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코리아의 유산, 건축가 이타미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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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 2011

글 임진영(건축 전문 기자)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건축가 이타미 준이 지난 6월 26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흐르던 그의 건축은 남아 자연의 내재적 존재감과 지역에 대한 통찰을 담은 감동을 전하고 있다.


    

      



제주에 가면 그의 건축물이 있다. 포도 호텔, 제주 핀크스 클럽 하우스와 수·풍·석미술관, 두손미술관과 방주교회, 그리고 비오토피아 타운하우스 등 건축가 이타미 준의 대표작은 제주에서 유독 빛이 난다. 아름답지만 혹독한 자연환경과 지역 특유의 풍토가 강한 제주야말로 자연에 반응하고 건축의 야성미와 추상, 엄숙함과 고요함을통해 건축의 본질적인 감동을 전하고자 하는 이타미 준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왕성한 활동으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던 70대 노장 건축가는 이제야 비로소 자유로운 건축을 하고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지난 6월 26일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 경계인의 삶

그의 본명은 유동룡이다. ‘이타미 준’이 예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귀화를 포기하고 일본에서 건축 사무소를 내기 위해 만든 예명은 그가 해외에 나갈 때 처음 이용한 이타미 공항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한국 사람, 일본 사람을 떠나 세계인으로 살겠다는 다짐이담긴 이름이다. 여기에 일본에서 깊은 교류를 나눈 작곡가 길옥윤과 같은 한자인 준[潤]을 써서 완성한 ‘이타미 준’은 건축가로서 그의 이름이 되었다. 일본에서 그는 언제나 유동룡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이타미 준으로 불린 재일동포 2세의 삶을 살았다. 그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이타미 준이 예술가로서, 개인으로서 뿌리내리고 있는 곳은 언제나 한국이었다.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찾은 한국 여행에서 그는 한국의 고미술과 예술품이 지닌 기품과 온화함에 매혹되었다. 조선의 민화와 달 항아리, 가구와 소품을 수집하며 한국의 미에 대한 심미안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조선의 예술에 애정을 보인 건축가였다. 일본 건축에서 자연과 대화를 나누는 방법과 무(無)의 느낌을 익혔다면 한국 건축에서는 자연과 공존하는 중용사상과 멋이라는 정신적인 깊이, 은은한 온기와 소박함을 배웠다고 말한 바 있다.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뿌리를 의식할 수 있었던 이타미 준의 태도는 결과적으로 그의 건축에 한국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아내게 했다. 2003년 파리의 국립기메동양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제목은 이타미 준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일본의 한국 건축 가, 이타미 준’이다.

돌, 흙, 물과 바람을 담은 건축

이타미 준의 초기 건축에서는 건축의 야성미가 묻어난다. 그는 돌, 흙, 나무, 바람, 물과 같은 자연적인 소재에 관심을 두었는데, 거친 질감이 드러나도록 해 ‘현대 건축에 결여된 따스함과 야성미’를 추구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 있는 미묘한 어둠을 담은 ‘먹의 집(1975)’, 돌의 원초적인 성질을 균형 있게 활용한 ‘조각가의 스튜디오(1985)’, 홋카이도의 ‘석채의 교회(1991)’와 고층 건물에 돌과 콘크리트의 대비를 적용한 ‘엠빌딩(1992)’, 시골 민가에서 모티브를 얻어 흙을 통해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고자 한 ‘온양미술관’ 등은 자연적인 소재가 지닌 질감의 존재감과 무게를 통해 시간과 공간의 긴장된 관계를 보여준 작품이다. 한국에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각인의 탑’은 폐자재 돌의 거친 질감을 노출시키면서도 강인한 형태를 통해 원초적인 조형의 순수성을 표현한 건축물이다. ‘자연적인 소재의 농도와 재질이 주는 묵직한 존재감’이야말로 현대 건축이 놓치고 있는 본연의 순수한 감동이라고 본 것이다. 최소한의 인공적인 손길로 자연 재료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태도는 이타미 준의 건축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다. 이타미 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 호텔(2001)에 이르면, 건축이 자연 풍광에 어떻게 대응 할 수 있는지, 제주라는 지역적 특색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순수한 조형과 재료의 물성이 만들어내는 건축 공간이 어떤 감동을 주는지가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주의 오름에서 영감을 얻은 지붕은 마치 초가지붕의 곡선처럼 부드럽게 이어져 포도송이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포도 호텔이 주는 감동은 단지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비정형으로 배치한 객실을 한 지붕 안에 모으고 조금씩 틀어진 객실의 틈 사이로 주변 풍경을 담아냄으로써 호텔 자체를 내부에 길을 두고 하나로 이어지는 마을처럼 구성했다. 유연하게 엮인이 배치는 내·외부 공간의 풍요로움을 만들어낸다. 무엇보다 이타미 준이 전하는 감동은 객실 문을 열었을 때 와락 감겨온다. 높은 층고를 지지하는 굵은 나무의 간결한 구조와 질감이 주는 공간의 고요함, 창밖으로 뻗어나간 퇴청을 변형한 데크, 그 너머까지 이어지는풍경은 한옥의 공간감을 지니되 이를 현대적으로 성찰해낸다.

자연과 건축이 곧 예술, 핀크스미술관

포도 호텔이 한옥의 포근한 공간감과 비정형 배치에서 이뤄낸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면, 자연과 순수한 형태, 재료의 물성과 추상성을 통해 공간에 엄숙함과 고요함을 부여한 것은 핀크스미술관연작이다. 명상과 사색의 공간을 위해 만든 이 미술관은 별도의 전시품을 두지 않고 자연과 건축물이 곧 전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각각 물, 돌, 바람을 담았다. 수미술관은 원형으로 열린 하늘 아래 사각 평면에 물을 담아 바람에 흐르는 물결처럼 정적인 공간을 만들었다. 석박물관은 점점 풍화되는 붉은 코르텐강으로 만든 단순한 상자로, 작은 돌을 두고 멀리 제주 산방산의 풍경을 끌어들였다. 뿐만 아니라 천장의 실린더를 통해 시시각각 떨어지는 빛의 변화를 경험하게 했다. 풍미술관은 제주의 바람을 담기 위해 활처럼 휘게 한 오두막 형상의 나무 상자다. 입면의 나무판 사이에 틈새를 내 바람이 통과하도록 했는데,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 그곳에 서 있으면 건물 전체가 바람이 연주하는 악기가 된다. 시적인 은유, 자연에 대한 사유, 무엇보다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체험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추상적인 건축물은 이타미 준이 내밀하게 시도해온 건축의 본령, 즉자연과 야성, 추상을 모두 보여주는 작업이다. ‘자연과 함께 익어가는 건축’이라는 말처럼 핀크스미술관은 폐허가 되더라도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건축에 대한 이타미 준의 꿈을 축약해놓은 셈이다.

언제나 묻는 것은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라는 물음

건축에 대한 이타미 준의 생각을 잘 나타내는 말은 바로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For whom architecture is)?”라는 물음이다. 풍토에 적합한 건물을 짓고, 그 장소의 흔적과 인간적인 스케일을 반영하며, 자연 재료의 질감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건축을 통해 전할 수 있는 감동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건축은 ‘인간에 대한 찬가’이자 ‘자연 속에서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바치는 또 다른 자연’인 것이다. 이타미 준은 새로운 조형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해온 건축가이기도 하다. 순수한 조형성을 탐구했지만, 이는 형태를 위한 것은 아니다. “조형의 순수성을 획득하기 위해 토지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그 문화의 흐름을 추출해야 한다. 강인한 염원을 담은 조형 감각과 자유로운 시대정신을 겸비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작위적인 방식이 아니라 지형과 자연 안에서 정제된 형태를 이끌어내어야 함을 말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이타미 준을 있게 한 것은 지역성과 토착성에 대한 치열한 의지일 것이다. 건축은 철마다 바뀌는 자연 풍경이 함께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고 한 이타미 준은 ‘현란한 조감도와 화려한 건축 어휘, 거대하게 솟은 랜드마크가 시선을 끄는 척박한 시대에 전통적 가치, 근대의 가치, 재료와 건축 본질을 이야기해
온 건축가’다.

머리가 아닌 따뜻한 가슴으로 건축하다

2009년 제주 방주교회를 선보였을 때, 이타미 준은 또 다른 시대에 진입한 듯했다. 재료의 질감, 구조와 공간의 일체화, 절제된 조형성까지, 완성도 있는 건축을 선보였지만 무엇보다 그의 건축적인 아이디어가 꽃을 피운 것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징크(zinc, 아연 패널)로 생동감 있는 모자이크를 연출한 지붕이다. 역동적으로 흘러가는 대지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하늘과 빛이 달려가는 듯한 이미지를 떠올려 만들었다는 방주교회는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자유로움과 생동감으로 반짝인다. 어쩌면 이타미 준은 건축가 김중업의 건축을 통해 던진 “한국에서 모더니즘 건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승화시켜나간 건축가일 것이다. 한 비평가는 이러한 그의 건축을 ‘모던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칭했다. 한국성을 발견하며 끊임없이 지역적성찰을 한 그의 건축 스타일을 두고 ‘건축 그 자체가 현대미술이며,토속적인 소재로 추상미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경계에서 더 치열했을 한국성에 대한 통찰, 조형의 순수함과 인간의 사색을 드높이는 공간에 대한 탐구는 방주교회를 기점으로 모던 코리아를 넘어 이타미 준의 자유로운 건축 세계를 더욱 굳건히 해준 듯했다. 이타미 준과의 예상치 못한 이별이 주는 안타까움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지난 7월 15일 한국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이타미 준의 맏딸이자 건축가인 유이화 소장(아이티엠[ITM] 건축 연구소 한국 지사 대표)은 “아버지이자 스승, 선배이며 머리가 아닌 따뜻한 가슴으로 건축하는 법을 아는 건축가”라는 말로 그를 기리며 이타미 준 의 건축을 이어나갈 것을 다짐했다. 재일교포 2세 건축가라는 경계 에서 누구보다 한국의 미를 탐구했던 건축가 이타미 준. 치열한 지 역성, 재료, 풍토에 대한 고민을 통해 자연과 추상, 건축의 야성이 라는 고루하고 진부한 단어를 설득력 있는 조형으로 풀어낸 장인. 그는 이제 경계에서 자유롭게 날아올라 더 심오한 가치를 지닌 건축 철학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는 우리 문화에서 다시 물어야 할 숙제, 새로운 모던 코리아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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