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일하다’를 의미하는 ‘트라바유(Travail)’의 라틴어 어원은 ‘트리팔리움’(tripalium)이라는 고문 기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영어로 ‘여행하다’라는 뜻을 지닌 ‘트래블’에도 영향을 줬다니, 현대인에게 ‘일’은 인생에 걸친 긴 여행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 비춰볼 때 흥미롭다. 수명 1백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아무래도 일의 여정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사명일 필요는 없지만 한 가지 직업의 정체성에 갇혀 있지 않는 ‘르네상스식’ 사고가 힘을 얻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일의 경계를 풍요롭게 넘나드는 네오르네상스를 꿈꾸기 위한 우리의 자세를 곱씹어본다.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융합의 시대. 한 우물만 파다 막을 내리는 인생에 자족하지 않고 직업 전환을 꾀하고 부단히 일의 지평을 넓히는 행보가 꽤 당연하게 느껴지는 추세다. 하물며 세 자릿수 수명을 쉽게 거론하는 ‘1백 세 시대’에서는 이 같은 ‘커리어 다모작’이 생계를 위해서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든, 혹은 ‘무위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든 그 동기는 저마다 다를지언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사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토대’도 갖추지 못한 새 일에 무작정 뛰어들기에는 조심스럽다. ‘경계 무너뜨리기’라는 도전이 멘디니 같은 크리에이터에게는 왠지 상대적으로 더 무난하고 자연스러워 보이기에, 흔히 과학자, 건축가, 디자이너, 작가 등 ‘창조 계급’으로 일컬어지는 직군에 속한 이들이 부러움을 사는 것도 사실이다(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선망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뜨는 직업’을 겨냥해 그 분야에 매진한다는 건 무모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예측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닐뿐더러 ‘나의 본질’과 맞지 않으면 참 괴로운 게 현대인들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일’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직업의 세계에서도 예측은 결코 쉽지 않다. 해마다 막대한 로열티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한 스타 디자이너는 사석에서 20세기 후반 일부 디자이너들이 ‘셀럽’ 수준으로 각광받으면서 본인도 큰 수혜자가 되긴 했지만 다음 세대에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고 한다. 3D 프린팅이니 기업의 인하우스 시스템이니 하는 환경의 변화로 개개인의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지닌 스타가 되는 일은 더 이상 쉽게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며, 심지어는 ‘장인’처럼 희소한 존재로 남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는 것. 그래서 ‘아빠’를 닮고 싶어 하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디자인보다는 창조력의 근간이 되는 순수 미술을 배우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도록 하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인류 문명을 지탱해온 뼈대는 사라지지 않으며 소위 ‘경계의 확장’이란 것도 탄탄한 기초 체력을 바탕으로 해야만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은퇴’는 자유다(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배짱과 환경이 갖춰져야 하겠지만). 젊은 시절 빨리 기반을 잡고 돈을 충분히 모아둠으로써 ‘노인’ 소리를 듣기 전부터 일찌감치 일을 그만두고 유유자적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이 부지기수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의 살아 있는 전설인 피터 린치는 10대부터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펀드매니저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40대 중반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은퇴해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일을 완전히 그만뒀을까? 이제 70세의 노장이 된 그는 파트타임으로 투자 자문을 하면서 주로 젊은 애널리스트들을 위한 ‘멘토’ 역할을 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자선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그는 ‘기부도 투자의 한 형태’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래서 기부를 하더라도 더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갈 수 있을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선호한다고 한다. 예컨대 자신의 터전인 보스턴에서 1970년대에 생겨난, 문화인을 위한 신년 전야제 행사, 청소년 교육에 초점을 맞춘 지역사회 서비스 등이 그 대상으로, 실제로 국경을 넘으며 널리 확산된 프로그램들이다.
피터 린치는 은퇴 뒤 유급 노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해온 셈이다. <러쉬>의 저자 토드 부크홀츠는 이렇듯 아쉬울 것 없을 듯한 부자들이 평생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예가 많은 이유는 인간이 도전을 통해 ‘도파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권태의 치료약은 오락거리가 아니라 해야 할 그 무엇, 관심을 쏟아부을 만한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라는 존 가드너(미국의 시민 단체 창설자)의 주장과도 맞닿는 얘기다. 또 나이가 차고 돈에 쪼들리지 않더라도 일 중독에 빠져 좀처럼 그만두지 못하는 ‘개미형’ 인간도 많다. “개미는 미래를 위해 살지만, 막상 미래가 왔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아는 건 아니다”라는 게 노동 철학의 대가 조안 B. 시울라의 설명이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는 ‘시기와 경쟁’이야말로 개인에게 일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렇듯 일을 둘러싼 동기와 의미는 복잡다단하다. 시대에 따라, 국가의 노동환경에 따라, 저마다의 상황에 따라 각자의 삶에서 일의 존재감은 다를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육체노동과 봉사를 강제적인 ‘고통’으로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고스란히 노예의 몫으로 떠넘겼다. <워킹 라이프(The Working Life)>란 책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을 위해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 수도사들이 농부로, 장인으로, 기술자로 ‘조용히’ 활약하면서 중세의 마을과 도시를 발전시키자 시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인간의 의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일은 성실히 하되, 부의 축적에 대해서는 경계할 것을 권장하는 풍토가 자리 잡았다. 일의 미학을 꽃피운 건 르네상스 시대. 손으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간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는 시각이 싹텄다. 장인들, 특히 한 가지 이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동경의 대상이 됐다. 저자인 조안 B. 시울라의 표현처럼 일에 ‘매력’이라는 낭만주의적 요소가 녹아들었다. 하지만 칼뱅과 루터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영향받고 있는 노동 윤리를 들고나왔다. 일은 신의 소명이며 직업에는 귀천이 따로 없으므로 어떤 일에든 근면하게 임하라는 가르침을 설파한 것이다. 미국 북부를 비롯해 일부 북유럽 국가들에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뿌리를 내렸다. 동양권에 널리 퍼졌던 불교는 다른 관점을 제공했다. 어차피 세상은 덧없고 인생은 괴로운 것이므로 정신을 수양해야 하는데, ‘정직한 일’은 그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어쨌거나 오늘날 상당수의 국가에서는 태도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을 ‘삶의 목적’으로 지향하는 문화가 퍼져 있다. 따라서 유급 노동이 일의 중심으로 당연시되고, 명함이 ‘정체성’이나 ‘자존감’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현대의 문화에서는 많은 이들이 ‘베짱이’를 부러워하지만 실제로는 단기간이라도 ‘자발적 백수’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심지어 부양가족이 없고 가난하지 않은 ‘솔로족’조차도).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과 동일시하는 건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냥꾼이나 비평가가 되지 않고도,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오후에는 고기를 잡으며 저녁 식사를 마치면 비평을 할 수 있는 세상”을 이상향으로 묘사했다. 대중이 아마추어 수준에서 여러 가지 일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를 꿈꾼 것이다. 그런데 사실 르네상스인들은 프로 수준으로 다양한 일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한 가지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보편적으로 부각되고, 분업이 갈수록 더 전문화 양상을 띠었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최근 각광받는 ‘T자형’, 다시 말해 깊이도 있고 폭도 넓은 인재상은 최고의 르네상스인들의 면모와 부합한다. 무모한 도전은 아닐 것이다. 1백 세 시대에는 자신의 경계를 T형으로 확장해나갈 수 있는 인생 여정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다만 우리에게는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처럼 노익장과 재기를 과시할 수 있는 건 소설에서나 가능하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는 자세, 나이의 경계 역시 괘념치 않는 시선이 필요하다. 언젠가 프랑스의 한 바이어가 무심코 던진 ‘각성의 멘트’가 있다. “세상에, 이 젊은 디자이너 참 괜찮다.” 그 디자이너는 40세를 넘긴 나이였다. 굳이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 영역에서 ‘기초’를 제대로 다졌다고 치면 10년, 20년은 내공을 쌓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밑바닥에 깔린 말이었다. 또 한 가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은 무대를 꿈꾸는 건 크리에이터 같은 소수의 집단만 가능하다고 미리 체념하지는 말자. 어느 영역에서나, 누구나 창의적일 수 있다. 건축가이자 발명가, 조각가, 디자이너 등 다방면으로 활약해 ‘런던의 다빈치’로 불리는 토머스 헤더윅은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창의적인 인물은 홍콩의 부동산 개발업자였다”라고 했다. 언론에서는 심심하면 가망 없는 직업 목록을 발표하지만 그러한 예단은 맹신하지 말자. 비즈니스와 정치, 예술을 조화롭게 버무린 영국 잡지 <모노클>은 2007년 창간할 때부터 다른 미디어업체들과는 달리 ‘종이’에 집중했다. 물론 웹사이트에도 기사를 싣지만, 이는 종이판 정기 구독자들한테만 제공한다(그래서 낱권으로 1년 치(12권)를 사는 것보다 1년 정기 구독료가 더 비싸다). 독창적인 글과 구성을 내세워 너도나도 ‘쪼개 팔기’를 하는 ‘마이크로 콘텐츠’의 시대에 역발상 전략을 취해 성공을 거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우리의 존재는 분명 ‘우리가 하는 일’ 이상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존재를 넘치도록 풍부하게 이끌어줄 수도 있다. 일 자체를 미치도록 즐겨 그 일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자기 목적적 경험(autotelic experience)’이 그런 삶의 중추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이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소중한 일의 발견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일할 자유, 일터에서의 자유, 그리고 일로부터의 자유가 모두 손쉽게 얻을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인 것처럼. “당신 스스로 당신이 바라는 세상의 변화가 되어라”라는 마하트마 간디의 명언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