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잘 먹는’ 생태계로 향하는 푸드 업사이클링

조회수: 104
1월 07, 2026

글 강주희(객원 에디터)

멜버른(Melbourne) 리포트


2020년, 호주 멜버른의 페더레이션 광장 한복판에 푸른 식물로 뒤덮인 3층짜리 집이 등장했다. 관광객들의 셀카 명소 바로 옆, 쓰레기 배출을 ‘0’에 가깝게 줄이자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운동가인 네덜란드 출신의 요스트 바커르(Joost Bakker)가 세운 거대한 온실이었다. 지붕 위 35톤의 흙밭에서는 2백50여 종의 생명체가 공존했고, 음식물 찌꺼기는 가스와 비료로 순환했다. 자연주의 셰프 부부는 6개월 동안 이곳에 머물며 직접 키운 재료로 손님을 맞았다. 마치 대도시에서도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21세기판 <월든>처럼. 멜버른은 당시 팬데믹으로 무려 2백62일의 긴 봉쇄를 겪었다. 흠잡을 데 없어 보이던 식량 공급망이 흔들렸고, 슈퍼마켓 진열대가 텅 비기도 했다. 사실 멜버른은 그 전부터 먹거리를 도시계획의 일부로 다뤄온 호주 유일의 도시였지만, 그럼에도 로컬 푸드 시스템의 취약한 민낯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변화를 불러왔다. 삶을 지탱하는 ‘기본’인 먹거리 구조를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도시 곳곳에서 싹텄다. 땅에서 시작해 식탁으로 이어지는 건강한 흐름을 회복하고자, 농장과 시장, 주방과 커뮤니티에서 각기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길을 닦기 시작했다. 지구 여행자가 다시 지구와 사랑에 빠질 수 있도록.


1
2
3


‘0’으로 수렴하는 주방

멜버른의 명물로 도심에 위치한 퀸 빅토리아 마켓은 주말이면 아침 일찍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1백40년 넘게 ‘멜버른의 부엌’으로 불려온 이 유서 깊은 시장에서 동네 주민과 세계 각지의 관광객이 뒤섞여 제철 과일을 고르고 기념품을 구경한다. 조금 더 주의 깊게 둘러보면 시장 한편의 목적 구역(Purpose Precinct)이 보인다. 사람과 지구를 위한 실천을 이어가는 사회적 기업이 모인 곳이다. 취약 청년에게 직업훈련과 고용 기회를 제공하는 카페, 윤리적으로 생산한 로컬 제품만 선보이는 리테일 숍 등이 자리한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곳은 남는 농산물을 버리는 대신 새로운 식재료나 식품으로 되살리는 제로 웨이스트 주방, ‘무빙 피스트 키친(Moving Feast Kitchen)’이다. 이곳은 테스트 키친이자 요리 교실이며, 지속 가능성을 탐구하는 ‘맛 연구소’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주방에는 쿠킹 클래스를 준비하는 셰프의 바쁜 손길이 오간다. 현재 이 공간을 이끄는 토비 퍼턱(Tobie Puttock)은 호주에서 널리 알려진 셰프지만, 지금은 제로 웨이스트 요리를 탐구하는 혁신가에 가깝다. 선반 위에는 ‘수박 껍질 피클’, ‘바나나 케첩’ 같은 생소한 제품명이 적힌 단지들이 실험 샘플처럼 놓여 있다. 모두 시장에서 버려질 뻔한 재료가 셰프의 손길을 거쳐 되살아난 결과물이다.
멜버른의 인기 관광지인 이 시장에서는 매년 8백 톤이 넘는 농산물이 버려진다. 반면 같은 지역에는 여전히 불안정한 식량 공급으로 고통을 겪는 주민이 많다. 이 공간을 이끄는 무빙 피스트(movingfeast.net)는 2020년 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설립된 사회적 네트워크다. 잉여 농산물의 창의적 재활용에 대한 아이디어는 호주의 사회적 기업 STREAT의 공동 창립자가 런던 버러 마켓의 가판대에서 시작한 ‘루비즈 인 더 러블(Rubies in the Rubble)’을 방문하며 얻었다. 버려질 뻔한 과일과 채소를 재가공해 프리미엄 소스, 잼, 피클 등으로 거듭나게 하는 업사이클링 식품 브랜드다. 작은 실천이 식품 폐기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 그들은 멜버른에서도 비슷한 콘셉트를 도입했다.
그렇게 시작된 무빙 피스트 키친의 작업 흐름은 의외로 단순하다. 상인들은 과잉 공급되었거나 품질은 좋은데 외관상 결함으로 판매되지 않은 채소와 과일을 일정 주기로 셰프에게 건넨다. 어떤 날은 딸기 몇 상자, 어떤 날은 지게차에 담긴 300kg의 고구마가 주방 문을 통과한다. 신선도가 빠르게 떨어지는 식재료인 만큼, 셰프는 이를 받자마자 냉동·조리·건조·발효 과정을 거쳐 오래 보관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한다. 이렇게 탄생한 발효식품, 소스, 간편식은 온·오프라인 팬트리에 납품되거나 식량 지원이 필요한 가정의 식탁으로 향한다. 지난 2년 동안 무빙 피스트는 지속 가능성을 연구하는 셰프들과 협업하며 계절별 과잉 농산물, 처리 방식, 레시피를 담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이는 과잉 농산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제품화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약 3톤의 잉여 식재료로 만든 60여 가지 제품을 시장에 선보였다. 상인들 역시 남은 재료를 건네면 기부금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어, 이 선순환 구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마켓은 본래 열린 공간으로 상인과 재배자, 요리사가 자연스럽게 드나들며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순환형 식품 아이디어는 곧바로 현실로 이어진다. 예컨대 토비 퍼턱은 작년 5월 무빙 피스트에 합류한 뒤 ‘구조된’ 과일로 특색 있는 제품을 만들어냈다. 캔디 멜론으로는 핫소스를, 용과로는 디저트 소스를 만드는 식이다. 더 나아가 그는 ‘지속 가능한 식사 클럽’ 같은 워크숍을 열어 제로 웨이스트 요리의 가능성을 대중에게 알리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는 식재료의 80%만 쓰고 20%를 버리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최근 상인들에게 골칫덩이였던 양배추 겉잎으로 초밥용 김을 만드는 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성공한다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해조류 소비 패턴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지는 재료를 활용하면 오히려 더 맛있는 음식이 나올 때가 많아요. 이런 경험이 하나둘 쌓이다 보면 지속 가능성은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 그저 좋은 요리 방식으로 느껴지죠.” 토비 퍼턱의 말처럼 완벽한 해결책이 나오길 기다리기보다, 지금 실천 가능한 작은 일이 결국 시스템을 움직인다. 무빙 피스트 팀은 앞으로도 상인들과 협력해 잉여 재료를 구조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식료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지금도 ‘못난이’ 식재료는 전보다 새로운 형태를 빚어가며, 버려지는 양은 0을 향해 가고 있다.



1
2
3



‘흙’에서 시작하는 식탁

멜버른 도심에서 자동차로 1시간쯤 달리면 풍경이 확 바뀐다.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낮은 구릉과 목초지가 펼쳐진다. 절롱(Geelong) 외곽, 벨라린반도 어귀에 자리한 ‘커먼 그라운드 프로젝트(Common Ground Project)’는 도시 끝자락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 농장은 멜버른의 대표적인 호스피탈리티 기업인 멀버리 그룹(The Mulberry Group)이 운영한다. 그룹 창립자 네이선 톨먼(Nathan Toleman)은 카페, 레스토랑, 호텔을 운영하며 성공을 거뒀지만, 늘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식재료를 길러주는 땅과 음식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들’을 가장 큰 자산으로 여기던 그는, 이 소중한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지킬 방법을 고민했다. 때마침 부탄 여행에서 우연히 접한 ‘임팩트 비즈니스’가 사고의 전환점이자 활로가 됐다. 이윤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모델은 그에게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었고, 2019년 작은 키친 가든에서 시작한 농장은 자리를 잡아갔다.
커먼 그라운드는 재생 농업(regenerative agriculture)을 기반으로 한다. 황폐해진 토양 생태계를 복원하고 생물 다양성을 회복시키는 농업 방식이자 실천 체계로 기후 위기의 효과적 대응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 티스푼의 건강한 흙에 최대 10억 개의 박테리아가 산다는 이야기는, 미생물이 식물을 키우고, 그것이 식량이 되어 우리 식탁에 오른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장은 밭을 과도하게 갈지 않고, 화학비료 대신 천연 퇴비와 암석 가루를 사용한다. 작물 사이에는 덮개 작물을 심어 토양을 보호하고, 닭을 방목해 잡초를 제거한다. 토양은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비옥해진다. 커먼 그라운드는 이러한 원칙을 꾸준히 실천하며 재생 농업의 철학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 농장은 의외의 성장기를 맞았다.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사이 농장 팀은 흙을 돌보고 온실을 세우며 토양 재생에 집중했다. 그 시기가 농장의 토대를 더욱 단단하게 했고, 현재는 80개의 생산 베드를 운영하고 있다. 직판장과 정기 마켓, 시내 배송은 농장의 신선한 수확물을 도시 일상으로 흘려보내는 작은 통로가 된다. 자체 생산물에 더해 주변 농장의 윤리적 농산물까지 아우르며, 지역 생산자들이 버텨낼 수 있는 생태계를 함께 지탱하고 있다.

4
5
6


그러나 이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무엇보다 ‘먹거리로 사람을 잇는 힘’이다. 네이선 톨먼은 난민 및 비자 취약 여성과 함께 구호 식사를 만들면서 이러한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는 이후 핵심 프로그램 ‘Staying Grounded’로 이어졌다. 프로그램은 6주간 진행되는 유급 과정이다. 참여자들은 상업용 주방에서 필요한 기본기를 익히고, 영어로 간단히 소통하며 음식 설명하는 법을 연습한다. 마지막 주에는 이들이 직접 고향 음식을 준비해 손님들을 초대하는 저녁 식사 자리를 갖는다. 이 피날레 디너의 수익금은 다음 참여 그룹의 기금으로 이어지며, 프로그램은 선순환을 이어간다. 이와 별개로 주민 참여 프로그램도 꾸준하다. 매주 화요일 농장 문이 열리면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밭을 돌보고 수확을 돕는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어, 커뮤니티 농장 역할을 차근차근 이어가고 있다. 이제 커먼 그라운드는 멀버리 그룹의 뿌리가 되었다. 도심의 팜 투 테이블 레스토랑 헤이즐(Hazel)을 비롯한 그룹의 레스토랑은 농장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고, 메뉴는 수확의 흐름에 따라 결정된다. 새로 합류한 직원들은 먼저 농장을 체험한 뒤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룹의 수익 일부는 농장 운영과 프로그램 개발에 재투자된다. 톨먼은 “착취에서 돌봄으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레스토랑과 생산자 간의 긴밀하고 장기적인 관계가 그 핵심이죠”라고 말한다. 토양, 사람, 커뮤니티를 하나로 묶는 이 구조는 거창한 전략이 아니다. 돌봄에 대한 약속, 경청하는 태도, 그리고 땅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실천일 뿐이다.
우리는 어느새 매일 소비하는 것들의 출발점에서 가장 멀어진 세대가 되었다. 먹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자라는지에 대한 감각도 희미해졌다. 우리가 먹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되면, 무엇을 다르게 선택할 수 있을까. 멜버른은 그 질문에 작게나마 답하고 있는 도시다. ‘커피의 도시’로 알려진 이곳에서 태어난 가장 원초적인 상상은 여전히 순환의 고리를 따라 조용히 작동한다. 그래서일까,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외침은 시간을 넘어 멜버른의 식탁 위에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단순하게, 단순하게, 단순하게(Simplify, simplify, simplify).”




Art+Culture ’26 Winter Special

01. Art + Culture 보러 가기
02.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2025_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갈망한다 보러 가기
03. 라스베이거스 문화 예술 산책_‘네온의 도시’가 창조하는 세계 보러 가기
04. 멜버른(Melbourne) 리포트_진정으로 ‘잘 먹는’ 생태계로 향하는 푸드 업사이클링 보러 가기
05. Taste of Luxury Brands_미식으로 경험하는 브랜드의 정수 보러 가기
06. 경주로 떠난 미술 여행_‘코리아 판타지’를 새로 쓰는 서라벌의 미술관들 보러 가기
07. 아뜰리에 에르메스_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_생태적 감각으로 마주한 세계 보러 가기
08. 10 Exhibitions_Remember the Exhibition 보러 가기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