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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05, 2018

글 고성연(파리·오빌레 현지 취재)

돔 페리뇽(Dom Pe´rignon)을 가리켜 누군가는 ‘샴페인의 왕’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샴페인의 여왕’이라 부른다. 이러한 견해 차는 저마다 다른 연상 작용과 기준이 반영된 결과겠지만, 프레스티지 빈티지 샴페인의 상징과도 같은 이 강력한 브랜드에 관련해 적어도 한 가지만은 확실한 게 있다. ‘창조적 협업’의 고수라는 점이다. 세기의 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슈퍼 팬’으로 뒀던 역사를 지닌 브랜드답게 패션계의 살아 있는 전설 칼 라거펠트, 창조적 카리스마가 넘치는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 현대미술계 ‘악동 스타’ 제프 쿤스 등 내로라하는 크리에이터들과 손잡고 화제를 모아왔다. 이번에는 미국의 록 스타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다. 그것도 단순한 모델이 아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격이다. 프랑스에서 그 현장을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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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 대다수 파리지엥이 연휴를 즐기러 떠나는 바람에 아주 한적하고 평온하기까지 했던 어느 날 아침, 파리 8구의 명소 개선문 근처에 자리한 로열 몽소(Royal Monceau) 프라이빗 시네마. 이곳에 록큰롤은 물론 펑크, 블루스, 솔, 힙합 등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올라운드 뮤지션으로 통하는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가 나타났다. 레게 머리에 선글라스, 나팔바지 차림으로 등장한 채 전 세계에서 초청된 40여 명의 기자단을 향해 “좋은 아침(bon jour)”이라며 특유의 나지막하고 매혹적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록 스타. 그런데 이날 그의 미션은 공연이 아니라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샴페인 브랜드 돔 페리뇽(Dom Pe´rignon)의 새 광고 캠페인을 위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포토그래퍼, 디자이너로서 공개적으로 ‘신고’하고 프로젝트 개요를 발표하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레니 크라비츠 팀이 앞서 미국 LA에서 진행했다는 촬영 영상은 웬만해서는 절로 시선이 꽂힐 수밖에 없는 콘텐츠임이 분명했다. 할리우드의 맨션을 배경으로 꽤나 익숙한 얼굴,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묘하게 이색적인 조합을 이룬 채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는 흑백의 파티 풍경. 그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은 <델마와 루이스> 등 주옥같은 영화로 잘 알려진 명배우 수전 서랜던(Susan Surandon), 관록의 연기파 배우 하비 케이틀(Harvey Keitel), 스타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영화 <블랙 스완>의 안무가이자 파리 오페라의 무용감독인 벤저민 마일피드(Benjamin Milepied), 눈에 띄는 미모의 패션모델이자 배우 애비 리(Abbey Lee), 그리고 축구 스타 출신의 자선사업가 나카타 히데토시(Hidetoshi Nakata). 여기에 레게 스타일의 곱슬머리를 한 젊고 발랄한 아가씨가 분위기를 이끌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바로 레니 크라비츠의 딸이자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에 출연하기도 한 조 크라비츠(Zoe·· Kravitz).
영상 위로 레니의 음성이 낮게 깔린다. “이것이 단지 파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한 겁니다(If you think this is just a party, I think you are mistaken)”. 이어지는 그의 설명인즉슨 “이런 장소에 모인 게스트들은 뜻밖의 영감을 주는 사람들의 결합을 위한 재료 역할을 하게 된다”고. 패션, 음악, 무용,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자신과 딸의 친구·지인이 섞여 있는, 확실히 흥미로운 앙상블이기는 하다. 사실 레니 크라비츠는 자신의 딸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조가 흔쾌히 나서줬고, 덕분에 생전 처음 부녀가 일을 같이 해봤다고. “알렉산더 왕 같은 경우는 어릴 때부터 조와 친구였어요. 모든 게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뤄졌죠.” 레트로 감성이 다분히 묻어나는 영상의 콘셉트는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뉴욕의 나이트클럽인 스튜디오 54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또 파티의 배경이 된 장소는 레니 크라비츠가 이끄는 크라비츠 디자인(Kravitz Design)이 디자인을 맡은 저택이다.
연결하고, 결합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혁신, ‘다름의 미학’
편견 없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 속에서 예기치 않게 영감을 주고받는 만남. 이 파티의 주제는 사실 언뜻 진부한 클리셰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레니 크라비츠의 DNA와는 꽤 잘 어울린다. 크리스천에 흑인 배우인 엄마와 유대인과 러시아계 백인 아버지를 둔 그는 뉴욕에서 태어나 맨해튼 생활을 누리면서 유복하게 자라났지만 주로 브루클린 지역에 사는 외가 사람들과 어울렸던 터라 ‘블랙’ 감성을 듬뿍 체득했다(그가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도 ‘잭슨 파이브’였다). 그러다 또 다른 문화적 중심지인 LA로 이주했고, 소년 합창단에서 고전음악과 오페라를 접하는 등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했다. 타고난 재능과 운에 힘입어 대중음악의 장에서 일찍 성공한 편이지만,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앤서니 디커티스가 표현했듯이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블랙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지나치게 화이트’인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복합적인 자신의 정체성을 음악적으로나 다른 분야로 확장한다는 측면에서도 ‘다양성’으로 잘 승화했다. 그의 음악 장르가 다채로운 것도, 재능이 여러 갈래로 뻗치는 것도 ‘다름의 미학’을 포용하고 자신만의 색깔로 발전시킨 덕분이 아닐까. 레니 크라비츠가 사진을 접하게 된 것도 성장 배경이나 스타로서의 삶을 보면 숙명적인 귀결이지 싶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라이카 카메라를 갖고 있었어요. 제가 그걸 갖고 노는 바람에 아버지의 화를 북돋고는 했죠.” 특별히 사진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위에 사진을 잘 찍는 친구들이 많았다. 포토그래퍼 친구인 마크 셀리거(Mark Seliger)에게 기초를 배웠고, 어느덧 사진은 그에게도 중요한 취미가 됐다. 하지만 주로 플래시 세례를 받다가 세상을 향해 자신의 렌즈를 들이대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어느 해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데, 그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자신도 카메라를 맞대면서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짜증을 내기보다 즐기자는 심정으로 장난스럽게 시작했지만, 이것이 하나의 아이디어가 되어 그는 파파라치와 팬들의 모습을 가득 담은 사진집 <Flash>(2015)를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브랜드 캠페인에 자신의 이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정과 교감이 낳은 창조적 협업의 결실
다채로운 배경의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게 돔 페리뇽의 핵심인 것 같다면서 ‘커넥팅(connecting)의 힘’을 강조하는 레니 크라비츠는 실제로 3백 년도 넘는 역사를 지닌 이 샴페인을 ‘애정’해왔다고 했다.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처음 돔 페리뇽을 마셔본 건 고등학생일 때였을 거예요.” 음주 연령을 어겼음을 슬쩍 고백한 그는 친구들과 파티를 하면서 우연히 돔 페리뇽에 맛을 살짝 들이게 됐지만, 아무래도 굉장히 이국적이고 값비싼 샴페인인 만큼 자주 접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돔 페리뇽이라는 브랜드에 보다 깊은 관심을 품게 된 계기는 그의 친구가 된 돔 페리뇽 셀러 마스터(수석 와인메이커) 리샤 지오프로이(Richard Geoffroy)와의 인연이다. 11, 12년 전쯤 친구를 통해 만나게 된 이들은 여러 면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했다고. “예술성, 아티스트적 기교에 대한 접근 방식과 자기 훈련 등에서 핵심이 닮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가 샴페인과 와인 같은 것들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제가 음악과 아트를 대하는 방식이 말이죠.” 열 살의 나이 차에도 ‘절친’이 된 이들은 함께 돔 페리뇽의 와인 저장고를 방문하기도 하고 언젠가 협업도 해보자는 얘기도 하면서 우정을 쌓다가 리샤가 은퇴하는 올해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됐다(실제로 리샤 지오프로이는 이 행사 이후에 은퇴를 전격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레니 크라비츠가 직접 작업에 참여한 결과물은 돔 페리뇽의 와인 셀러가 있는 상파뉴 지역의 돔 페리뇽 하우스에서 일부 공개됐다. 바로 3백50년 전 ‘샴페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에르 페리뇽 수사가 근무하며 돔 페리뇽을 창조해낸 오빌레 수도원(Abbey of Hautvillers)이 자리한 곳이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곳에서 올해 캠페인의 주인공인 ‘돔 페리뇽 빈티지 2008’을 위한 페어링 만찬을 끝낸 뒤에 그는 흑백으로 인화된 레니 크라비츠 팀의 사진 작품을 둘러보며 직접 소개했다. 순간의 분위기와 표정을 포착한 흑백사진은 확실히 영상과는 다른 오라를 풍긴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 사진을 가리켰다. “딸을 찍고 있는 내가 거울에 비춰지는 사진이요. 일종의 ‘부녀만의 순간’이랄까요.” 이렇게 답하면서 살짝 수줍은 미소를 띠는 레니 크라비츠의 영감 어린 작품은 오는 가을 런던, 밀라노, 도쿄, 홍콩, 베를린 등 세계 여러 도시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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