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roll in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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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6, 2024

글 고성연(파리 현지 취재)

느리지만 점차 눈에 띄는 변화의 조각들


어떤 도시든 여러 차례 방문하다 보면 감춰져 있던 속살이 자연스레 보이기도 하고, 즉흥적인 호기심이 발동해 나름의 ‘탐색’에 나서게 되기도 한다.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연한 계기로 뇌리에 제대로 박히게 되는 인연도 생긴다. 이번 호 ‘예르 기행’의 주인공인 귀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도 그런 존재였다. 이름도 알고 있고 작품도 스쳐 지나간 적이 있지만,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한 작품을 마주치고는 골똘히 감상하는 순간을 누리게 됐다. 앞 글에서 언급한 ‘마루 깎는 사람들(The Floor Scrapers)’(1875)이라는 그림이다. 메종 카유보트를 방문하고 나니 다시금 이 작품을 보고 싶어 파리를 떠나기로 예정된 다음 날, 일정을 구겨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아침에 오르세 미술관을 찾았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예술의 힘이 솟구친 덕분에 하루 동안의 파리 산책 일정은 그렇게 일찍 시작됐다.


‘파리는 두 번 다시 똑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곳은 언제나 파리였고, 만약 그곳이 변한다면 동시에 사람들도 변하는 것이리라.’_어니스트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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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를 간직하되 변주와 혁신을 이끌어나간다는 것
  많은 이들이 파리처럼 고풍스러운 도시는 10년 만에 찾아도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어떤 맥락에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서울이나 도쿄 같은 아시아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느끼는 특유의 긴장된 분주함이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도시 곳곳에서 새로운 랜드마크가 불쑥불쑥 솟아나는 모습을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1세기 전쯤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파리에서 7년간 살면서 주머니는 가벼워도 행복했던 나날을 돌아보며 쓴 글처럼, 우리 자신을 포함해 사람들은 변하기 마련이고, 때로는 잠시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실제 모습이든, 아니면 관점이든 말이다. 당장 카유보트의 그림이 걸려 있는 오르세 미술관만 하더라도 원래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호화롭게 지은 기차역(오르세 역)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것 아니던가. 그 이유는 플랫폼이 너무 짧아 이제는(내부 골격을 유지한 채 리모델링을 단행한 뒤 다시 문을 연 1986년 당시를 말한다) 기차에 맞지 않아서였다는데,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며 과거 유산을 잘 변주한 사례에 다름 아니다.


●●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카유보트가 ‘마루 깎는 사람들’을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심사위원회가 ‘저속한 주제’라는 이유로 전시를 거부한 시절도 있었다(1875년). 그는 마룻바닥을 깎는 장인들을 관찰하다가 고단한 노동에 진중하게 임하는 그들의 모습을 ‘극화시키지 않고’ 담아냈을 뿐인데 말이다. 이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는 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화 속 인물과 비견되는 ‘일상 속 영웅의 근육을 이상적으로 그렸는데, 온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식상한 오락거리로 삼는 게 아니라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상세하게 다루되 존중감을 곁들여 거리를 유지한 작가의 담담하지만 부드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올해 무려 1백 년 만에 하계올림픽을 맞이하는 이 ‘빛의 도시’에는 어떤 설렘이 감돌고 있는 듯하다(헤밍웨이가 체류한 시기인 1924년 제8회 하계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렸다). 사실 팬데믹이 발발하기 전부터 긍정의 에너지가 솟아나는 분위기가 와닿았는데, 비록 3년여의 시간 동안 숨죽여야 했지만 그동안에도 착실히 채비를 갖춰왔다는 느낌이 든다. 마스크가 옥죄었던 기간을 생각하면 우주의 기운도 파리를 도와주고 있는 셈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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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분주한 ‘빛의 도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도시는 매몰찬 사람들에게 휘둘리기도 하지만 크고 작은 변화의 세월을 견뎌내는, 연약하고도 단단한 존재다. 팬데믹 기간에 세상은 참 많이 바뀌었지만 2024 파리 올림픽은 변함없이 흐르는 센강을 주무대 삼아 개막식의 혁신을 꾀할 예정이다.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대성당 같은 이 도시의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배경으로 무려 60만여 명의 관객이 강변을 메워 보트 퍼레이드로 펼쳐지는 개막식을 지켜보게 된다고. 또 ‘역사적인 공간의 변주’를 요리해온 그간의 내공을 살려 도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도시의 랜드마크를 올림픽 경기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눈에 띈다. 예컨대 샹젤리제는 커다란 사이클링 경기장으로 변신하고, 에펠탑 아래 마르스 광장에는 비치발리볼 경기장이 들어서며, 앵발리드와 베르사유 궁전, 그랑 팔레 같은 장소도 다국적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무대로 거듭나게 된다. 또 새롭게 가세한 ‘브레이크 댄스’ 같은 종목을 비롯해 스케이트보드, 3X3 농구 등 역동적인 어번 스포츠 경기는 모두 콩코르드 광장에서 열린다. 이처럼 내로라하는 랜드마크에서 펼쳐지는 경기를 바라보는 ‘관중은 있고 마스크는 없는’ 올림픽이라니. 마침 1구에 자리한 숙소였던 파리지앵 감성으로 새롭게 단장한 세련된 부티크 호텔 르 캉봉(Le Cambon)에서 미술관 산책을 위해 튀일리 정원을 지나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오가면서 바라보니, 상상만 해도 벅찬 풍경이 미리 떠올랐다.


●●  올여름을 그야말로 뜨겁게 달굴 파리 올림픽(2024. 7. 26~8. 11)에는 ‘의미 있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따라붙는다. 우선 특기할 만한 점은 남녀 성비를 동일하게 맞춘, 그러니까 최초의 양성 평등 올림픽으로 기록될 예정이며, 사상 처음으로 선수가 아닌 일반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경기가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실제 경기 코스에서 진행되는 마라톤 종목(10km와 풀 코스 중 선택 가능)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올림픽에 참여하는 경험을 누려볼 수 있는 기회다. 또 시상식 역시 관객과 함께 즐기는 ‘축제’ 같은 콘셉트로 기획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올림픽 기간에 현대미술, 패션, 공연, 서브컬처 등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문화 예술 행사가 더 경이로운 수준으로 펼쳐지리라는 건 비밀이 아니므로 파리 자체가 ‘축제’의 현장이 될 테지만 말이다. 또 파리 외에도 올림픽 공식 경기가 펼쳐지는 보르도, 낭트, 마르세유 등의 도시들은 저마다 매혹적인 하드웨어와 소프트 콘텐츠를 새롭게 장착하고 ‘카운트다운’만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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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나인가 브랜딩인가? 전략적 행보가 돋보이는 브랜드들의 문화 예술 경영
  팬데믹 기간 직전이나 직후에 파리를 찾은 이들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파리에는 매혹적인 공간과 시도가 더 다양하게 생겨나고 있다. 특히 미술계에서는 제2의 부흥기를 거론할 정도로 훈풍이 불고 있다. 그중 주목할 만한 동력은 글로벌 아트 페어의 성공적인 안착이다. 2022년 ‘파리+ 바이 아트 바젤(Paris+ par Art Basel)’이라는 다소 어색하고 복잡한 이름으로 등장한 이 현대미술 페어는 세계 최강 아트 페어 브랜드인 ‘아트 바젤’의 모기업 스위스 MCH 그룹이 이 도시의 대표 페어였던 피악(FIAC)을 인수하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시킨 플랫폼이다. 사실 기존 인력을 어느 정도 흡수한 데다 페어 장소(그랑 팔레 에페르메)도 변하지 않은 터라 “뭐 그리 달라지겠어?”라고 시큰둥한 이들도 있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첫해는 개장 효과도 있었겠지만, 2회가 열린 지난해 가을에도 분위기는 상승세였다. 올해는 본 전시관인 그랑 팔레가 보수 공사를 마치고 페어 무대로 다시 나설 예정이라 ‘판’이 확 커진다. 하우저앤워스, 데이비드즈워너 등 메가 갤러리들이 파리 지점을 내는 등 갤러리 생태계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아트 페어 경쟁에서도 프리즈(Frieze)를 내세운 런던을 판정승으로 제친 김에, 오래전 뉴욕에 빼앗긴 현대미술 메카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려는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온다. 안 그래도 요즘 세계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은 뮤지엄 톱 10 목록에서 지분이 압도적인 파리 아닌가(아트 산책 루트이기도 한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  이처럼 미술계의 체급이 올라가는 변화의 배경에는 ‘메세나’ 활동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들의 행보도 큰 몫을 차지한다. 현대미술은 럭셔리의 끝판왕으로 불리기도 하는 영역 아니던가. VIP 고객을 대상으로 아트 페어와 협업을 맺는 브랜드의 전략적 마케팅도 있지만, 웬만한 글로벌 미술관을 무색하게 할 정도의 컬렉션과 기획력을 내세워 ‘블록버스터’ 전시를 선보이니 시너지 효과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16구에 호젓하게 자리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 전시가 열리고, 도심(1구) 레알 지역의 역사적 기념물인 옛 상업거래소(Bourse de Commerce)의 인상적인 돔형 건축물을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피노 컬렉션의 대형 기획전이 펼쳐지는 식이다.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더불어 럭셔리업계의 양대 산맥이자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예술계 큰손이기도 한 프랑수아 피노 회장의 현대미술품 컬렉션을 모아놓은 파리의 프로젝트가 대결하는 양상이다. 파리발 메세나의 원조로 여겨지는 까르띠에 현대미술 재단도 14구에 자리하고 있는데, 내년께 13배나 더 큰 새로운 아트 센터를 도심에 열 예정이라 하니 안 그래도 ‘발품’ 팔 일 많은 파리에서의 문화 예술 산책이 즐겁다 못해 버거워지지 않을까 걱정마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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