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형 미술관’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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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02, 2022

글 고성연

미디어아트의 새 전당, 울산시립미술관 


“뮤지엄이 허락하는 가장 큰 보람은 관람객이 단 하나의 대상과 친교를 맺는 데서 온다.” <끌리는 박물관>이라는 책을 쓴 매기 퍼거슨은 미술관의 미덕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하나의 거대한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는 핀잔을 듣는 21세기의 미술관이지만 여전히 현재의 나와 세상에 대해, 그리고 미래를 열어갈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아무리 휘황찬란한 이미지로 포장해도 인터넷으로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강렬한 물리적 경험은 팬데믹 시대에 더욱 소중하고 간절해진다. 지난 1월 초, 울산 북정동에 새롭게 들어선 울산시립미술관은 관람객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참여적 경험을 선사하는 미디어아트 플랫폼을 지향한다. 일단 인간과 기술의 공존, 산업과 예술의 조화를 모색하는 전시 콘텐츠는 울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잘 어울린다. 미술관만이 아니라 바닷가 전시장에 걸쳐 5개의 개관전이 펼쳐지고 있는 현장에 다녀왔다.



“결국 미술관은 과거보다 미래와 더 관계가 있다. 보존은 과거를 보전하기보다 공적 공간의 미래, 예술의 미래, 미래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다.”_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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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소비사회에서 미술관이라는 존재의 가치는 무엇일까? 거의 지적 유희만 남아버린 ‘예술의 죽음’을 얘기하는 비평가들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역시 소비의 물결에 휩싸여 현대미술이라는 값비싼 장식품을 보관하고, 내키는 대로 보여주는 거대한 수장고에 다름 아니라는 논리로 쏘아붙이기도 한다. 하지만 팬데믹 시대에 접어들면서 ‘공간’에 대한 대중의 갈망은 팡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듯하고, ‘퍼블릭 스페이스’로서의 미술관은 꽤 소중한 존재다. ‘집콕’에서 벗어나 건축의 오라를 느끼고 대상을 지긋이 바라볼 수 있는 탁 트인 문화 예술 공간을 선망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팬데믹 이전에 미술관은 각종 이벤트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도 각광받고 있었지만, 거리 두기가 강력한 임시 규범이 된 지금은 ‘관조하는 공간’으로서의 효용이 압도적이다.
물론 그저 시원하게 숨 쉴 곳이 필요해 찾는 이들도 있겠고, 참신한 볼거리를 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인간의 위대한 창조물을 주시하면서 성찰에 빠져드는 경험에 목마른 이들도 분명 있다. 저마다의 동기가 어떻든 간에 요즘 우리나라 곳곳의 미술관에 밀려드는 관람객 인파를 보면 그 같은 갈증의 크기가 느껴진다. 지난 1월 6일 울산 북정동에 새롭게 문을 연 울산시립미술관의 사례도 좋은 방증이 될 것 같다. 미디어아트 중심의 ‘미래형 미술관’을 표방하는 울산시립미술관은 개관 2주 만에 누적 관람객 수 2만 명을 돌파했고, 한 달 반 만에 6만 명 가까운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2월 20일 기준 5만 7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 ‘개관 효과’라는 게 뒷받침되기 마련이고 넓게 보면 ‘부울경’ 권역을 포용할 수 있지만 1백12만 명대의 울산시 인구 규모 자체만 감안하면 인상적인 수치다. 소득수준이 높은 산업도시인 만큼 ‘문화적 여유’는 있지만 콘텐츠와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해 ‘문화 예술 불모지’로 통하는 울산이라는 도시에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선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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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 만족 체험을 제안하는 3색(色) 개관전_북정동

울산 중구 북정동 원도심에 자리한 지하 3층,지상 2층 규모의 시립미술관(연면적 1만2,770㎡). 첨단 기술과 산업에 힘입어 급속하게 성장한 이 도시에 문화적 자산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뉴스’가 아닌데도 신설 시립미술관에 대한 관심은, 적어도 미술계에서는 적잖이 불거졌다. 모든 게 디지털로 수렴되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미디어아트’ 중심의 특화 미술관을 내세웠기에 이목을 끌 만했다. 게다가 초대 수장을 맡은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장이 대안공간 루프와 백남준아트센터를 거치며 내공을 쌓아온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기대를 모았다. 현재 개관을 맞이해 무려 5개의 전시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 셋은 북정동 본관을 무대로 한다. 일단 많은 이들의 시선을 잡아끌 만한 전시는 실감 미디어아트 체험 전용관(XR랩)에서 진행 중인 <블랙 앤드 라이트: 알도 탐벨리니>展. 백남준과 더불어 미디어아트의 신기원을 연 이탈리아 작가 알도 탐벨리니(Aldo Tambellini)의 개인전이다. 미술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탐벨리니는 모든 것의 시작을 ‘블랙’으로, 에너지의 근원을 ‘라이트’로 간주했는데, 이번에 선보인 그의 유작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원주민이다’(2020)에서는 ‘흑’과 ‘백’의 시적 조우를 음악과 영상, 시가 융합된 몽환적인 디지털 체험으로 선사한다. 바닥을 포함한 전시장 사면이 온통 블랙과 화이트로 일렁거리는, 그야말로 ‘오감’을 일깨우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어둠과 빛이 충돌하는 우주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10여 분의 시간이 ‘순삭’될 정도로 몰입감 넘친다.
개관을 기념한 특별 기획전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는 다수의 글로벌 작가가 참여한 전시다. ‘포스트 네이처’라는 표현은 자연과 기술이 융합해 또 다른 혼종적 생태계를 만들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품고 있는데,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다면 이름만 봐도 쟁쟁한 작가들이 눈에 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향력 있는 미술가이자 저술가로 오는 4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가지는 히토 슈타이얼(디지털 식물 영상 설치 작품)을 비롯해 지난해 리움미술관 재개관전에서 소개되기도 했던 세실 B. 에반스,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화제를 모은 알레산드라 피리치, 백남준, 슈리칭, 카미유 앙로, 김아영 등 비엔날레 같은 국제 행사에서 한데 어우러질 만한 수준급 아티스트들의 다채로운 작품을 접할 수 있다. 이들이 다루는 작품의 내용이 흥미로운 물리적 오라에 비해 대중에게 다가가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변화’만이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이 시대에 한 번쯤 ‘체험’하고 진지하게 들여다볼 법한 장르의 예술임에는 틀림없다. 이 밖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기획전 <노래하는 고래, 잠수하는 별>도 마련돼 있다. 자연과 인공적인 환경이 어우러진 울산이라는 도시를 어린이들이 오감을 활용해 느껴보는 데 초점을 맞춘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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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를 무대로 삼은 소장품展
+ 신진 작가展_대왕암공원

혹시라도 오는 4월 초까지 울산에서 ‘미술관 투어’를 시도해볼 의사가 있다면, 바닷가 해돋이 명소로 잘 알려진 대왕암공원을 ‘동선’에 넣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길 바란다. 물론 미술관 본관의 알짜 콘텐츠를 놓쳐서는 안 되겠지만 수려한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한 대왕암공원 내 폐교 건물에서 아름다운 ‘장외 전시’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울산교육연수원으로 쓰이는 폐교(옛 방어진중학교)의 교사동과 강당을 활용했다. 학교를 무대로 전시를 꾸리는 건 미술 기획자들의 꿈이라고 했던가. 교실 공간마다 한 작가의 작품이 담겨 있는 전시 공간, 그리고 창문 너머로는 해변이 보이는 전망의 조화는 그 ‘꿈’을 십분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일단 백남준의 1993년 작품인 ‘거북’은 울산시립미술관 1호 소장품으로, 1백66대의 TV 모니터를 거북 형상으로 만든 대형 비디오 조각 작품(6 x 10 x 1.5m)이다. 암막 커튼을 드리워 빛을 완전히 차단한 전시장에 엎드려 있는 커다란 전자 거북을 ‘모시기에’ 파도 일렁이는 바닷가의 단독 공간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자리가 아닐까 싶다. 깜깜한 곳이지만 거북의 머리는 분명 바다를 향하고 있다. 이렇듯 소장품 1호다운 무게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백남준의 ‘거북’을 위시해 대왕암 폐교에서는 29팀의 작가를 소개하는 소장품 전시 <찬란한 날들>이 오는 4월 10일까지 계속된다.
사실 소장품의 면면은 이 특별한 공간이 아니더라도 흥미롭다. 미디어아트의 또 다른 거장 피터 바이벨을 비롯해 이불, 문경원 & 전준호, 김윤철, 전소정 등 한국의 스타 작가들, 송동(중국), 날리리 말라니(인도), 와엘 샤키(이집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태국) 등 가히 ‘미니 비엔날레’를 방불케 하는 각국의 경쟁력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한다. 룸톤, 권하윤 작가의 경우에는 가상현실(VR) 체험을 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데,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묻어 있는 듯한 공간에서 미래의 세상을 거니는 듯 이색적인 경험의 묘미가 남다르다.
이 밖에 울산을 대표하는 시립미술관이라는 본분에 맞게 지역의 신진 작가 발굴전도 함께 열리고 있다. 울산에 연고가 있는 청년 작가 24명의 작품을 소개하는 <대면_대면 2021>展이다. 글로벌 무대를 수놓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와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신진 작가의 조합을 보노라면 대왕암 폐교가 ‘영구적인 전시장’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베니스 같은 비엔날레든 요코하마 같은 트리엔날레든 국제적인 미술 행사가 열리는 예술의 안식처로서 말이다.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자연과 기술, 그리고 예술이 창의적인 접점을 이루는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의 요람으로 거듭날 만한 환경을 이미 갖추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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