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아홉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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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 2020

글 정성갑(한 점 갤러리 ‘클립’ 대표) | 포토그래퍼 노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굴’

이 집을 알게 된 후 운 좋게 몇 차례 더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서울에서 멀지 않지만 집 주변에 온통 너른 자연이 펼쳐지는 곳. 모든 창문에서 숲과 밭이 보이는 덕에 창가에 앉아 빛만 좇고 있어도 좋은 집. 그렇게 그곳에 있다 보면 집이 주는 위로와 따뜻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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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월, 월월월”

마당에 차 들어오는 소리가 나자 아홉칸집을 지키는 코르뷔지에가 목청을 높여 반긴다. 맞다. 르 코르뷔지에의 그 코르뷔지에. 건축가와 건축, 그중에서도 르 코르뷔지에를 특히 좋아하는 이 집의 주인 고경애·이상욱 부부는 반려견인 프렌치 불도그에게 코르뷔지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때문에 이 집을 찾는 사람 중 건축에 조예가 있는 이들은 코르뷔지에를 보며 “코르뷔지에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넨다. 코르뷔지에는 이 집을 설계한 네임리스건축이 “OK, 한번 지어봅시다” 하고 마음을 먹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 나은중 소장은 “설계를 의뢰하는 이메일을 받았는데, 거기 이렇게 적혀 있더라고요. ‘지금 만 두 살인 첫째 아이를 미래의 건축가로 키우고 싶은 야심 찬 꿈을 가지고 있어 키우는 강아지 이름도 코르뷔지에로 지었습니다.’ 건축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 만나기 전부터 호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네임리스건축과 에이리(AeLe, 아내 고경애와 남편 이상욱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와 조합한 이름) 가족은 건축가와 건축주로 경기도 광주 노곡리에 집을 짓게 된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땅이 있었나 싶을 만큼 사방에 숲과 밭이 펼쳐진 이 집의 이름은 ‘아홉칸집’. 총 9개의 ‘칸’이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구조와 미감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우리 주변의 집을 생각해보자. 안방과 아이 방, 거실과 부엌 등으로 공간의 구획과 목적이 정확하게 나누어진다. 방에는 어김없이 문을 단다. 난방과 프라이버시를 생각해야 하니 당연한 장치다. 그런데 아홉칸집에는 그런 ‘고정적 쓸모’가 없다. 네임리스건축을 이끄는 나은 중·유소래 건축가가 그린 최초의 설계 아이디어를 보면 반듯한 사각형에 + 표시가 한 줄에 3개씩, 총 9개가 그려져 있다. + 표시가 의미하는 것은 벽. 공간을 나눠야 하니 벽을 설치하긴 하되 한쪽 면을 다 막는 길고 두꺼운 벽이 아니라 칸막이나 병풍처럼 최소한의 가림막 역할만 하는 벽이다. 그렇게 총 9개의 공간을 배치했는데, 부부 침실과 욕실에만 문을 달고 나머지는 모두 오픈해 계절의 빛과 바깥 풍경에 따라 거실과 다이닝 룸, 서재의 위치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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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햇빛과 바람은 꼭 있어야 한다”

생기 넘치는 집사, 코르뷔지에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가 눈에 담는 집은 오늘도 아름답다. 구름도, 하늘도 그림 같은 초가을. 초록 정원을 지나 보이는 밭의 풍경이 한가롭다. 이 집에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져 푹 눌러앉고 싶어지는데, 곳곳에 일렁이는 밝고 환한 기운 덕분이다.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일등 공신은 아홉칸집의 중앙에 자리한, 동그란 천창에서 쏟아지는 빛이다. 천창을 통해 집 안에 떨어지는 빛의 덩어리는 해의 위치에 따라 계속 움직인다. 천창이 커 두껍게 쏟아지는 빛은 아이들 책장도 비추고 주방 쪽 바닥으로 길게 떨어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길이와 형태를 바꾼다. 코르뷔지에는 그 빛을 따라 계속 움직이면서 일광욕을 한다. 졸린 눈으로 그 빛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고경애 씨 역시 가만히 앉아 빛 좇는 걸 좋아한다. “요즘 날씨가 정말 좋잖아요. 밖에 나가 그 볕을 느껴도 좋지만, 집에 들어오는 빛은 또 다른 것 같아요. 우리 집 식구 중 제가 집에 제일 오래 있는 만큼 항상 빛을 느끼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빛이 계속 머물러요. 그러다 보니 꼭 제 곁에 있는 것 같아,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아요. 햇살이 모두에게 쏟아지는 신의 축복이라면서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고요. 바람도 정말 좋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창문을 다 여는데, 그러면 바람이 통하는 게 느껴져요. 통풍이 잘된다는 뜻이죠. 막힌 방이 많지 않아서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어요. 막 내가 칭얼대면 문 닫고 어디 가서 좀 쉬고 싶은데 주변을 돌아보면 다 열린 채 연결돼 있는 거예요. 남편한테 ‘자기는 힘들 때 어디서 쉬었어?’ 하고 물어보니 화장실에 갔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웃음) 저는 육아가 힘들면 그냥 울어버려요. 숨어서 울 데가 많지 않으니 장소를 가리지도 않죠. 그러면 애들이 와서 보듬어줘요. 그런 식으로 가족끼리 더 끈끈해져요. 집에 햇빛과 바람은 꼭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아홉칸집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마감재다. 평지붕의 긴 처마를 한 단층 집은 안팎을 모두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심지어 욕조와 세면대, 주방 조리대와 테이블까지. 게다가 노출 콘크리트는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거칠다. 에이리 가족과 네임리스건축이 서로 호흡을 맞추며 집을 지은 과정은 <코르뷔지에 넌 오늘도 행복하니>란 책으로도 출판됐는데 ‘콘크리트’ 파트를 보면 거푸집을 떼고 드러난 거친 속살을 보며 나은중 소장이 마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에이리 가족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정하지 말고 그냥 이대로 두면 어떨까요? 거칠어서 좋아요. 크고 작은 흠과 깨진 모서리도 메우지 말고 그냥 두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천장에 물이 얼룩진 자국도 없애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짜 동굴 같아서 더 좋아요.” 언뜻 미완성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한 집 내부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푸근하고 세련됐다. 집 밖은 온통 녹색의 자연. 풍경이 더없이 화려한 셈인데, 집 내부는 커다란 돌덩어리처럼 무던하고 무심한 기운을 풍겨 계절에 따라 표정과 색을 달리하는 자연의 변화가 더 드라마틱하게 와 닿는다. 회색과 녹색의 콘트라스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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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와 조명, 그림과 음악으로 빛나는 스타일

회색 콘크리트 집 안을 채운 가구와 조명은 한 점 한 점 모두 공들여 고른 ‘진짜로 좋은’ 것들이다. 고경애·이상욱 부부는 결혼일을 기념하며, 아이의 생일을 기념하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며 집에 들일 가구와 조명을 하나씩 신중하게 들여놓는다. 그렇게 이사무 노구치의 원형 테이블과 임스 부부의 다이닝 체어, 르 코르뷔지에의 암 체어와 라운지 체어, 독일 가구 브랜드 E15의 원목 침대가 들어왔다. 최근에는 7개월을 기다린 끝에 E15에서 만든 원목 테이블을 받았다. “원래 3~4개월이면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됐어요. 상판부터 다리까지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 아주 견고한 제품이에요. 우리 집에 있는 가구는 거의 오래 기다렸다가 받은 것들이에요. 우리가 기다리는 걸 잘하거든요.(웃음) 가구도 건축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좋은 작품을 만나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그렇게 기다렸다 받으면 기분이 더 좋고요. 애착도 가고요.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고르다 보니 가볍고 금방 살 수 있는 물건은 안 고르게 되더라고요.” 결혼기념일에 LP 플레이어를 새로 들여놓았다.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로 명성 높은 쳇 베이커의 음반도. 결혼한 첫해에 구비한 스피커 바우어앤윌킨스(Bowers&Wilkins)의 스피커에서는 인터뷰 내내 쳇 베이커의 명반 <싱스(Sings)>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집을 채우는 가구와 음악까지 하나하나 자신들의 리듬과 취향, 스타일로 채운 집. 아홉칸집에 가면 늘 좋은 기운을 얻는 이유다. 집을 빛내는 조연으로 고경애 작가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전작을 보면 우울하고 슬픈 기운의 작품도 많은데, 어느 순간부터 화폭에 볕이 일렁이는 듯 화사하고 밝은 작품이 많아졌다. 화폭을 가득 메운 강아지풀 그림에는 작은 풀벌레가 앉아 있고, 아이들이 코르뷔지에와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던 날을 표현한 그림에는 파란 물줄기가 춤을 추고 분홍색 하늘이 펼쳐진다. 한눈에 마음을 빼앗기는 색감의 그림들. “색을 정말 잘 쓰시네요” 하고 말하자 고경애 작가가 화답한다. “이 집에 살면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정경을 시리즈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거든요. 빛깔은 제가 상상해서 만든 것이 아니에요. 다 직접 본 거죠. 이곳에 있으면 빛이 분홍색으로도, 주황색으로도, 노란색으로도 보일 때가 있거든요.”

집을 짓게 되면 새로운 이야기가 쌓인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도 하나둘 약속처럼 찾아온다. 그러다 보면 집을 한 채 또 짓고 싶다, 이번에는 콘크리트 대신 나무집을 지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사는 집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집과 삶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더 좋은 삶을 계획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집 짓기’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에이리 가족도 마찬가지다. “아이들하고도 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요. 딸아이는 산타 할아버지가 와야 하니까 굴뚝이 꼭 있어야 한대요. 아들은 2층집을 지어야 한다고 하고. 집을 짓고 나면 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꿈이 생기는 것 같아요. 좀 더 잘 살고 싶고 좀 더 행복해지고 싶은 거예요. 이 집 위에 한층을 올릴 수도 있고, 뒤뜰에 추가로 집을 지을 수도 있을 듯 해요. 집 짓는 이의 행복과 보람을 또 한번 꼭 경험해보고 싶어요. 그때도 건축가로는 물론 네임리스를 택할 거예요.”
고경애 작가는 집을 사람에 빗대 이야기하곤 했다. 이제 세 살이 됐다고, 어떻게 변해서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고. 예전에는 몰랐던 모습을 한 해 한 해 새롭게 보게 된다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겨울이에요. 다 비워지는 시간이죠. 나뭇잎이 떨어져 주방 창문 너머 저 멀리 세종마을로 들어가는 길까지 보여요.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죠. 이사를 온 첫해에 겨울 기온이 영하 17℃였어요. 작년에는 따뜻했는데, 그러다 보니 올해 벌레며 개구리가 엄청 많아지더라고요. 잔디밭에서 뱀이 개구리 잡아먹는 걸 우리 집 식구 모두가 거실 창으로 본 적도 있어요. 생태계라는 게 정말 예민한 거구나, 처음 느꼈어요. 집이 어렵게 지어지는 걸 봤고 자연 속에서 살고 있으니 아이들이 커서도 자기 시간을 충실히 살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뒤뜰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보았다. 뒤쪽으로 펼쳐진 숲이 특히 아름다웠다. 곧 저 숲에도 깊은 가을과 겨울이 찾아들겠지, 하는 생각만으로 그곳을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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