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도시의 미술 축제는 어떻게 성장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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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01, 2025

글 고성연(아이치현 현지 취재)

아이치 트리엔날레(Aichi Triennale) 2025

일본의 문화 예술계는 비엔날레가 아니라 트리엔날레(triennale), 그러니까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현대미술 축제가 유독 많다. 올해도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주 무대로 하는 세토우치 트리엔날레가 일찌감치 막을 올렸고, 초가을에는 아이치 트리엔날레(Aichi Triennale)가 시동을 걸었다.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나고야가 속한 아이치현에서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글로벌 현대미술제로, 2010년에 처음 탄생해 올해로 6회를 맞이했다(9. 13~11. 30). 이번 아이치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은 유난히 관심을 받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을 구성하는 7개 토후국 중 하나인 샤르자의 공주인 후르 알-카시미(Hoor Al-Qasimi)가 맡아서다. 미술계에서는 이제 ‘공주’라는 수식어보다 지구촌을 종횡무진 누비며 활약하는 ‘워커홀릭’이 더 걸맞은 그녀는 아랍권의 저명한 시인 아도니스의 시집에서 차용한 ‘재와 장미 사이의 시간(A Time Between Ashes and Roses)’을 주제로 내걸고 이를 통해 ‘죽은 나무에서 꽃이 필 수 있을까?’라는 생명의 존엄을 바탕에 둔 광의의 생태적 질문을 던진다.


 Aichi Arts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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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의 아랍 시집에서 받은 창조적 영감
노벨 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이름을 올려온 저명한 시인 아도니스(Adonis, 1930)의 본명은 알리 아흐마드 사이드 에스베르(Ali Ahmad Said Esber). 시리아 출신으로 정치적 이상과의 괴리로 레바논을 거쳐 1985년부터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다. 아랍권의 문학적 인습을 타파하려는 혁신적 성향을 지녔던 그를 거부한 문예지에 글을 싣고자 택했다는 필명 아도니스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그리스신화의 미소년 이름이 맞다.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녀의 애인 아레스의 질투를 사는 바람에 생을 마감한 아도니스는 해마다 스러졌다 부활하는 자연의 순환을 나타내는 초목의 정령으로 여겨진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시집 <너의 낯섦은 나의 낯섦>(김능우 옮김, 민음사) 중 작가 소개를 보면 신화학자들은 아도니스를 바빌로니아의 ‘풍요의 신’으로 새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는 탐무즈(Tammuz)의 변형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20세기 중반 그를 비롯한 소위 탐무즈파 아랍권 시인들은 당대 모더니스트 시인 T. S. 엘리엇의 ‘황무지’에 자극받아 풍요의 신화에서 피 흘림의 희생을 통한 메마른 대지의 소생과 회복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아도니스는 1967년 6월 일어난 ‘6일 전쟁(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제3차 중동 전쟁)’을 지켜보며 슬픔과 희망을 담아 쓴 시집을 냈는데, 그 제목이 <재와 장미 사이의 시간(A Time Between Ashes and Roses)>(1970)이다. 은유적으로 전쟁의 상흔(재)과 새로운 시작에의 가능성(장미)을 읊은 이 구절들은 올해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인 ‘인간과 환경 사이의 균열과 회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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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들어버린 나무는 어떻게 다시 꽃을 피우는가?
재와 장미 사이의 시간이 오고 있다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때가
How can withered trees blossom?
A time between ashes and roses is coming
When everything shall be extinguished
When everything shall begin again
__아도니스의 시집에서 발췌한 구절(1970)


“아이치 트리엔날레 감독을 맡게 됐을 때 시도해보고 싶은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당시에는 제목이 없었습니다. (아도니스의 시집에서 따온) 이 제목은 제 개인 프로젝트에서 쓴 적이 있는데, 전쟁뿐 아니라 환경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문장과 단어에서 너무나 많은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해 다시 쓰기로 했습니다. 시적인 제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이번 트리엔날레 현장에서 필자와 별도로 가진 인터뷰에서 후르 알-카시미(Hoor Al-Qasimi, b. 1980)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던, 전시 주제로 내세운 문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많은 비극이 지구상에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에도 유효한 울림을 주는 아도니스의 작품을 여러 예술가의 관점에서 살펴보았고, 그들을 통해 다양한 연결 고리를 발견했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Seto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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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미술 생태계에서 지평을 넓혀가는 아트 파워
지난 2월 샤르자 비엔날레에 이어 이번에 나고야에서 다시 만난 후르 알-카시미는 1972년부터 샤르자를 통치해온 H. H.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카시미의 딸이다. 역사학자이자 철학 박사 출신으로 1993년 샤르자 비엔날레를 탄생시키는 등 모국의 문화를 꽃피우는 데 큰 역할을 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후르 알-카시미는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을 일찌감치 품어 20대에 데뷔했고(공동 예술감독)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 이제는 글로벌 미술계에서 알아주는 ‘브랜드’가 됐다. 대다수 중동 왕족들처럼 큰손 컬렉터로서가 아니라 엄연히 예술 플랫폼을 이끄는 능력 있는 리더이자 기획자로서 말이다. 이런 배경에서 샤르자에서는 중동 지역의 현대미술 플랫폼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한 샤르자 비엔날레를 꾸리는 샤르자 미술재단(이하 SAF)의 수장으로 만났지만, 나고야(아이치현)에서는 예술감독으로 마주했다.
마침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순간 한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트리엔날레 준비에 바빴던 딸의 안부를 묻는 술탄의 전화가 왔다. 간만의 통화였던지라 부득이 양해를 구하고 부친과 잠시 얘기를 나눈 그녀에게 혹시 잦은 출장 탓에 딸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해 부친이 섭섭해하지는 않냐고 물었다. “오히려 (바쁜 딸의 존재감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동시에 제가 같이 있기를 원하시기도 하지만요.” 그녀는 이렇게 답하면서 싱긋 웃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이어 내년 봄 열릴 시드니 비엔날레 예술감독까지 맡아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듯싶은데, 일본에서 본 그녀는 몸은 피곤해도 얼굴은 꽤 편안해 보였다. 필자와의 인터뷰에 앞서 전날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는 영어를 쓰기는 했지만 사실 학창 시절부터 공부를 해서 일본어에 능통하고 수없이 일본에 여행을 왔던 덕분에 현지 문화에도 익숙한 그녀여서일까. 그래도 1회 아이치 트리엔날레가 열렸을 때는 관람객으로 나고야를 찾았는데, 이제 예술감독으로 현지 큐레이터들과 호흡을 맞추고 미술제를 이끈다는 건 분명 감회가 특별했을 법한 커리어의 도약이다. “일본 전역을 다녀봤어요. 나고야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좋아요. 필리핀 사람도 많고, 베트남 사람도 많고, 네팔 사람들도 섞여 있죠. 어떤 면에서는 아주 캐주얼한 도시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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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속하고 회복할 수 있는가??
사실 필자에게 초행이었던 나고야의 이미지는 제조업(토요타 본사와 공장이 나고야 시내에서 1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비중 때문인지 상대적으로 건조한 편이었다. 하지만 후르 알-카시미 감독의 말처럼 나고야는 자동차, 조선, 기계 등의 분야가 발달한 산업 허브인지라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거주자와 다수의 비즈니스 방문객이 머무는 아이치현의 현청 소재지다. 그리고 이번 트리엔날레가 펼쳐지는 무대 중 하나인 세토시는 아이치현에서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개막 주간에 도자기 축제가 막을 올리기도 했다). 나고야 시내에 있는 아이치 아트 센터를 비롯해 아이치현 도자 미술관(세토시), 그리고 세토시의 창고, 폐교, 문 닫은 대중목욕탕 같은 재생 공간이 22개국에서 온 62개 팀의 예술가가 참여한 올해 트리엔날레 전시의 3대 거점이다.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의 파괴와 재생을 얘기하는 다채로운 관점과 스토리텔링을 품은 작업을 설치, 회화, 미디어, 조각 등 다양한 매체로 선보이고 있다. 2023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작가로 황금사자상을 받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조각가 시몬 리(Simone Leigh)를 비롯해(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예술와 연관된 형태를 차용하는 그녀는 이번에도 자신이 즐겨 쓰는 재료인 청동과 도자로 된 커다란 조각 작품을 선보였다) 아프리카 가나의 정치 난민 가정 출신으로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대표 작가로 선정된 영화감독이자 예술가 존 아캄프라(John Akomfrah)라든지, 세토시에 자리한 폐교(초등학교)에서 인류의 역사와 공교육 문제를 끄집어내며 3D 모델로 제작한 디지털 이미지로 벽을 덮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 아트선재센터에서 그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다), 스기모토 히로시, 가토 이즈미 같은 일본 스타 작가들의 이름도 눈에 띄지만,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들에게는 언뜻 낯설게 느껴져도 잘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다국적 작가들의 흥미로운 작업은 국제적인 미술제가 줄 수 있는 ‘공진’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이번 트리엔날레의 수석 큐레이터를 맡은 이다 시호코(Shihoko Iida)는 아도니스의 아름다운 시를 관통하는 주제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복과 회복 탄력성에 관한 질문”이라며 지진과 쓰나미 등으로 시달려온 입장에서 저희(전시 큐레이팅 팀)는 크게 공감할 수 있었고, 배경과 관계없이 누구든 연관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설치 작업을 선보인 달라 나세르(Dala Nasser, b. 1990, 레바논 출신의 작가)는 노아의 무덤(요르단, 튀르키예, 레바논에 있다고 알려진)이 ‘바다에 묻혀 있다’는 스토리텔링으로 사실 무덤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우리는 ‘물’로 연결돼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재앙에 노출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달라 나세르 말고도 힘 있는 서사와 매혹적인 조형의 조화가 돋보이는 여성 작가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중에는 여러 국제 미술제에서 영상, 설치, 콜라주 작품 등을 선보여왔고 뉴욕 뉴 뮤지엄에서 회고전(2023)을 갖기도 한 케냐 출신 왕게치 무투(Wangechi Mutu, b. 1972)도 반갑게 다가왔다. 황량한 언덕 위에 한 여성이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다가 막바지에 땅이 갈리지고 불길이 치솟으며 순신간에 대자연에 삼켜져버리는 내용의 3채널 영상 작품인 ‘The End of Carrying All’(2015), 기다란 뱀 모양의 몸에 베개를 베고 잠든 여성의 얼굴을 합친 자전적 성격의 설치 작품으로 몸통 주변에 놓인 왁스로 만든 작은 오브제들이 전시마다 더해지는 ‘Sleeping Serpent’(2014~2025) 등이 아이치현 도자 미술관에서 전시된다.



 Aichi Prefectural Ceramic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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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치 트리엔날레 2025를 수놓은 한국 작가들
한국에서는 고결, 김중원, 조지은으로 구성된 시각 연구 밴드 이끼바위쿠르르, 그리고 뮤지션에서 출발해 사운드 아티스트로 활약하는 권병준, 이렇게 두 팀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끼가 덮인 바위와 의성어인 ‘쿠르르’를 합친 재미난 그룹명을 지닌 이끼바위쿠르르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며 생태적 관찰과 접근을 시도해왔는데, 이번 트리엔날레에서는 토요타 시티의 마을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하시노 ‘다리 밑’ 축제와 노년층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 등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설치 작업과 영상 등을 소개하고 있다(아이치 아트 센터). 직접 만든 로봇으로 몹시도 서정적이면서 강렬한 울림을 주는 연극적 전시를 선보여 국립현대미술관(MMCA) ‘올해의 작가상’(2023)을 받은 권병준 작가는 이번에 위치 기반의 음향 시스템을 바탕으로 헤드셋을 끼고 야외 공간을 거닐며 미리 채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아이치현 도자 미술관). GPS 안테나를 활용해 1백80군데에 걸쳐 소리 포인트를 심어놓은 잔디밭에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기다 보면 나지막한 읊조림, 재잘거리는 소리, 구슬픈 노랫소리 등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일본어, 한국어, 영어 버전 중 선택할 수 있다. “똑바로 서 있으면 ‘낮의 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숙이면 ‘밤의 소리’로 바뀝니다.” 마침 현장에서 만난 권병준 작가는 “1년에 걸쳐 공들인 작업”이라면서 “야외 공간에 최적화된 입체 음향”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관람객 중에서는 1시간 30분 동안 그가 선사한 ‘소리 산책’에 빠져든 사례도 있었다고 하는데, 필자도 짧게나마 산책에 나서 잔디밭을 유유히 걷다 보니 막바지에 이르러 익숙한 표정과 자태의 조선시대 석상들과 마주치게 됐다. 온화한 얼굴을 한 채 묵묵히 반겨주는 듯한 석상들을 대하노라니(사실 곧 떠나야 하는 필자의 스케줄을 고려한 작가의 귀띔 덕분에 제대로 찾았지만), 어쩐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권병준 작가의 스튜디오에 직접 찾아가봤다는 후르 알-카시미 감독이 어째서 그의 공간, 작업, 엔지니어링, 그리고 생각에 반해버렸다고 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혹시 아이치 트리엔날레 기간 중에 나고야를 찾을 기회가 없더라도 현재 서울 송은에서 진행 중인 <파노라마> 기획전에서 이끼바위쿠르르, 이주요, 김민애, 최고은 등의 작가들과 더불어 그의 다른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을 선보이고 있음을 기억해둘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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