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판타지’를 새로 쓰는 서라벌의 미술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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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7, 2026

글 천수림(미술 저널리스트)

경주로 떠난 미술 여행

‘절은 별처럼 펼쳐져 있고(寺寺星張) 탑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있다(塔塔雁行)’.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서라벌(지금의 경주)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는 짧은 문장은 신라의 수도 경주가 얼마나 융성하고 찬란한 도시였는지 명료하게 알려준다. 경주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유적지로 황룡사, 첨성대, 대릉원,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등의 유적과 주택 및 공원, 상업 시설, 미술관과 박물관 등이 일상 공간에 섞여 있다. 우리는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호출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가을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 개최 이후 경주의 새로운 귀환만큼 화려한 적은 없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도시’로 경주를 부각시키면서 신라의 유산을 세계에 소개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1백4년 만에 신라 금관 6개 모두를 보여주는 경주박물관 전시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은 새벽 4시부터 줄을 서기도 했다. 경주박물관 외에 ‘왕릉 뷰’를 자랑하는 오아르미술관, 신라의 향기를 알리는 솔거미술관, 백남준을 재조명하는 특별전과 영국의 터너전을 한국 최초로 여는 우양미술관을 둘러보았다 경주가 선사하는 문화유산과 한국인만이 갖는 ‘신라에 대한 향수(鄕愁)’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현대 도시에서는 찾기 힘든 정서적 가치를 되찾는 경험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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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르미술관 고분을 품은 독특한 건축미

2025년 봄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 공원 일대에 문을 연 오아르미술관은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One-day Art Rendezvous, OAR)’이란 뜻을 품은 사립 현대미술관이다. 2기의 부부 묘를 나란히 조성한 쌍분(雙墳)을 마주하고 5기의 신라 왕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 덕분에 ‘왕릉 뷰’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출신 컬렉터 김문호 관장이 20여 년에 걸쳐 수집한 6백여 점 현대미술 작품을 바탕으로 설립된 오아르미술관은 문화 예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미술 관람 외에도 왕릉을 보면서 차를 마실 수 있는 ‘힐링 미술관’으로 입소문이 났고, 6개월 만에 18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맞으면서 경주에서 꼭 가봐야 할 장소로 떠올랐다. 2025한국건축가협회상 ‘올해의 건축 베스트 7’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건축가협회는 오아르미술관을 ‘역사적 풍경과 현대 건축 언어의 정교한 결합’이라고 평가했다. 유현준 교수(홍익대, (주)유현준앤파트너스건축사사무소)가 설계를, (주)제효가 시공을 맡았는데, ‘왕릉이 미술관의 소장품이 된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술관 자체는 크지 않지만(지상 2층, 지하 2층)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져 1층 오아르 커피에 앉아 있으면 창밖의 왕릉이 마치 미술관으로 걸어 들어올 듯하다. 옥상 루프톱 테라스에 올라서면 고분과 한옥, 상업 공간이 혼재한 도시 풍경이 펼쳐진다. 현재는 소장품 기획전 <잠시 더 행복하다>가 진행 중이다. 이우환, 박서보, 이배, 줄리안 오피, 롯카쿠 아야코, 조셉 리, 키네 등 단색화에서 동시대 회화까지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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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솔거미술관 신라의 향기를 재소환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文武王) 14년(674년) 기록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화초를 심고 진금수(珍禽獸)를 길렀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경주 사람들은 옛 신라인처럼 연못을 사랑하는 DNA를 이어가고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내 아평지(阿平池) 연못가에 위치한 신라시대 화가 솔거(率居)의 이름을 딴 경주솔거미술관은 일종의 ‘연못 뷰’ 미술관이다. 경주솔거미술관은 2008년 작품 기증 의사를 밝히면서 미술관 건립이 추진된 것으로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지원한 최초의 공립 미술관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이 공립 미술관은 외부의 아평지 연못과 주변 숲의 풍경이 미술관 내부로 들어온다. 미술관 관람 후 공원과 호수 주변을 산책할 수 있고, 멀리 경주타워의 실루엣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 솔거미술관에서는 APEC 개최를 계기로 한국 미술 특별전 <신라한향(新羅韓香): 신라에서 느끼는 한국의 향기>전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신라의 문화와 불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현대 한국미술이 세계와 소통하는 여정을 소개한다. 경주솔거미술관의 건립 기증 작가인 한국화의 거장 박대성 화백, 경주 출신의 승려이자 불화의 대가인 송천 스님, 전통 회화 수복 전문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김민, 폐유리를 통해 신라의 유리를 재해석하는 유리공예 작가 박선민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솔거미술관 벽면에 설치된 박대성의 ‘코리아판타지’는 가로 15m, 세로 5m의 대작으로 상고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한반도의 장엄한 세계를 그렸다. 한국 수묵화의 거장인 박대성 작가는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최초의 미국 순회전을 개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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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1백4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신라 금관

2025 APEC 정상 회의와 개관 80주년을 기념해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윤상덕)은 특별전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Silla Gold Crowns: Power and Prestige)>을 진행 중이다. 이번 특별전은 신라 금관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지 1백4년 만에 6점의 금관이 한자리에 전시되는 사상 최초의 자리로 큰 의미를 지닌다. 최초로 발굴된 국보 금관총 금관과 금허리띠부터 국보 황남대총 북분 금관과 금허리띠, 국보 천마총 금관과 금허리띠 등 신라 금관과 금허리띠 6점이 모두 공개됐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실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신라 장인의 기술과 공예의 아름다움,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흔적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기회다. 이처럼 신라 유물 자체의 위상을 느끼는 것 외에도 ‘경주’라는 역사적 장소에 모인다는 점이 더 각별하다.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다루고 기념하고 싶은지 되돌아볼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신라역사관을 보았다면 통일신라의 궁궐 문화를 담은 월지관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월지관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것으로 전통 건축의 널판자(판판하고 넓게 켠 나뭇조각)를 재해석한 디자인과 월지의 밤 풍경을 담아냈다. 특히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월지 동쪽 가지구의 1호 우물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나온 주사위와 인물상(서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인물 형상)을 주목하자. 신라가 8~9세기 서아시아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는 단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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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양미술관 백남준과 윌리엄 터너를 동시에 만나다

국내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인 우양미술관은 지난여름 새 단장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열면서 APEC 정상 회의 개최를 기념해 특별전 <백남준: Humanity in the Circuits>를 선보였다. APEC에서 제안하는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연결, 혁신, 그리고 번영’이라는 비전이 1980~90년대 테크놀로지를 인류 정신의 새로운 확장 가능성으로 바라보고 공동체적 사유를 본격화한 백남준과 철학적으로도 ‘접속’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20여 년간 미공개된 백남준 소장품을 면밀한 수복 작업을 거쳐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 주요작 중 하나는 국내 최초로 공개된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 연작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 중 ‘나의 파우스트 – 경제학’과 ‘나의 파우스트 – 영혼성’이다. 1989~91년 제작된 것으로 괴테의 고전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우양미술관의 상징이었던 ‘고대기마인상’도 눈여겨볼 만하다. 1991년 개관을 앞두고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하는 우양미술관 설립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으로 경주에서 발굴된 고대 기마 인물형 토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이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를 기리는 〈Turner: In Light and Shade〉전이 한국 최초로 열리고 있다. 탄생 250주년을 맞이한 터너는 실험적인 현대미술 작가에게 수여하는 ‘터너 프라이즈’가 이름을 딴 거장이다. 이번 전시는 공동 주최 기관인 영국 맨체스터대 휘트워스 미술관이 소장한 그의 수채화, 유화 원화, 그리고 판화 시리즈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특히 터너 판화 작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리베르 스투디오룸’ 시리즈 전체를 1922년 이후 1백여 년 만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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