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케이블 채널 OCN은 흥미로운 시도의 결과물을 하나 선보였다. 그동안 OCN 오리지널 드라마에 등장한 인기 캐릭터를 만화로 재구현한 <오리지널 씬>이라는 동영상 형태의 TV 웹툰이다. OCN 채널은 물론 카카오 TV를 통해서도 공개한 이 TV 웹툰에는 <나쁜 녀석들: 악의 도시> 우제문(박중훈 분), <38사기동대> 백성일(마동석 분), <보이스>의 무진혁(장혁 분)과 강권주(이하나 분), <블랙>의 블랙(송승헌 분), 강하람(고아라) 등이 주요 캐릭터로 총출동했다. 화제몰이에 성공한 이 콘텐츠는 바로 요즘 대중문화 콘텐츠의 지형을 강력하게 수놓고 있는 트랜스미디(transmedia) 스토리텔링 방식의 전략적 산물이다.
“그렇게 우려먹으니 좋니? 좋아?” 지난여름을 제대로 강타한 가수 윤종신의 역주행 히트 발라드곡 ‘좋니’에 이어 최근 가수 김민서의 답가 ‘좋아’ 역시 크게 인기를 얻자 일각에서는 이처럼 패러디 섞인 반응도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좋니’의 여자 버전이 여럿 나온 시점에 전략적으로 재활용해 성공한 사례가 ‘좋아’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이별 뒤 아픈 그리움을 토해낸 남성 화자의 노래라면, 같은 멜로디를 편곡하고 가사를 바꿔 여성 화자의 마음을 표현한 곡이 후자다. 단순한 변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멜로디와 섬세한 가사의 힘으로 떠나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찌질한’ 구남친의 감성과 미련 따위 버리고 갈 길 가려는 구여친의 정서를 담았기에 엄연히 2개의 히트 콘텐츠로 인정받았다.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감성의 결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재탕의 미학’이라는 주장에 대해 윤종신을 잘 아는 팬들은 그저 묻어 가기가 아니라 가수 특유의 작업 방식이라고 반박한다. 실제로 윤종신은 똑같은 멜로디를 쓰면서 편곡을 달리한 ‘본능적으로’와 ‘이성적으로’를 세트로 내놓은 적이 있고, 본인이 부른 ‘너에게 간다’의 여자 버전인 ‘나에게 온다’를 옥주현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단지 좋니-좋아 사례처럼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거나 회자되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재활용이 뭐 어떤가? 콘텐츠가 소비되는 속도가 빠른 이 시대에 대중의 눈도장을 이미 찍어놓았다는 건 매력적인 자산 아닌가. 애초에 콘텐츠 과잉 시대에 주목받는 것 자체가 힘든 법이고, 그런 인지도 있는 콘텐츠를 갖고도 또다시 성공을 빚어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사골처럼 우려먹는다 한들 어떠랴? 그게 가능하기만 하다면, 사실은 대다수가 부러워할 능력이 아닐까. 그런데 요즘 극장가 풍경을 보면 스케일이 남다른 콘텐츠 변주의 달인이 눈에 띈다. 다름 아닌 ‘할리우드’다. 사실 오늘날 콘텐츠 세상에서는 하나의 원석을 여러모로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콘텐츠가 여러 미디어를 넘나들면서 대중과의 호흡을 바탕으로 유기적으로 확장하는 흐름이 하나의 큰 축을 이루고 있다. 이름하여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transmedia storytelling)’이다.
최근 국내 극장가의 흥미진진한 대결 중 하나는 코믹스 기반의 할리우드 히어로물로 유명한 마블과 DC의 한판 승부다. 미국 코믹 북 양대 산맥인 마블의 <토르: 라그나로크>와 DC 코믹스의 <저스티스 리그>가 연이어 상영됐기 때문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경우에는 ‘어벤저스(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 캐릭터 중 하나인 토르를 내세운 작품으로, 전작인 <토르: 천둥의 신>(2001), <토르: 다크월드>(2013)>보다 흥행에 성공하면서 관객 5백만에 육박하는 좋은 성적을 냈고, <저스티스 리그>의 경우에는 마블의 어벤저스 군단에 대적할 DC의 야심작으로 원더우먼, 배트맨, 플래시, 사이보그, 그리고 히어로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슈퍼맨까지 출동시킨 만큼 ‘대박’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최근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부활의 신호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한 번쯤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 같다. 어째서 ‘따로, 또 같이’ 지겹도록 나오는 영웅 캐릭터들이 그처럼 꾸준한 인기몰이, 적어도 화제몰이를 할 수 있는지?
물론 대규모 자본과 시스템, 배급력으로 대중문화 콘텐츠의 판을 움직이는 할리우드의 저력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 할리우드가 왜 그처럼 콘텐츠의 변주에 열을 올려왔는지는 문화 콘텐츠 생태계의 비즈니스 논리와 결부돼 있는 사안이다. 아무리 잘나가는 할리우드라고 할지라도 그 본질은 결국 콘텐츠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그리고 경쟁자보다 우월하게 눈에 띄기다. <콘텐츠의 미래>에서 저자 바라트 아난드 교수는 미국의 TV 방송 채널이 40년 전에는 10여 개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9백 개가 넘는다고 했다. 또 1분마다 72시간 분량의 동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오고 3백만 개의 콘텐츠를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공유하며, 매일 23만 장의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게재된다고 했다. 이처럼 인간의 ‘할 거리’, ‘볼거리’가 점점 많아지는 디지털 시대에 대중의 ‘관심’을 붙들기란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이미 확고한 인지도와 팬층을 거느린 ‘킬러 콘텐츠’를 활용하는 건 영리한 지략일 것이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프랜차이즈 콘텐츠’ 생산에 열을 올리는 건 ‘먹고 들어가는’ 게 기본으로 있기 때문이 아닌가. 더구나 제작비 규모가 갈수록 커지는 리스크 높은 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므로 대작 한 편의 일회적인 성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후속 편의 기본적인 흥행을 어느 정도 담보해주는 시리즈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꾸준한 캐시 플로를 가능케 하는 든든한 기둥이 될 수 있다. 할리우드가 하나의 콘텐츠로 영화, 드라마, 음악, 게임, 테마파크, 머천다이징 등 ‘원소스 멀티 유스(OSMU)’ 방식의 ‘해리포터’ 같은 프랜차이즈물에 집중 투자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행보다.
그런데 전 세계 문화 콘텐츠 생태계를 장악해온 할리우드의 프랜차이즈 전략은 이제 단지 OSMU 차원이 아니라 ‘트랜스미디어 콘텐츠(transmedia contents)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화하고 있다. OSMU는 성공한 원작 콘텐츠를 기반으로 스토리의 ‘각색’을 통해 순차적으로 다른 미디어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는 단계적이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각각의 콘텐츠가 개별적 세계를 표현하면서 통합적 세계가 창조되는 것을 뜻한다. 단지 하나의 콘텐츠가 다수의 미디어에 걸쳐 비슷하게 펼쳐지는 게 아니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분화하고 변형되면서 확산되고, 다시 융합되는 유기체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는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스토리텔링에 기반을 두었다고 해도 그 형제자매 콘텐츠물의 내용이 같을 수도 없을뿐더러 캐릭터도 재배치된다. 미디어가 달라지고 작품이 달라지면서 주연이 조연이, 조연이 주연이 될 수도 있고, 다시 모든 인물이 복수의 주인공으로 출연할 수 있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생성된다(혹은 영화에서는 A가 주인공인데 모바일에서는 B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앞서 예로 든 <토르: 라그나로크>와 <저스티스 리그>도 마찬가지로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다. 예컨대 토르는 어벤저스 군단의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솔로 무비인 ‘토르 3부작’을 통해 입지를 단단히 굳히면서 차기 어벤저스 시리즈에서는 활약이 기대된다. ‘열린 구조’로 캐릭터가 성장하고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전체 시리즈물이 지속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셈이다.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를 학문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인데, 그는 이상적인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서 각각의 미디어는 저마다 최선의 역할을 수행한다면서 ‘독자성’을 강조했다. 하나의 스토리가 영화로 소개되고, TV, 소설, 그리고 만화로 확장될 수 있지만, 영화를 보지 않고도 충분히 게임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토리의 접점이 다양해 어떤 미디어를 먼저 접한다고 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미디어로 확장해나가면서 콘텐츠의 변주를 펼쳐내는 것만이 트랜스미디어의 매력의 전부는 아니다. 콘텐츠 사용자의 참여와 공유를 빼놓을 수 없다. 기존 미디어 세계에서는 누군가 스토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면 사용자가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사용자가 스토리를 함께 만들어나가고 이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고, 이것이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특징이기도 하다. 팬덤(fandom), 팬픽션(fan-fiction), UC(G)C(User Created[Generated] Contents) 등이 그 예다. 자주 인용되는 사례로 온라인 FPS 게임 ‘투 워(2WAR)’가 있는데, 이 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프랜차이즈 프로그램인 <노르망디의 이방인>을 보면 다큐멘터리 작가가 자신이 만든 오디오 드라마 파일을 도난당했음을 블로그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실제로 사용자들이 파일 찾기에 나서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면서 이야기를 완성해나간다. 허구의 콘텐츠임에도 사용자들이 네트워크상에서, 심지어 실제 상황에서도 협업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는 배경에는 ‘관객의 투영’이라는 요소가 버티고 있다. 관객이 경계를 허물고 콘텐츠의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몰입할뿐더러 자신을 등장인물로도 여길 수 있는 변화된 콘텐츠 환경 덕분이다.
이처럼 참여도와 몰입도가 높아지다 보면 콘텐츠에 대한 애정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지사.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를 가리켜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이유다. 이처럼 트랜스미디어는 여러 미디어에 걸쳐 사용자들이 콘텐츠의 캐릭터와 비전과 감정을 공유하고 스토리를 쌓아가는 ‘열린 서사’를 지향하지만, 그런 변주 속에서 확실히 연대를 다질 수 있게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다양한 형태와 이야기로 가지치기를 해나가면서도 ‘세계관’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벤저스의 캐릭터들이 게임이나 만화, 심지어 영화에서도 각자 따로 ‘놀더라도’ 결국 전체로 보면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계(other worlds)를 구축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식이다. 그래서 마블의 ‘유니버스’, DC의 ‘유니버스’ 라는 표현이 존재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실제로 콘텐츠 세계의 이러한 세계관은 과학 이론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세계가 존재하고 인간 세상은 단지 ‘실제’라고 불리는 세계일 뿐이라는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의 ‘가능 세계(possible worlds)’ 이론이 오늘날 트랜스미디어 콘텐츠에 큰 영향을 줬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콘텐츠 생태계의 트랜스미디어 현 주소는 어떨까? 이쯤에서 궁금해할법한 이슈일 것이다. 21세기형 트랜스미디어 콘텐츠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준 기폭제로 여겨지는 <매트릭스>, <블레어위치>가 나온 게 벌써 1999년인데 말이다. 전문가들은 트랜스미디어라는 키워드 자체가 거대한 프레임에서 작동하는 글로벌 콘텐츠의 영역이므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한다. 액션, 무협, 공포, 판타지 정도로 특화된 장르가 아니라면 ‘세계관’ 운운하면서 캐릭터를 창출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주장이다. 혹자는 한국형 트랜스미디어의 단초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이 제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웹툰에서 태동한 <미생>이 프리퀄(원작 작품 내용에 앞선 사건을 담은 속편) 형식의 모바일 무비로 먼저 제작되고 드라마로 확장되면서 유기적 콘텐츠로 이어졌는데, 결국 모바일 무비, TV 드라마가 모두 인기를 끈 사례다. 모바일 콘텐츠인 <미생 프리퀄>은 본편에 모두 담지 못한 등장인물 6명의 과거 이야기로 구성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대한민국 대중의 뇌리에 오래도록 자리해온 장수 콘텐츠 <무한도전>도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라는 의견도 있다. 콘텐츠 전문가 임희준 씨는 <문화콘텐츠와 트랜스미디어>라는 책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된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무한도전 캐릭터와 스토리 월드가 구축됐고, 이러한 자산을 활용해 사진전, 가요제, 투표 등 파생 콘텐츠를 만드는 모양새가 트랜스미디어의 속성과 닮았다고 해석했다. 하나하나가 개별 콘텐츠로서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활용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이 모든 과정이 캐릭터(출연자)와 시청자의 결속력을 강화해주므로 시청자는 단순히 지켜보는 사람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하지만 아직 ‘중심’이 되는 원천 콘텐츠와 그 세계를 공유하는 개별 콘텐츠와의 연계를 감안해 플랫폼과 장르를 넘나드는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기획’한 국내 사례는 없다. 트랜스미디어의 세계를 개척할 토종 콘텐츠가 나올지, 그렇다면 그 주인공은 과연 누가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