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감각으로 마주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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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07, 2026

글 양혜연(객원 에디터)

아뜰리에 에르메스_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 〈산과 친구되기〉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인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Daniel Steegmann Mangrané)는 어린 시절 생물학자가 되길 원했다. 그 꿈은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품어온 자연에 대한 열망은 성인이 된 그를 아마존으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목도한 수많은 생명체가 얽히고설켜 공생하는 모습에 매료된 작가는 이후 20여 년간 브라질에 머물며 숲을 탐구했다. 이러한 고찰은 드로잉, 사진, 비디오,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치환됐다. 자연과 문화 사이 복합적 관계를 탐구하는 그의 한국 첫 개인전이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진행 중이다. <산과 친구되기(Befriending the Mountains)>(2025. 11. 28~2026. 3. 8)라는 전시명은 작가가 열대우림을 탐험하며 발견한 자연과 인간의 공생법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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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자연과 인간의 경계
오랜 세월 서구 사회는 이원론적 사고에 기반해 발전해왔다.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고 인간 외의 존재를 도구화하는 관점은 기술의 비약적 성장을 이끈 구조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동시에 생태계 붕괴와 기후 위기를 초래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맞이한 지금,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는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전환하고자 숲의 구조를 닮은 전시 공간을 도시 한가운데에 조성했다. 전시 전반에 걸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물과 인공물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며 공존한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먼저 체감하게 하는 매개체는 전시 공간 곳곳에 설치된 파티션이다. 사선으로 세워진 흰 벽은 분명 인공물이지만, 숲속 오솔길과 같은 동선을 형성해 관람객이 전시를 ‘조망’하는 대신 ‘탐험’하게 만든다. 전시 초입에 등장하는 세 갈래 길 중 가장 큰 길에는 전시명과 동명의 작품 ‘산과 친구되기(Befriending the Mountains)’(2025)가 자리한다. 작가의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알루미늄 커튼 연작으로, 사람이 지나가기 충분할 정도로 큰 구멍이 뚫린 첫 번째 커튼과 사람이 지나갈 수 없는 위치에 구멍이 뚫린 두 번째 커튼으로 이뤄져 있다. 구멍의 모양은 작가가 한국에서 본 ‘어떠한 것’의 형상에서 따왔는데, 관람객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도록 모티브가 된 대상이 무엇인지는 함구했다. 첫 번째 커튼을 지날 때 관람객은 바위, 능선 등을 연상시키는 구멍을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커튼 너머로 가려면 직접 손으로 커튼을 걷으며 알루미늄의 물성을 감각해야 한다. 이어지는 미로 같은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마주하는 작업들도 마찬가지다. 산, 코끼리, 사자, 용 등 각각의 부제가 붙은 ‘번개치는 돌(Lightning Stone)’(2025) 연작은 직선 형태의 LED 필라멘트 조명과 돌을 접목했으며, ‘기하학적 자연(Geometric Nature)’(2025)은 나뭇가지와 고무줄을 함께 설치했다. 이처럼 전시장 곳곳에 포진한 작품들은 자연물과 인공물의 경계를 해체한다. 20여 년간 브라질에 거주하며 야생의 자연을 탐구해온 작가가 기하학적 형태의 인공물을 작업에 활용한다는 점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에 대해 다니엘 스티그만 만그라네는 “우리는 흔히 기하학적 형태를 인위적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는 자연에도 존재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은 인간이 자연 속 질서를 ‘발견’해 ‘구조화’한 기하학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자연을 인간의 근원으로 바라볼지 혹은 인간과 분리된 존재로 규정할지는 결국 우리의 관점에 달렸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에서 탄생한 인간이 만든 인공물을 과연 자연과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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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 만나는 자연
관람하는 내내 파티션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가다 마지막 코너를 돌면 마침내 열린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한두 점의 작품만 병치된 통로와 달리 이곳에는 총 4점의 작품이 모여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유리창 너머 중정에 설치된 ‘번개치는 정원(Lightning Garden)’(2025)이다. 검은 화산석으로 뒤덮인 둔덕에 산에서 자란 소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 있으며, 공중에는 번개 같은 모양새의 LED 필라멘트 전구가 설치돼 있다. “우리가 자연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느낌을 다시 경험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습니다”라는 작가의 말대로 익숙한 듯 생경한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번개치는 정원’과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벽면에는 경주 동궁과 월지에 드리운 보름달을 촬영한 영상 작품 ‘물고기가 입맞추는 달(Fish Trying to Kiss the Moon)’(2025)이 상영된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일렁임이 지속되는 영상은 물고기가 등장한 찰나에 비로소 이것이 수면에 비친 달이란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작가는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결코 맞닿을 수 없는 두 존재인 달과 물고기가 물을 매개로 이어지는 순간을 입맞춤에 비유했다.
이렇듯 전시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우리는 앞으로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공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명확한 해답은 전시장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한국인 친구와 자연의 상징물로 각각 ‘바위’와 ‘산’을 선택한 일화를 이야기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저마다의 시선이 다르듯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점 또한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뒤이어 중요한 건 전시를 통해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고, 관람객이 스스로 연결 고리를 찾아나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기에 전시장을 나서 조우한 풍경이 이전과 조금 달라 보인다면, 전시는 제 소임을 다한 것이다. 이후의 변화는 전시를 관람하며 산과 친구가 될 준비를 마치고 실제 자연을 탐험하며 확장해나가야 할 우리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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