를을 비롯해 이 도시의 자랑인 유서 깊은 사진 축제와 전문 학교 후원, 동시대적 예술성을 반영한 흥미로운 호텔과 파인 다이닝 개발 등 실로 다채롭다. 느린 속도에 익숙한 아를 사람들로서는 꽤 강도 높은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 같은 나그네에게는 여전히 고풍스러운 도시에 현대성이 요소요소 과하지 않은 양념처럼 뿌려져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 호프만의 회사에서 운영하는 세 호텔의 방을 합치면 91개 정도 되고, 이는 아를 전체에 있는 객실의 6%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이 수치를 루마 아를 홈페이지에 굳이 공개해놓은 걸 보니 얼마나 시달렸으면,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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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도시 풍경에 영감을 더해주는 요소
아마도 많은 이들이 가장 반길 만한 변화는 건축, 디자인, 예술, 공연, 과학 등 한 단어로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다면적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루마 아를의 존재와 더불어 ‘고흐’를 대중에 돌려준(?) 점일 것이다. 아를에는 반 고흐 재단 미술관이 있는데, 사실 고흐가 스쳐갔던 프로방스와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 같은 소도시의 기관이 그렇듯 작가의 원작을 소장하고 있지는 않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라는 1점의 작품만 판매한 채 요절한 그의 안타까운 커리어를 생각하면 ‘웃프지만’ 말이다. 하나 이는 아를의 사정일 뿐 관람객은 왜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 작품을 잘 볼 수 없느냐고 볼멘소리를 하기 마련이었다(가끔 고흐의 드로잉 전시 같은 행사 가 있기는 했다고 한다). 부친에게서 바통을 넘겨받아 반 고흐 재단을 맡은 마야 호프만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미술관과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해 다른 기관 혹은 컬렉터의 소장품 대여나 기획전 등을 통해 대중이 고흐를 늘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는 역시 마야 호프만과 연이 있는 아티스트들을 위한 영감 넘치는 레지던시 공간이 있는 건물도 자리한다. 5년 전의 아를 방문에서 맞닥뜨린 또 하나의 반가운 발견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의 미술관 공사 현장이었다. 이우환과 프랑스의 인연은 꽤 오래 이어져왔다. 2008년부터 세계적인 현대미술가들을 초대해 궁과 정원에서 전시를 펼치며 역사적 공간을 새롭게 해석하는 ‘베르사유’ 프로젝트에도 초대된 바 있는데(2014년), 그가 16~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를의 고택을 자신의 미술관(Lee Ufan Arles)이 들어설 공간으로 택한 것이다. 나오시마와 부산에 있는 이우환의 미술관에 가봤다면 전시 구성 자체는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수백 년 된 천장을 품은 공간과 ‘시간성’과 연결된 그의 절제미 담긴 작품의 만남은 또 다른 앙상블을 자아낸다. 일단 들어서면 훨씬 더 넓고 우아한 이 미술관은 아티스트들의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일 예정이라니, 아를에는 과거를 잇고 현재와 소통하는 의미 있는 역동성이 더 새롭게 솟아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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