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지막 황제>의 음악감독으로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 그래미를 석권한 작곡가이자, <마지막 사랑>,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 <남한산성> 같은 수작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작업에 참여한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 이름만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류이치 사카모토를 예술가, 사회운동가 등 다각도로 조명한 전시가 열리고 있어 주목된다.
남산 자락의 새로운 문화 예술 공간으로 떠오른 피크닉(Piknic)의 개관전이다. 인간의 정서, 자연, 도시 풍광을 담아내는 거장의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처럼 울림을 주는 전시 공간을 찾아가봤다.
2 지난 5월 말 문을 연 피크닉(Piknic)의 개관전으로 한국에도 팬층이 두꺼운 뮤지션이자 예술가, 사회운동가인 류이치 사카모토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제공 글린트
3 류이치 사카모토 & 다카타니 시로,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 ⓒStudio Bolt for GLINT
4 류이치 사카모토 & 다카타니 시로, ‘Water State 1’. ⓒStudio Bolt for GLINT
5 뉴욕 기반의 신진 아티스트 그룹 자쿠발란(Zakkubalan)의 ‘Async-Volume’. ⓒStudio Bolt for GLINT
류이치 사카모토의 삶에서 세 가지 순간을 포착한 포트레이트 이미지가 싱그러운 녹음과 어우러지며 외관을 감싸고 있는 운치 있는 벽돌 건물.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면 유성준 작가의 영상 작업 ‘세 개의 흐름이 교차하는 곳(Where The Three Flows Intersect)’이 관람객을 반긴다.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걸작 영화의 음악을 맡은 사카모토가 작곡한 멜로디가 영화 속 장면과 교차되며 발길을 사로잡는다.
마지막 사랑과 함께 밤낮으로 끊임없이 광활한 사막을 헤쳐나가는 여정도, 추위에 지친 남한산성의 병사들 모습과 나라를 잃은 비참한 심정으로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인조도, 어린 마지막 황제가 뛰노는 걸음도, 봄이 되어 비로소 녹아 흐르는 물길도, 내리쬐는 햇볕도 하나의 영상 언어가 되어 숨쉰다. 왼편으로는 사카모토의 작업 과정, 오른편에는 사카모토의 음악을 듣는 이의 표정과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는 이내 빛과 물, 지구의 중력이 빚어낸 앙상블을 구현한 류이치 사카모토와 다카타니 시로(Takatani Shiro)의 조형 작품 ‘WATER STATE 1’로 이어진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물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아 탐구한 작품은 빅데이터로서의 환경 정보를 다양하게 수집해 물의 가변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미디어 아트이자 ‘지각의 정원’이다. 지구의 면적과 우리 몸의 70%를 차지하는 물은 온도에 따라 얼음, 물, 수증기로 모습을 바꾼다. 사카모토는 “물이 만들어내는 비, 구름, 안개, 눈, 바다, 강, 호수, 폭포, 빙산, 빙하 등의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말한다. 이 같은 즐거움을 이 공간에 오롯이 재현해내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대로 흑과 조우한 물방울이 표면에 닿아 물거품을 방울방울 일으키더니 이내 소멸한다. 파동이 검정의 변주를 지휘하고 무색, 흰색이 되기를 거듭하더니 무지갯빛을 띠며 시각과 청각을 뛰어넘는 감각을 일깨운다. 전시는 관객으로 하여금 얼마간을 두고 이곳에 머물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혹은 망각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떨어지는 물 소리, 때로는 따가울 정도로 귀를 자극하는 명민한 소리에 반응하기도 한다. 이로써 전시는 관객이 그저 관광객(tourist)이 아닌 ‘관찰하고(observe) 즐길(taste)’ 시간을 충분히 두고 소리를 수집하는 여행자(traveller)가 되도록 이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작업 공간 역시 흐름의 탐험, 그 연장선상에 있다. 독일 출신 음악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알바 노토(Alva Noto)와 함께 한 작업 ‘INSEN’에서는 흑과 백 건반 너머 그의 손끝에서 빚어낸 음표 하나하나가 메아리치며, 때로는 바코드처럼, 때로는 외계의 생명체처럼 팽창하면서 펼쳐진다. 어쿠스틱과 디지털의 대치가 아닌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섬세하게 간섭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미세한 강약은 또 다른 음색, 새로운 파동을 만들고, 시각적 움직임이 우리를 연결해, 살아 있는 연주로 거듭난다. 시간의 흐름 안에 머물며 기다리고, 아주 작은 느낌, 새로운 감각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사카모토가 수많은 양상을 거름 삼아 상황을 가다듬는 연주는 마치 명상을 위한 훈련과도 같다. 전시는 평생 유명세에 시달린 탓에 조용한 생활을 추구해온 류이치 사카모토가 자연과 생존을 위협하는 첨예한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평화운동가로서 활발한 행보를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고도화된 기술의 복잡함은 주제가 아닌 단지 도구일 뿐이라 덧붙이는 사카모토의 생각은 9·11 테러(당시 그는 뉴욕에 있었다), 온난화, 3·11 일본 대지진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원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더욱 견고해졌으리라.
기술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삶과 예술의 변곡점을 거쳐온 그는 예술, 문화는 평화가 있을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기지만,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는 폴 볼스(Paul Bowles) 원작의 <마지막 사랑>에 나오는 문구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류이치 사카모토. 그는 2014년 후두암 판정을 받은 후 삶의 유한함이 부쩍 현실로 다가오는 듯한 나날 속에서도 평화와 생명 존중의 메시지를 전하는, ‘절대 잊지 못할 날’을 오늘도 보내고 있다. 때마침 6월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CODA)>가 CGV 아트하우스를 비롯한 전국 예술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데, 그 편집 영상 역시 피크닉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10월 14일까지.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www.piknic.kr) 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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