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예술 주도권’이 뭐길래, 아시아 도시들의 바쁜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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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04, 2019

글 고성연

요즘 ‘아트 피플’의 시계추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할 만큼 바삐 돌아간다. 한 도시에서 접할 수 있는 콘텐츠를 섭렵하는 데도 적잖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지만, 시야를 국경 너머로 확대하면 그야말로 다이어리에 빈 칸이
별로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게 될 것이다. 미술계 ‘장터’라고 할 수 있는 ‘아트 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시 곳곳에서 즐길 수 있는 문화 예술 축제인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등 각종 콘텐츠가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요 몇 년 새 아시아 문화권 문화 예술 콘텐츠가 불러일으킨 열기는 눈에 띌 정도로 뜨겁다. ‘도시의 세기’로 불리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시나 지역의 이름을 붙인 글로벌 행사가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하며 뜨고 지고 있다. 최근 상황만 보더라도 갈수록 무게감을 더해가는 상하이의 아트 페어주간에 이어 11월 말 싱가포르에서 비엔날레가 시작됐고, 오는 1월에는 타이베이에서 아트 페어가 열린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지닌 도시의 문화 예술 콘텐츠는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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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엄청난 규모의 미술관을 짓는다든지 경매 시장의 기록이 수백억원대를 넘어선다는 뉴스가 보도되면 많은 이들이 의아해한다. 대중의 일상에서 동떨어진 듯 느껴지는 현대 미술이 도대체 왜 그렇게 뉴스거리가 되는지. 그저 ‘고급 예술’의 논리이고 ‘그들만의 리그’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하기에는 미술 생태계를 둘러싼 시장 논리가 꽤 크고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니, 단순하게 산업적 관점에서 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스페인 북부 도시 빌바오와 프랑스 남부 도시 마르세유가 전문가들 사이에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최근 루이 비통 메종으로 한국에 자취를 남긴 스타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명작으로 유명한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1997년 완공)은 해마다 1백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꾸준히 끌어모으고 있고, 지난 2013년 모습을 드러낸 마르세유의 뮈셈(MuCEM, 지중해문명박물관)역시 개관 이래 연간 평균 1백25만 명을 웃도는 관람객을 맞이해왔다. ‘건물 하나가 도시를 살렸다’는 얘기를 들을 법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각처의 문화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도시 재생’이라는 관점에서는 로마시대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하지만 근대의 산업화를 거쳐 20세기에 도시화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가 보편화 양상을 띠면서 물리적인 구조를 재건하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도시 재생이 부각됐다. 특히 문화 예술이 도시 재생에서 중요한 촉매 역할을 담당했고, 탈산업화를 거친 도시들이 겪은 문화 주도의 회생 사례가 주목받았다. ‘소프트 파워’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붙은 21세기에 들어서는 그 무게감이 훨씬 더 커졌다. 문화 예술은 단순한 도시 마케팅 수단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을 묶는 통합적이고 지속 가능성 있는, 보다 유기적인 차원에서 추구되는 ‘창조 도시’의 핵심 자원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배경에서 소비 시장을 주도하는 동력을 지닌 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은 ‘크리에이티브 허브’를 향해 저마다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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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위용과 기개로 홍콩에 도전장을 던진 상하이의 ‘아트 파워’

요즘 문화 예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도시 중 하나는 단연 상하이. 작금의 상하이를 보면 ‘20세기가 ‘초대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도시의 세기’라는 문구가 절로 떠오른다. 중국의 ‘경제 수도’라 불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트 도시’ 타이틀까지 넘보는 야심을 드러내는 면모를 보노라면 ‘잘나가는’ 도시의 변화 속도가 얼마나 빠를 수 있는지 새삼 놀랍다. 지난해 하반기‘블록버스터급’ 콘텐츠로 성공적인 비엔날레를 치러내며 베이징보다 강력한 홍콩의 대항마로 부각된 상하이. 여기에는 황푸강 서쪽 11km에 이르는 웨스트 번드의 공장 지대를 문화로 재생한다는 도시계획에 힘입어 ‘문화 예술 특구’로 거듭난 쉬후이(Xuhui) 지구의 조성이 큰 몫을 차지한다. 올해도 11월 초 상하이 아트 페어 주간은 많은 이들의 관심과 발길을 동시에 이끌었는데, 웨스트 번드 아트 앤드 디자인 페어와 아트O21이 열리는 동시에 대다수 미술관과 갤러리가 눈길을 끌 만한 전시를 내놓기 때문이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한 웨스트 번드 아트 앤드 디자인 페어는 이미 가고시안, 페이스, 화이트 큐브, 하우저 앤드 워스 등 1백개가 넘는 세계적인 갤러리를 한데 모이게 하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서도 국제갤러리, 아라리오갤러리, 조현화랑 등이 부스를 차렸다. 아트O21은 보다 대중적이고 다양한 동시대 미술을 주로 만나볼 수 있는 위성 페어인데, ‘초청’을 받아야 하는 웨스트 번드 페어와 ‘참여’ 신청 방식으로 이뤄지는 아트O21에 동시 참가하는 갤러리도 꽤 있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서는 눈에 띄는 대형 콘텐츠가 덜했지만, 전반적으로 매매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미술관이나 아트 공간이 선보인 전시의 다양한 매력은 여전했다. 최고의 화두는 그동안 궁금증을 유발하던 ‘퐁피두 상하이’의 전격 등장이었다. 정확하게는 ‘센터 퐁피두 X 웨스트 번드 뮤지엄 프로젝트(Centre Pompidou X West Bund Museum Project)’라는 명칭인데, 파리에 있는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가 유럽 밖에서 처음 분관을 연 사례다. ‘동서양을 잇는 미술 외교’라 불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앞으로 5년에 걸쳐 소장품 전시와 기획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웨스트 번드의 새 미술관 건물(25,000m²)에서는 현재 개막전으로 19세기 말부터 동시대 미술까지 아우르는 첫 소장품 전시인 <The Shape of Time>이 열리고 있다. 이미 롱 뮤지엄, 유즈 뮤지엄, 탱크 등 내로라하는 문화 예술 공간이 들어선 웨스트 번드를 비롯해 록번드, 하오 아트 뮤지엄, 포선 파운데이션 등 훌륭한 공간을 다수 거느린 상하이가 결국 ‘아시아의 뉴욕’, 적어도 ‘동양의 파리’가 되지 않겠냐는 조심스러운 관측을 내놓는 이들도 있다. 세금이나 검열 등이 이슈로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30%를 훌쩍 넘겼던 세금이 그나마 올해 14%대로 낮아졌고, 막강한 경제 엔진이 가동되는 도시답게 큰손 컬렉터와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덕에 시장 잠재력이 워낙 크기에 미래 전망은 낙관적이다. 명실공히 아시아의 아트 허브로 자리 잡은 홍콩의 위상이 쉽사리 흔들릴 리는 없다면서도, 최근 정치 상황과 맞물려 상하이
아트 신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더욱 커진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상하이는 문화적 자산이 부재했던 도시가 아니다. 19세기 중반에 ‘개항’을 겪은 항구도시라는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오랜 세월 가려져 있던 ‘모던 상하이’ 특유의 복합적인 매력은 현재의 변화와 더불어 더욱 빛을 발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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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비엔날레에 임하는 싱가포르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초까지 상하이와 타이베이에서 비엔날레가 열렸고, 올해는 싱가포르의 해다. 개항 2백 주년을 맞이해 더 의미가 깊기도 한 2019 싱가포르 비엔날레(SB 2019)의 주제는 ‘Every Step in the Right Direction’.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끄는 변화를 향한 인류의 노력 속에서 여러 상황과 단계마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짚어본다. 필리핀의 저명한 기획자 패트릭 D. 플로레스(Patrick D. Flores)가 예술감독을 맡은 이번 비엔날레는 지난 11월 22일 개막해 내년 3월 22일까지 4개월간의 대장정을 펼친다. 어포더블 아트 페어(Affordable Art Fair)도 11월 말에 함께 열렸다. 상하이, 홍콩, 베이징을 거느린 중국이나 일본, 한국 등 동북아시아 3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지만, 동남아시아 아트 생태계에서 화교 자본을 등에 업은 싱가포르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마리나 베이 샌즈(MBS)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Singapore) 같은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출중한 플랫폼과 언어 등이 뒷받침되는 인프라는 큰 장점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속앓이를 겪기도 했다. 올 초 싱가포르 아트 주간을 열흘가량 앞두고 아트 페어인 ‘아트스테이지 싱가포르’가 급작스레 취소된 일로 받은 상처가 컸다.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는 스위스 출신의 거물 기획자 루돌프 로렌조(Rodolf Lorenzo)가 2011년 만든 아트 페어로, 싱가포르는 물론 동남아시아 미술계의 주요 행사였지만, 해마다 참가하는 갤러리 숫자가 줄더니 기어이 사라지고 말았다(그가 자카르타에 동일한 ‘아트 스테이지’ 브랜드로 2016년에 설립한 아트 페어 역시 두 차례만 개최되고 막을 내렸다). 부스 임대료 등 값비싼 싱가포르의 인프라에 비해 지역 아티스트의 시장 가격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하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지려는’ 노력이 분주하게 펼쳐지고 있다. 올해 비엔날레를 계기로분위기를 쇄신하고, 내년 상반기에는 동남아 근현대미술에 초점을 둔 아트 페어 ‘S. E. A 포커스’의 2회 행사를 여는데, 지역 내 11개 국가에서 20개 정도 갤러리가 참가할 예정이다. 또 내년 하반기에는 새롭게 선보이는 국제 아트 페어인 ‘아트 SG(Art SG)’가 개최된다. 정부 차원의 후원을 얻은 이 아트 페어는 첫해 행사에서 전 세계 80개 갤러리를 끌어들이며 지역미술계와 긴밀히 협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과연 이를 계기로 아트 스테이지의 아픔을 씻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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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자존심 타이베이, 우리도 뒤질 수 없다

아트 SG 공동 창립자 중에는 특기할 만한 인물이 있는데, 바로 아트 바젤 홍콩 초창기 멤버로 올 초 ‘타이베이 당다이(Taipei Dangdai·台北當代)’ 아트 페어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연 영국인 문화 사업가 매그너스 렌프루(Magnus Renfrew)다. 홍콩 등 아시아 문화권에서 쌓아온 경력을 바탕으로 최근 새로운 시장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고 있는 그는 내후년인 2021년께는 서울에서도 국제 아트 페어를 열어 한국 진출을 꾀할 것이라는 소문이 미술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아시아 도처에 새로운 플랫폼이 뜨고 지면서 ‘아트 페어의 범람’이 아니냐는 회의론이 나오기도 하지만,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 아시아 지역에서 ‘현대미술’을 비롯한 문화 예술 콘텐츠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이 커지고 있기에 도시와 시장, 그리고 콘텐츠가 잘 어우러지면 성공과 성장의 가능성은 어디든 도사리고 있는 법이다. 더욱이 해외시장에서 새로운 컬렉터를 만나길 원하는 갤러리, 참신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엿보길 원하는 컬렉터 입장에서는 플랫폼이 다양해지는 것 자체가 나쁠 건 없다. 타이베이 당다이 페어는 올 초 리먼 머핀, 화이트 큐브, 데이비드 즈워너 등 명성 높은 유수 갤러리를 포함해 90개 갤러리가 참가한 첫 행사에서 2만8천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모았다. ‘대작’의 등장으로 눈에 띄게 화려한 매출을 자랑하지는 않았어도 첫해치고는 괜찮았다는 평가다. 상하이 아트 주간이 있는 11월과 아트 바젤 홍콩이 열리는 3월 사이에 개최해 전략적으로 시기를 잘 택했다는 평가도 있다. 내년 1월 중순 열리는 2회 행사에는 97개 갤러리가 모일 예정인데, 올해에 이어 국제 갤러리, 조현화랑, 아라리오갤러리 등 한국 갤러리도 합류한다.

도시 기획자 리처드 플로리다는 소수의 슈퍼스타 도시들이 멀찌감치 앞서나가는 현상을 두고 ‘승자독식 도시화’라는 표현을 썼다. 도시의 불평등은 안타까운 문제지만, 그렇다고 일부 도시만 승승장구하는 엄연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결국 ‘문화 예술 도시’, ‘크리에이티브 허브’를 향한 아시아 여러 도시의 운명도 비슷하게 흘러갈지 모른다. 서울이나 광주, 부산의 행보에 시선이 쏠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국내 최대 미술 장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올가을 역대 최대 판매액과 관람객을 기록했다고는 하지만, ‘글로벌 브랜드’ 혹은 아시아 차원에서도 빼어난 경쟁력을 갖추었는지, 도시의 각종 인프라가 진화하고 있는지, 지역 커뮤니티의 수요와 참여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여러모로 곱씹어볼 구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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