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라는 가치, 당연한데 왜 어려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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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 2017

에디터 고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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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을 가리지 않고 글로벌 시민을 지배하고 있는 ‘다양성’이라는 화두. 다문화 교육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혼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성의 본질과 가치, 그리고 그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속박된 족쇄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봤을까? 최근 화제가 된 대중문화 콘텐츠를 계기로 다양성을 둘러싼 여러 함의를 살짝 들여다본다.


지난 2월 말, 지구촌 곳곳에서 생중계된 제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수상작 번복’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시상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상’ 수상작이 실수로 잘못 호명되는 바람에 이미 트로피를 받아 든 채 돌아가면서 소감을 발표하던 영화 <라라랜드> 제작진이 당황스럽게 물러나고, 진짜 수상작인 <문라이트> 감독과 배우, 제작진이 뒤늦게 무대에 올라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감격의 순간을 누렸다. 알고 보니 주최 측 직원이 작품상 발표자인 원로 배우 워런 비티에게 여우 주연상 수상자(<라라랜드>의 엠마 스톤) 봉투를 전달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였다. 트로피를 돌려준 이들도, 건네받은 이들도 민망한 상황이 되면서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자랑하는 ‘오스카’의 권위는 타격을 입었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이날 시상식 진행자 지미 키멜의 순발력 돋보이는 마무리 멘트처럼 그래도 ‘더 많은 이들이 수상 소감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을 도리밖에 없어 보였다. 또 이 역대급 해프닝의 희생양이 개인 자격으로 상을 받는 배우나 감독 부문이 아니라 작품상 부문이었다는 사실도 그나마 다행으로 느껴졌다(누군가 무대에서 홀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 수상 번복을 통고받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애처롭다).


트럼프 정부가 일으킨 아카데미의 변화, 더 이상 ‘화이트 오스카’가 아냐!

작품상 발표 시점에서 이미 6관왕을 차지한 <라라랜드>가 아니라 <문라이트>가 트로피 반납의 운명을 겪어야 했다면 상대적으로 더 안타깝지 않았겠냐는 목소리도 많이 들렸다. 그 이유는 <문라이트>가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전체적인 작품성도 뛰어나지만, 그 왕관을 둘러싼 다른 함의도 여러모로 돋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30대 흑인 감독 배리 젠킨스가 연출을 맡아 역대 최저 제작비(1백50만달러로 추정된다)로 만든 이 작품은 마이애미 빈민가를 배경으로 흑인이자 성 소수자인 한 아이가 소년으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섬세하면서도 담담하게 풀어낸다. 소위 ‘다양성 영화’. <문라이트>가 최고 영예로 일컬어지는 작품상(2014년 <노예 12년> 이후 흑인 감독의 영화가 작품상을 거머쥔 건 두 번째)은 물론 각색상, 조연상까지 휩쓸면서 3관왕에 오른 데다 흑인 베테랑 배우 비올라 데이비스가 <펜스>로 여우 조연상을, 시리아 민방위대의 인명 구조 활동을 담은 <하얀 헬멧>이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으면서 그동안 ‘백인만의 잔치’라는 의미에서 ‘화이트 오스카’라는 비아냥을 듣던 아카데미가 ‘드디어 달라졌다’는 평을 받았다. ‘다양성의 가치’를 한층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카데미가 올해는 꽤나 ‘정치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란 예측이 쏟아졌다. 반이민 정책 기조를 강하게 내세우는 트럼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미국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업계이기에 반(反)트럼프 분위기가 강한 데다, 아카데미 차원에서도 ‘차별’에 대한 비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논리에서다. 실제로 시상식 내내 트럼트 대통령을 겨냥한 유머 섞인 일침이 넘쳤고, 상당수 참석자는 반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하는 미국시민자유연맹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파란 리본’을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또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란의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비인간적인 법에 모욕당한 이란 국민과 다른 6개국 국민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불참했다’라는 내용의 수상 소감을 글로 남기면서 트럼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저항 의지를 강력히 드러냈다. 트럼프 정부 덕분에 문화계가 똘똘 뭉치게 된 셈이다.
이런 풍경에 대해 다분히 정치적이어서 불편하게 여기기보다는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다양한 가치를 포용한다는 명목으로 공정성을 버리고 소수자 집단에 특혜를 줬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사도 인간이 하는 일인 만큼 저마다의 잣대는 다른 법이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기준에서 볼 때 충분히 납득할 만한, ‘자격 있는’ 수상이니 말이다(다양성을 ‘의식’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어쩌면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지 않는 태도 자체도 ‘편향’된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 덕분에 작품의 가치가 온전히 평가되고 부각된, 정당한 사례가 아닐는지).


또 다른 형태의 차별? 다양성이라는 가치의 무게와 족쇄

하지만 월계관이 잘 어울리는 <문라이트>의 수상과는 별도로 다양성의 가치라는 주제는 분명 곰곰이 생각해볼 만한 필요가 있는 듯하다. 대중문화 콘텐츠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기업 영역에서도 오늘날 다양성은 큰 화두인 동시에 난제가 아닌가. 다민족, 다인종 사회인 미국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전반적으로 신(新) 유목민 시대라 불리는 21세기의 지구촌은 ‘다양성=건전한 생태계’라는 명제에 포위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화, 다문화주의, 정치적 다원성, 생물 다양성 등 다양성을 둘러싼 온갖 논리와 과제에 항상 노출되고 휘둘리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흔히 다양성은 평등과 관용과 같은 선상에 놓이면서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처럼 여겨지지만, ‘다양성 만능주의’에 비판적인 진영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인류학자인 피터 우드는 현대사회의 권력자가 된 다양성의 명암에 대해 좀 더 풍부한 논의를 펼쳐야 할 필요성을 각인시킨 인물이다. 그는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의 차이를 논할 때 처음 제기된 이래 서로 다른 민족, 성별, 종교, 성 정체성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한 다양성이 어느덧 상식이자 선(善), 심지어 신화가 되어버렸다면서 인위적으로 다양성을 강조하다 보면 순수한 구별과 비판마저 봉쇄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려 다양성이라는 명분 아래 특혜가 권력화되면서 역차별과 비효율을 조장하고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에만 주목하는 편향에 빠져 인간이 본래 의도했던 진정한 다양성을 해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기득권을 지닌 보수 우파의 편협된 논리가 섞여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을 지양한다는 맥락에서 피터 우드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만한 측면이 꽤 있다. 웬만한 사회에서는 사회 통합 차원에서 다양성을 증진하기 위한 각종 법, 제도,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 과정 중 오히려 사람들을 특정 집단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면 “저들은 000야”라고 규정하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생겨나 현실에서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존재하고, 실제로 그런 부작용은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목격할 수 있다. 특정 성별이나 인종 등을 옹호하다가는 전체 수준이 하향 평준화되기도 하는데 말이다.
예컨대 인도 출신 미국인, 일본계 미국인, 캄보디아계 미국인의 공통점은 그들이 아시아인이라는 걸까, 미국인이라는 걸까(정작 본인들은 ‘미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지녀도 다른 사람들은 ‘아시아인’이라는 공통분모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미국인이든, 아시아인이든 하나의 카테고리에 속하면 모두 다 비슷한 특성을 지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을 ‘집단을 우선시하고 바지런한 성향의 아시아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우문임이 분명하지만, 어쩌면 아시아에서의 문화적 경험이 별로 없는 유럽인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K-팝을 좋아하는 노동당 소속의 성공회 신자 영국인, 불교도이면서 보수파인 프랑스인을 그저 ‘유럽인’이라고 묶어버린다면 개인의 다양성은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고 속상해할 것이다.


혼종의 시대에 창의적으로 진화한다는 것

사실 인류에게 다양성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종, 민족, 언어, 성별, 종교, 기호와 성향 등으로 따질 때 인간은 매우 다채롭게 진화해온 존재 아닌가. 이 같은 맥락에서 ‘다문화’도 당연한 현상일 터다. 그렇게 여러 문화가 저마다 알아서 꽃피고 시들도록 놔두면 별 탈 없을지도 모르지만, 문화 평론가 김헌식의 발언을 인용하자면 안타깝게도(?) 사람은 ‘움직이는’ 존재다. 그는 사람이 움직이므로 문화 역시 움직이면서 서로 다른 문화가 부딪히고, 융합과 충돌이 생겨난다고 했다. ‘문화적 혼종의 시대’라고 불리는 현대사회에서 예전에는 소수가 다수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용광로에서처럼 하나로 흡수되는 ‘멜팅 팟(melting pot)’ 문화를 주로 지향했다면, 이제는 섞이기는 하되 재료가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잃지 않은 채 어우러지는 ‘샐러드 볼(salad bowl)’ 문화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저마다의 고유한 맛와 색을 완전히 잃지 않더라도 어우러지는 가운데 큰 틀에서는 새로운 맛이 나게 마련이고 말이다. 이를 기업이나 각종 단체 같은 조직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는 창의성과도 연결된다. “다양성은 생명체가 지구에 가져다준 위대한 선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평등이나 공정성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창조성’을 끌어올리는 차원에서도 다양성이 적극 옹호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그토록 ‘다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현실에서의 고정관념은 그리 많이 바뀐 것 같지 않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교육은 행동은 둘째치고 태도조차 바꾸지 못한다면서 작은 실천이라도 적극적인 ‘행동 설계’로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오케스트라 연주 실력은 남성이 여성보다 뛰어나다는 인식 같은 걸 꼽을 수 있겠다. 세계적인 경영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에 실린 글에 따르면 1970년대에 미국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연주자 비율이 10%도 채 못 미쳤는데, 그 이유는 실력이 아니라 단지 심사위원들의 인식 때문이었다. 그런 편견이 ‘블라인드 오디션’을 실시하게 된 계기가 됐는데, 놀랍게도 이 단순한 변화가 오케스트라의 여성 비율을 거의 40%까지 끌어올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고.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 명단에 들어 있던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 역시 인간의 편견에 경종을 울리는 하나의 사례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그 전신인 항공자문위원회(NACA)에서 일한 흑인 여성 수학자들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흑인’+‘여성’+‘수학’이라는 조합은 지금도 대다수의 편견에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클진대, 심지어는 흑백 차별이 심했던 20세기 중반에 차별의 벽을 딛고 조직의 편견을 바꿔버린 이들의 이야기다.


아무리 잘게 카테고리를 나눠도 결국 집단의 유사성보다는 개개인의 다양성이 훨씬 더 뚜렷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는 겉과 속이 똑같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세상에 다양한 스토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문라이트>나 <히든 피겨스> 같은 영화에 ‘다양성’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분류하자면 저예산 영화가 있고, 블록버스터가 있는 게 아닐까. 우리는 그냥 어떤 영화를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지구인인 셈이고 말이다. 어쨌거나 대중문화 콘텐츠가 우리의 인식과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아카데미 효과’에 힘을 입었든 아니든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주는 이런 영화들의 흥행은 바람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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