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 CULTURE] #제여란 < Road to Purple>展, #남화연 <가브리엘>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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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4, 2023

글 김수진(프리랜스 에디터·디블렌트 CD)

Exhibition in Focus

어떤 여성 서사나 상징도 없이 추상적 미술 언어만으로 독특한 여성주의적 질감을 만들어내는 중견 여성 작가들의 행보가 두드러진다. 이들은 어떤 선언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일상 세계를 추상화나 추상적 표현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온몸으로 자신들의 서사를 작품 속에 풀어낸다. 지난 30년간 스퀴지를 통해 기세 넘치는 곡선으로 화면을 채우는 제여란(b. 1960)과 역사와 시간이 관통하는 삶에 주목하며 연구자 같은 행보를 보이는 남화연(b. 1979) 작가는 세상의 인기에는 별 관심 없는 듯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미술사에 새로운 길을 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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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걸작’을 위한 몸의 궤적 #제여란, <Road to Purple> 

제여란의 작품을 감상하려면 우리 스스로 ‘솔직한 여행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제여란의 작품은 그녀 자신의 몸이 역동적으로 지나간 흔적인데, 우리가 그 사이를 걸어 다니자면 그림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주를 느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헉헉대며 올라간 바위 위에 서면 탁 트인 시야를 마주한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조금 더 그녀의 작업 사이를 거닐다 보면 폴 세잔의 ‘생빅투아르산’의 풍경을 볼 수도 있고,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만날 수도 있다. ‘Usquam Nusquam, 어디든 어디도 아닌’이라는 라틴어 작품 제목에서 ‘끊임없이 무언가가 아니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느껴진다. 마치 처음 가본 길, 혹은 한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비밀 동굴 같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
화가로서 외길을 걸어온 제여란은 ‘국내파’다. 사실 1980년대 유학을 고민하던 그녀는 6개월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많은 거장들의 작품을 접한 뒤, 외려 한국에서 회화 작업을 이어가기로 결심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성격의 소유자다. 일찍 화단에서 인정을 받은 편이지만, 1994년 개인전을 가진 이후 마치 은둔자처럼 작품에 매진하다가 무려 12년이 지나서야 전시를 할 정도로 스타성을 드러내는 데도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오랜만의 전시에서 선보인 무채색의 추상화 연작에 대해 그녀는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흑색은 내게 위대한 신처럼 숭고하다. 그리고 흑색은 내게 집요한 성실함을 가르친다. 유대인들은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봤다. 흑색은 내향적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색이다.” 언뜻 단색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여란의 흑색 회화 연작은 현재 스페이스K 서울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 <Road to Purple> 에서도 강한 인상을 준다. 검은색 붓질에서 강인한 신념과 저력이 느껴진다고 할까. 지난 30여 년간의 작업을 망라한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보라’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색 실험에 대한 끝없는 의지를 드러냈다. 덕분에 2000년대 중반부터 작가가 본격 활용한 스퀴지의 율동감이 압도적인 보랏빛 대형 추상회화 작품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스퀴지(squeegee)의 역할 덕분에 몸의 움직임과 긴장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에 대해 작가는 “둥근 몸과 반대되는 직선 구조의 도구가 서로 대항하면서 느껴지는 긴장이 있다”며 엇나가면서 오는 긴장, 예기치 않은 실수, 거기에서 오는 묘한 불편함, 그 안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설명한다. 그렇게 ‘우연한 걸작’을 얻기까지 작가로서의 성실함과 사명감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기에 작품을 감상하러 움직이는 사이 사이의 발걸음이 조금 더 숙연하고 조용해진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날지 알 수 없는 세계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전시명 <Road To Purple>  전시 장소 스페이스K 서울  전시 기간 2023년 1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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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순간들을 위한 탐구 #남화연, <가브리엘>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2022년 마지막 전시로 선보인 남화연의 개인전 <가브리엘> 전시장 입구에 도착하면 관악기가 아름다운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거나 조각품으로 설치되어 있다. 사운드 조각 ‘코다’는 마치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고, 전시장인 방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몸의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는 듯한 장면을 상상하게도 한다.
소리와 시간의 개념에 초점을 둔 남화연의 이번 전시는 시간을 재생하거나 기억을 재구축하려는 인위적인 노력 대신 시간의 흐름 한가운데서 다가올 순간을 고요하게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몸의 일부 같기도 한 아름다운 사운드 조각 ‘코다’를 지나쳐 커튼을 열면 시적 은유 가득한 남화연의 비디오 작업 ‘가브리엘(신의 정령으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나 전쟁, 파멸의 소식을 전하는 대천사의 이름)’이 상영되고 있다. 약 20분 길이의 영상에 담긴 장면은 알 수 없는 신호로 가득 차 있고, 서사와 언어를 최대한 자제하며 단 몇 줄의 문장으로 관람객을 상상으로 이끌고, 마지막에는 ‘이것은 모두 오래된 얘기다’라는 구절로 끝맺는다. 영상 속 이미지들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상상해낸 수태고지의 순간부터 알아보기 어려운 화성 탐사 로버(로봇 탐사 차량)의 촬영본 등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그녀의 작품이지만, 볼 때마다 미래나 과거에 일어난 새로운 사실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비평가 존 러셀은 “우리가 이번 주에 본 것은 다음 주가 되면 다르게 보일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남화연의 작품도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미래가 되기도, 현재가 되기도, 신화 속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먼 미래에서 영상 속 이미지를 보고 서술하는 누군가의 시점을 암시하고 싶었던 동시에 이미지를 보며 사건을 예감하는 현재의 누군가가 지닌 시점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먼 미래, 먼 과거, 혹은 현재의 황량한 분위기에서 다양한 소리가 속삭이듯 새어 나온다. 화성에서 녹음된 바람 소리부터 관악기 연습 소리, 금속 파이프가 매질로 기능하며 나는 소리 등이다. 소리와 속도가 변화무쌍하다는 점, 사물과 신체를 진동시킨다는 점, 파괴력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 등 흥미로운 요소가 많은 바람 소리와 관악기 소리를 전면에 등장시켜, 이미지들의 파편적인 연결과 단절이 만드는 리듬을 더 두드러지게 선보였다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던 남화연은 무용가 최승희의 아카이브 관련 작업을 10년 가까이 진행한 작가다. ‘역사의 시간이 관통하는 신체’라는 측면에서 최승희의 삶에 흥미를 갖고 <마음의 흐름>을 전시하고,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영상 작품 ‘반도의 무희’와 설치 작품 ‘태리의 정원’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남화연은 여전히 실체가 규명되지 않었거나 미처 드러나지 않은 사건과 그것의 전후 사건에 관심이 많다. 이번 전시 <가브리엘>에서도 다가오는 것들에 대한 생각, 그리고 정치와 문화유산의 경계,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지금의 시간에서 들여다본다.
전시명 <가브리엘>  전시 기간 아뜰리에 에르메스   전시 기간 2023년 1월 29일까지




[ART + CULTURE ’22-23 Winter SPECIAL]

01. Intro_Global Voyagers  보러 가기
02. Front Story_‘시드니 모던(Sydney Modern)’ 프로젝트_미항(美港)의 도시가 품은 새로운 랜드마크의 탄생  보러 가기
03. ‘예올 X 샤넬’ 프로젝트_The Great Harmony  보러 가기
04. 지상(紙上) 전시_Yet To Discover우리들의 백남준_서문(Intro)  보러 가기
05. 지상(紙上) 전시_Yet To Discover_우리들의 백남준_01_초국가적 스케일의 개척자_COSMOPOLITAN PIONEER  보러 가기
06. 지상(紙上) 전시_Yet To Discover_우리들의 백남준_02_기술로 실현될 미래를 꿈꾸는 예측가_INNOVATIVE VISIONARY 보러 가기
07. 지상(紙上) 전시_Yet To Discover_우리들의 백남준_03_퍼스널 브랜딩의 귀재였던 협업가_CONVERGENT LEADER  보러 가기
08. 지상(紙上) 전시_Yet To Discover_우리들의 백남준_04_가장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으로_STRATEGIC COMMUNICATOR  보러 가기
09. Global Artist_이우환(李禹煥)_일본 순회展  보러 가기
10. Column+Interviewt_‘페어’와 ‘축제’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도쿄의 아트 신  보러 가기
11. LV X YK in Tokyo_Magical Encounters   보러 가기
12. 교토 문화 예술 기행_‘민예(民藝)’의 원류를 찾아서  보러 가기
13. Brands & Artketing_9_에이스 호텔(ACE HOTEL)  보러 가기
14. Exhibition Review_심문섭, 時光之景(시간의풍경)  보러 가기
15. Exhibition Review_평화로운 전사 키키 스미스의 자유낙하가 닿는 지점  보러 가기
16. Exhibition Review_#제여란 <Road to Purple>展, #남화연 <가브리엘>展  보러 가기
17. Remember the Exhibition_2023년의 시작을 함께하는 다양한 전시 소식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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