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현대미술’이라는 키워드를 조합하면 많은 이들은 슈퍼스타 데이미언 허스트, 거물 컬렉터 찰스 사치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 생태계를 좀 더 잘 안다면 세계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갤러리스트 제이 조플링을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25년여 전 작은 프로젝트 공간처럼 차린 화이트 큐브(White Cube) 갤러리는 쟁쟁한 스타 작가들과 함께하며 큰 굴곡 없이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아시아를 비롯한 비유럽권 작가들에게도 관심의 촉수를 조용하게, 하지만 전략적으로 뻗치고 있는 화이트 큐브의 행보가 주목된다.
1. 1993년 처음 갤러리 사업의 포문을 열었던 화이트 큐브 듀크 스트리트(White Cube Duke Street)의 사인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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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이트 큐브 창립자인 제이 조플링(Jay Jopling, 왼쪽)과 갤러리의 대표 작가인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 Antony Gormley and Jay Jopling at ‘Lost Subject?at White Cube Street in 1994 ⓒcourtesy of White C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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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2년부터 운영 중인 화이트 큐브 홍콩의 전시 공간.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
4. 널찍하고 시원한 구조가 돋보이는 런던의 화이트 큐브 버몬지(Bermondsey). 2011년 세워질 당시 유럽 최대의 상업 화랑 공간이었다. photo by Ben Westoby |
5. 지난해 탄생 25주년을 기념해 화이트 큐브 홍콩에서는 <Remembering Tomorrow: Artworks and Archives>라는 그룹전이 열렸다. photo by Kitmin Lee |
6.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화이트 큐브 소속 작가 데이비드 알트메드(David Altmejd).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
7. 중국의 차세대 대표 작가로 꼽히는 리우웨이(Liu Wei). photo by Tang Xuan. 이미지 제공: 화이트 큐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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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현대미술을 대표하고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갤러리, 화이트 큐브(White Cube).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꽤 존재감 있게 느껴질 이 갤러리의 이름은 고유명사이기에 앞서 1970년대 중반 무렵 미술계에서 널리 회자된 유행어였다. 일반명사로 보면 ‘하얀 입방체’를 뜻하는 이 단어는 당시 미술 평론가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가 <Inside the White Cube>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화제가 됐는데, 흰 벽으로 이뤄진, 마치 중세의 성전처럼 순수성을 품은 전시 공간에서 예술적 이데올로기가 생성된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모더니즘의 산물로 여겨지는 ‘화이트 큐브’ 전시 방식은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공간의 문법처럼 자리 잡았다. 우아한 카리마스를 지닌 이 단어를 영리하게 차용해 고유명사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은 199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영국 명문 사립의 상징인 이튼 칼리지 출신이며 젊은 기획자이자 아트 딜러로 일하던 제이 조플링(Jay Jopling). 그는 만 30세의 나이에 런던의 전통적인 미술품 거래 시장으로 유명한 세인트 제임스의 듀크 스트리트(Duke Street)에 작은 단칸방 수준의 갤러리를 열고 ‘화이트 큐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로부터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이 새내기 갤러리는 업계의 신성으로 떠오른다.
그 배경에는 영국 현대미술의 세대교체를 주도하며 세계 미술 판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이른바 ‘yBa(young British artists)’가 있었다.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데이미언 허스트(Damien Hirst) 등, 논란도 많지만 인기도 많은 작가들과 함께 화이트 큐브는 무섭게 성장해나갔다. 작가를 잘 꿰뚫어보고 유대를 맺을 줄 아는 데다 이슈 메이킹에 능하고 미디어를 영민하게 활용할 줄 아는 전략가의 자질이 출중했던 제이 조플링은 런던 이스트엔드에 화이트 큐브 혹스톤 스퀘어(2000년)를, 듀크 스트리트 부근에 화이트 큐브 메이슨 야드(2006년)를 마련한 데 이어 2011년 화이트 큐브 버몬지(Bermondsey)를 야심 차게 오픈하면서 큰 도약을 일궈낸다. 원래 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고쳐 만든 이 갤러리는 당시 유럽 상업 화랑 최대 규모였던 5,000m²가 훌쩍 넘는, 사방으로 쭉쭉 뻗은 널찍한 공간을 품고 있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같은 거장의 대규모 개인전이나 대형 그룹전을 소화할 수 있는, 웬만한 미술관 못지않은 거대한 몸체를 지닌 갤러리면서도 공간의 느낌이 위압적이지 않고, 인근에 카페, 레스토랑, 펍이 아기자기하게 들어선 동네 분위기도 좋다.
이후 화이트 큐브는 해외 무대로 나아가는 데도 적극적인 행보를 펼치기 시작했다. 2012년 5월 화이트 큐브 홍콩을 열면서 아시아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데 이어, 같은 해 말 상파울루에도 공간을 꾸리면서 남미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현재는 런던 메이슨 야드, 버몬지, 홍콩, 세 곳에 전시 공간을 꾸리고 있다. 지난해 탄생 25주년을 맞이한 화이트 큐브는 런던과 홍콩에서 지난 사반세기의 여정을 돌아보고 의미를 새겨보는 대형 전시를 개최했다. 런던의 메이슨 야드와 버몬지에서 모나 하툼(Mona Hatoum),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 등 작가 40여 명의 신작을 다수 선보인 <Memory Palace>라는 그룹전이, 화이트 큐브 홍콩에서는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각가 안토니 곰리의 숙연한 작품을 위시해 다채로운 예술 세계를 접하고 갤러리가 시도해온 그간의 창조적 실험을 살펴볼 수 있는 <Remembering Tomorrow: Artworks and Archives>라는 그룹전이 각각 여름을 장식했다.
지난 25년의 파격적이고 발 빠른 주행으로 화이트 큐브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확연히 성공했다. 하지만 데이미언 허스트와 손잡고 1천1백 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를 해골에 박은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를 제작한 프로젝트 같은 메가톤급 파격은 이제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는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수준 높은 아티스트들과의 다채로운 협업에 더 집중하는 듯하다. 상징성을 지닌 화이트 큐브라는 브랜드, 스타 작가들과의 친분이나 영국 보수당 정치인 아버지를 둔 화려한 배경 덕분에 늘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좀처럼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는 제이 조플링은 7년 전 버몬지에서 가진 파이낸셜 타임스 기자와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갤러리에는 전부 큰 유리 문이 달려 있어요. 이 건물은 심플하고 민주적이지요. 화이트 큐브가 가운데 들어서 있는, 전면 개방형 공간!” 그의 말처럼 파격적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다소 보수적인 이미지였던 화이트 큐브는 아시아를 비롯해 지역별 작가 스펙트럼을 확대하는 등 이제 ‘다양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보다 열린 행보를 지향하는 것 같다. 그것이 글로벌 트렌드를 잘 읽어내는 경영자의 예리한 비즈니스 감각의 반영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 듯 보인다. 일찍이 앤디 워홀도 비즈니스야말로 최상의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대상이 좋은 아티스트라면 더 빼어난 예술일 테고 말이다.
[ART+CULTURE 18/19 WINTER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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